발행일: 2025-11-26 11:15 (수)

오매일여, 깨달음의 기준

23. 끊임없는 길

백척간두, 은산철벽 경지
자나 깨나 지속되는 화두
​​​​​​​한결같은 공부, 부처의 길

 

행주좌와 화두가 성성하게 끊어지지 않을 때 화두타파의 실마리가 보인다.
행주좌와 화두가 성성하게 끊어지지 않을 때 화두타파의 실마리가 보인다.

불교란 부처님의 가르침이고 부처란 깨달은 분이다. 우리도 깨치면 생사 윤회에서 해탈하여 영원한 행복을 누린다.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다. 누구든지 깨칠 수 있다. 선(禪)은 본래성불을 말한다.

그런데, 이 깨달음에 대하여 너무나 다양한 견해가 난무하여 불교의 정체성에 혼란이 적지 않다. 예수교야 하나님을 믿으면 그만이지만, 불교는 믿음에서 나아가 깨달음으로 가야 한다. 불교의 근본은 깨달음으로 생사 윤회를 해탈함이다. 믿음을 넘어선 깨달음, 그 깨달음이 불교만의 특색이다.

근래에 우뚝한 선지식들이 하나둘 가시면서 불교의 정견 자체를 비방하거나 왜곡되게 하는 흐름이 있기도 하다. 어느 시대에도, 부처님 당시에조차 늘 정견과 사견이 있어왔지만 정견 흐름은 늘 이어져 왔다. 어려운 때일수록 부처님과 조사 선지식들의 가르침을 믿고 바름과 삿됨을 바로 보는 정견을 확고히 해야 한다.

깨달음, 삼매의 완성

불교의 정견 세우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깨달음에 대한 문제다. 근래 부처님의 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이 아닌 조그마한 소견 내지 체험을 가지고 깨달아 부처가 되었다고 하는 이들이 날로 늘고 있다.

부처님께서는 깨치고 난 다음 최초의 설법인 초전법륜에서 당신이 중도를 깨달았노라고 중도대선언을 하셨다. 중도의 깨달음은 ‘위없는 바르고 평등한 깨달음(無上正等覺,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이다. 다른 말로 열반(涅槃, 니르바나)이라 한다. 일체 번뇌의 소멸을 이루어 생사 윤회의 괴로움에서 영원히 벗어난 것이다. 영원한 대자유를 성취한 것이다.

부처님이 깨달은 그 마음 상태를 선정 삼매라고도 한다. 일체의 번뇌를 완전히 비운 청정한 마음이 삼매이다. 우리 마음에서 번뇌가 완전한 소멸된 것이다. 깨달아 부처가 된 이는 부처 행을 한다. 지금 이 순간 깨달아 부처 행을 하면 부처이지 전생이나 과거는 상관할 것이 없다.

초기 경전에 보면 초전법륜에서 오비구를 비롯하여 수많은 수행자들이 부처님의 법문을 듣던 중 언하대오하여 깨친다. 초기 경전에는 깨달음이 도처에 나온다. 부파불교시대가 되어 깨달음이 너무 복잡하고 어렵게 기록되었다. 지금 남방 상좌부 승가에서 수행 교과서로 삼는 <청정도론>에서는 중생이 아라한과를 성취하는 것을 ‘삼아승지겁(三阿僧祗劫, 헤아릴 수 없는 무수한 세월을 세 번이나 윤회하는 시간)’이 걸린다고 하는데, 이것은 부처님의 초기 경전에 가르침에서 너무나 멀어진 것이 아닐 수 없다.

선(禪)의 깨달음, 돈오(頓悟)

초기 경전에서 오비구의 깨달음은 언하대오(言下大悟)이다. 부처님의 첫 설법에서 다섯 수행자가 차례대로 깨달아 부처님 제자가 되어 첫 승가공동체가 이루어졌다. 이것이 불교의 출발이다.

선은 비록 부처님이 가신지 1천년이 지나 출현하였지만, 부처님이 깨친 중도와 찰나 깨침을 되살린 불교 정신의 회복이다. 초기 경전처럼 선어록에도 조사와 제자들이 문답 중에 숱하게 깨친 기록이 나온다.

