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깨달음, 중도삼매의 체득
독서와 게임 몰입과 삼매 달라
주체 두는 몰입은 분별의 단계
분별 망상 비워야 지혜 솟아나
불자라면 누구나 ‘삼매(三昧)’란 말을 들어 보았을 것이다. 삼매란 무엇일까? 불자가 아니더라도 삼매란 말은 친숙하다. ‘독서 삼매’, ‘게임 삼매’ 같이 무엇인가 몰두하여 시간 가는 줄 모르는 경험은 누구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삼매인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불자라면 이 삼매에 대하여 바른 안목을 갖추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삼매는 부처님의 깨달음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불자라면 삼매에 대하여 바른 공부를 하여 정견을 갖추어야 한다. 우리도 수행을 통해 부처님의 삼매를 체험하면 지혜롭고 평화로운 삼매의 마음을 계발할 수 있다. 선(禪)에서는 누구나 본래 삼매를 다 갖추고 있다고 본다.
삼매란 무엇인가?
선의 종전 <육조단경>에는 ‘일행삼매’라는 말이 있다. 6조 혜능대사가 법문에서 근본으로 삼은 ‘정혜(定慧)’ 편에 나온다.
“일행삼매(一行三昧)란 가거나 머물거나 앉거나 눕거나 항상 곧은 마음을 행하는 것이다. 마음으로 아첨하고 비뚤어지게 행하며, 입으로는 법이 곧음을 말하지 말라. 다만 곧은 마음으로 행하며 모든 법에 집착하지 않는 것을 일행삼매라 한다.”
혜능 대사는 당신의 돈오 법문은 ‘정혜를 근본으로 삼는다’ 하면서 ‘정과 혜를 다르다 하지 말라’하고는 ‘일행삼매’를 말한다. 혜능대사가 말하는 일행삼매는 우리 일상생활 가운데 마음이 항상 양변을 떠나 바른 마음으로 행함을 말한다.
우리 마음에서 나다-너다, 옳다-그러다 하는 양변을 떠난 자리를 정(定, 사마타)이라 하고 그 양변 여읜 정에서 지혜가 나오는 것을 혜(慧, 위빠사나)라 한다. 이 정혜는 바로 우리 본래 마음인데 부처님은 이것을 깨달아 생사윤회를 해탈하였다. 부처님이나 중생이나 본래 마음은 정혜로 되어 있는데, 중생은 정혜로 된 본래 마음을 모르고 나다-너다, 옳다-그르다 하는 양변에 집착하여 머물러 생사 윤회하며 괴로움을 받고 사는 것이다.
깨어난 부처님이나 조사스님은 정혜 즉 삼매의 마음으로 사는 것이다. 행주좌와에 늘 양변을 여의고 바른 마음을 행한다. 깨달음은 곧 수행을 통해 삼매를 증득하는 것이다. 선(禪)에서는 우리 본래 마음이 깨달아져 있고, 본래 삼매로 되어 있다고 한다.
불교의 삼매(三昧)는산스크리트어‘Samdhi’(사마디)를 음사하여삼매(三昧) 또는 ‘삼마지(三摩地)’라 했다. 번역은 ‘정(定)’이라고도 하고, 지관(止觀) 또는 정혜(定慧)가 가지런히 지녔다고 등지(等持)라고도 한다. 부처님이 깨달아 일체 번뇌망상을 여의고 고요하면서도 또렷또렷한 적멸(寂滅)의 마음을 말한다. 깨치면 삼매가 완전한 것이다.
부처님 이래로 모든 조사, 아라한들은 모두 깨달음으로 삼매를 성취한 이들이다. 우리도 깨달아 삼매를 성취하면 생사고해를 벗어나 영원한 대자유와 행복을 누린다.
불교 삼매와 독서 삼매
그런데, 일반적으로 ‘독서 삼매’ ‘게임 삼매’라는 말도 있으니 불교에서 말하는 삼매와 같은 것일까? 보통 독서삼매에 빠졌다고 할 때, 고도의 정신집중으로 매우 고요한 상태가 지속되는 것을 말한다. 독서와 게임, 도박 같이 하나의 대상에 집중하면 시간가는 줄 모르고 몰입한다. 이것도 불교 삼매와 같은 것인가?
만약 도박과 게임에 몰입하는 것이 삼매라면 깨달음도 도박과 게임을 통해서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불교의 깨달음은 중도, 무아를 깨치는 것이 아닌가? 내가 있고, 내가 도박, 게임의 즐거움을 누리기 위해 몰입함은 나-너, 이기고 지는 승부심으로 하는 것이니 여전히 상대 분별의 양변에서 하는 것이다. 어느 정도 몰입의 즐거움은 있을지라도 적멸의 깨달음 삼매와는 차원이 다르다. 또한 부처님은 도박 같은 중독된 행위는 금하셨다.