다만, 선은 부처님이 깨친 중도연기를 근본으로 하면서 시대 변화와 함께 독창적인 말을 쓴다. ‘본래청정’, ‘돈오’, ‘견성성불’, ‘화두’와 같은 말은 부처님의 초기 경전에는 볼 수 없는 부처님 제자, 조사의 설법이다. 부처님은 중생이 중도연기, 무아라는 것을 깨친다고 하였다면, 선은 중생이 중도연기로 존재하니 본래 부처라는 것을 깨친다고 한다.

부처님께서 일체 번뇌를 소멸하는 깨달음을 말씀하셨다면, 선은 본래 부처이니 중생이라는 분별망상을 비우고 비워 마지막에 깨치는 순간을 돈오(頓悟)라 한다. 돈오라 하여 특별한 것이 아니라 부처님처럼 일체 망상을 없애어 본래 부처로 돌아가는 것이다.

화두선의 깨달음, 삼관(三關)

선에서는 이 분별망상을 비우는 탁월한 방편으로 화두 참선법을 제시한다. 조사가 제시한 한 마디 말로 일체 분별망상을 정화하는 것이 화두 참선법이다.

이 화두선에서 깨달음은 내 안에 본래 마음을 밝히는 것이니 밖으로 찾고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본래 내 마음이 그대로 부처이고, 밝게 빛나고 있으니 오직 화두로 분별망상만 비우면 된다.

화두선에서 내 안의 분별망상을 비워가는 과정은 크게 두 가지 길이 있다.

하나는 내가 본래 부처임을 바로 알아 정견을 세우고 믿음을 갖추어 선지식으로부터 화두를 받아 참선해 나가는 참구 깨침의 길이 있다.

다른 하나는 화두를 받자마자 바로 타파해서 깨치는 순간 깨침의 길이다. 참구 깨침의 길이든 순간 깨침의 일이든 번뇌망상을 완전히 비운 것이 깨달음이다.

다만, 조사어록에서는 화두선에서 깨달음의 기준으로 세 가지 과정을 제시하는데 화두가 동정일여, 몽중일여, 숙면일여 또는 오매일여 하면 깨달음에 가까워진 것으로 본다.

화두의 동정일여와 몽중일여 경계

대중가요 중 “앉으나 서나 당신 생각”이라는 노래가 있다. 사랑하는 이를 생각하는 애절한 가사가 범부중생의 심정을 잘 표현하고 있다. 이 노래 말처럼 화두 참선도 그렇게 하는 것이다. 화두를 참구할 때 앉으나 서나 화두만 생각해서 번뇌망상이 사라지면 동정일여(動靜一如)다. 이것은 우리 의식이 깨어나 앉아서 좌선할 때나 서서 걸어 다니고 움직일 때에도 화두 의심이 지속되는 경지를 말한다. 유식(唯識)에서 말하는 6식·7식·8식 중에서 6식을 정화하는 과정이다.

성철 스님은 출가 전에 산청 지리산 대원사에 요양 가서 <불교> 잡지를 보고 혼자서 화두 참선한 지 42일 만에 화두가 동정일여가 되는 것을 체험했다. 스님은 출가하여 불교 중흥의 큰 역할을 하셨다. 화두선에서 동정일여 체험이 어렵다고 하지만, 성철 스님은 이미 출가 전에 혼자서도 이 경지에 들었으니 그리 어려운 것도 아니다. 화두선의 동정일여는 심리학에서 의식 세계를 정화하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즉, 의식이 깨어있을 때 번뇌망상이 없는 경지를 말한다.

다음은 몽중일여(夢中一如) 경지다. 화두가 앉으나 서나 끊어지지 않는 경지가 계속되면 이어서 잠자다 꾸는 꿈에서도 화두가 지속되는 경지를 체험한다. 심리학으로는 잠재의식에서도 화두 공부가 지속되는 경지이다. 우리가 일체 번뇌망상을 비우려면 앉으나 서나 깨어있는 경지는 물론이고 꿈 꿀 때에도 화두가 일념이 되어 있어야 비로소 번뇌망상에 휘둘리지 않는다. 유식에서는 7식을 정화하는 과정에 해당한다.

실제 간화선을 제창한 대혜종고(1089~1163)스님은 젊은 시절 각고의 정진 중에 어떤 체험을 하고는 깨쳤다고 생각했다. 주변을 둘러봐도 자기만큼 공부한 이가 없다는 자만에 빠져 10여년을 허송세월한다. 그러던 어느 날 잠을 자다가 꿈속에서 강도를 만나 공포에 떨던 중 깨어나 곰곰이 생각하기를 고작 꿈속에서도 이렇게 두려움을 느끼는데 정작 죽음에 임해서는 어떻게 될 것인지를 생각해보니 등에 식은땀이 났다. 그리하여 <벽암록>을 지은 원오 극근 선사를 찾아가 화두를 참구하여 자나 깨나 일여한 경지를 투과하여 확철대오한다.

우리는 대혜선사의 깨달음 과정을 교훈으로 삼아 꿈속에서도 화두가 지속되거나 여여한가를 점검한다면 자기 공부의 단계를 알 수가 있다.

오매일여, 깨달음의 기준

화두선에서 화두가 몽중일여 경계를 돌파하면 자나 깨나 끊어지지 않는 오매일여 경계에 이른다. 오매일여는 화두가 타파되는 깨달음 직전의 마지막 경계이다. 이 오매일여 경지를 백척간두(百尺竿頭), 은산철벽(銀山鐵壁)으로도 표현한다.

성철 스님은 <백일법문>이나 <선문정로> 등에서 화두가 자나 깨나 지속되는 오매일여를 투과해야 깨친다고 강조한다. 성철 스님이 해인사 백련암에 주석할 때 출가, 재가를 막론하고 많은 이들이 깨쳤다고 인가해달라고 찾아 왔다. 처음에는 스님이 직접 만나 공부를 점검하였는데, 화두가 동정일여도 되지 않는 이들이 깨달았다고 큰소리치는 것을 보고는 직접 만나지 않고 시자를 시켜 “화두 공부가 꿈속에서도 되느냐?” 물어서 그렇다는 사람만 만났다고 한다.

그런데, 일부 학자들이나 견성했다 하는 이들은 성철 스님이 “오매일여를 투과해야 깨친다”는 법문에 대하여 ‘허무맹랑한 소리’라 비난한다. “사람이 잠을 잘 때는 아무 생각이 없는데, 어떻게 화두 참선이 되느냐?”고 힐난한다.

그러나, 성철 스님만 오매일여를 말한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 조사로 태고보우 국사나 나옹혜근 왕사의 어록에도 “화두가 타파되려면 오매일여를 투과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중국 조사로 간화선을 제창한 <서장>의 대혜 선사나 <선요>의 고봉 선사도 ‘오매일여’를 깨달음의 기준으로 제시한다.

어째서 선지식들은 한결같이 화두 공부가 자나 깨나 끊어지지 않아야 깨달음을 이룬다 하였을까? 우리가 깨어 있을 때나 꿈속에서나 잠잘 때의 무의식에서조차도 미세한 번뇌를 완전히 비워야 열반을 성취한 부처라 할 것이다. 범부도 청춘시절에 앉으나 서나 연인 생각으로 잠을 설치기도 하며. 또 사랑하는 가족이 갑작스레 세상을 떠날 때 복받치는 슬픔으로 잠도 오지 않고 밥 먹는 것도 잊고 며칠을 지새우는 경우도 있다. 범인의 애정도 이럴진대 생사 윤회를 해탈하여 부처가 되는 깨달음이라면 자나깨나 한결 같은 공부가 아니고서야 과연 깨쳤다고 할 수 있겠는가?

태백산 선지식 고우 스님은 화두선의 오매일여 경지를 유식의 제8아뢰야식, 무의식을 정화하는 비유로 설명하였다. 〈끝〉

▶ 한줄 요약

범부도 청춘시절 밤잠 설치는데, 생사윤회 해탈하려는 자의 공부는 어떠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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