독서 삼매도 마찬가지다. 책을 보는 행위에 몰입하여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재미에 빠진다. 하지만, 책을 볼 때는 책이라는 대상과 책을 보는 주체, 즉 주와 객의 상대 분별에서 문자와 사유를 통해서 몰입의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니, 주객합일, 중도, 무아의 삼매와는 역시 다르다고 봐야 할 것이다. 특히 불교의 깨달음 삼매는 양변을 여의는 중도를 깨치는 것이니 말과 문자를 통한 사유 작용이 있는 한 옳고-그름, 주관과 객관이 벌어진 상대 분별심이 작동하여 중도를 깨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독서와 게임, 도박 삼매는 상대적인 몰입의 즐거움은 느낄 수 있지만, 중도, 무아의 깨달음 삼매와는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불교 삼매는 중도삼매
우리 불자들은 불교를 공부할 때 혼란하고 복잡한 상황을 만나면 항상 불교의 근본이 중도라는 것을 되새겨야 한다. 부처님이 깨친 뒤 첫 설법이 중도대선언이었다. 이어서 중도가 곧 팔정도라 하였다.
팔정도의 정견은 중도로 보는 견해를 말한다. 중도 정견은 부처님의 안목이다. 불교 삼매란 부처님의 깨달은 마음인 중도를 말한다. 불교 삼매는 곧 중도 삼매이다.
그러므로 불교 삼매는 중도 정견과 다르지 않다. 불교 삼매란 마음에 양변을 여의고 지혜가 나는 상태를 말한다. 이런 중도 삼매를 부처님이 깨달음을 통해 성취한 것이고, 6조 혜능대사는 정혜등지라 하였고, 남방 상좌부불교에서는 사마타위빠사나(止觀)이라 하며, 화엄종에서는 적광(寂光), 천태종에서는 쌍차쌍조(雙遮雙照), 임제종에서는 살활(殺活)이라 한다. 이름만 다르지 모두 부처님이 깨친 중도 삼매를 각 종문의 입장에서 창조적으로 표현하였을 뿐이다.
화두를 참구하여 번뇌망상을 비워 깨달음으로 가는 간화선에서는 중도 삼매를 성성적적(惺惺寂寂) 삼매라 한다. 성성적적이란 화두가 또렷또렷하면 번뇌망상이 사라져 고요한 적적이 되는 마음 상태이다. 우리 마음에서 화두가 또렷또렷하게 의심하는 것을 성성(惺惺, 위빠사나)라 하고 화두가 성성하면 번뇌가 사라져 고요한 적적(寂寂, 사마타)이 되는 것이다. 화두가 일념이 되어 끊어지지 않고 지속되면 삼매에 들어 지혜와 평안의 마음이 계발된다. 이것은 체험의 세계라 아무리 좋다고 말해줘도 직접 경험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으니 오직 할 뿐이다.
간화선이나 위빠사나나 염불, 주력, 간경 등 모든 불교 수행은 중도 삼매를 성취하는 방법이다. 화두를 참구하든 호흡을 관하든 부처님 이름을 부르든 방법은 달라도 중도 삼매를 닦는 목표는 다르지 않다.
선에서 정혜쌍수가 아닌 정혜불이라 하는 이유?
6조 혜능대사는 <육조단경> 정혜품에서 “이 법문은 정과 혜로써 근본을 삼는다. 반드시 미혹하여 정과 혜가 다르다고 하지 말라. 정과 혜는 몸이 하나여서 둘이 아니다〔定慧不二〕” 라고 하였으니, 조사선에서 깨친 마음이 정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정과 혜가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고려 보조국사는 <수심결>에서 “정혜쌍수(定慧雙修)”를 말하였다. 정과 혜를 둘로 보고 선정과 지혜 둘 다 닦아야 한다는 말이다. 이것이 그 유명한 정혜쌍수이다.
하지만, 이 정혜쌍수는 혜능대사의 정과 혜가 하나라는 정혜불이, 정혜등지의 입장에서나 부처님이 말씀하신 중도 정견에서 볼 때 맞지 않는 견해이다. 정과 혜를 둘로 보고 같이 닦아야 한다는 말은 정과 혜를 둘로 보는 양변에 떨어진 견해이다. 중도 정견으로 볼 때 양변을 여읜 자리가 정이고 그 정에서 혜가 나는 것이 중도 삼매이니 정혜쌍수라 함은 정과 혜를 둘로 보는 양변에 떨어진 입장이다.
그러므로 양변을 여읜 중도 삼매의 성취를 불교의 깨달음이라 볼 때 정혜쌍수의 견해는 깨달음이라 할 수 없고, 깨달음을 향하는 방편으로 보아야 한다. 즉, 정혜쌍수는 법, 달의 입장이 아니라 방편, 손가락 입장에서 하는 말이다. 선은 오직 깨달음, 중도, 삼매, 정혜불이의 입장이니 정혜쌍수라 함은 선이 아닌 교학이나 남방상좌부불교의 위빠사나의 견해와 상통하는 견해이다.
위빠사나 수행자들의 주장을 보면, 사마타를 먼저 닦아 위빠사나로 완성한다고 하니 사마타와 위빠사나를 둘로 보고 하나로 완성시켜 가는 입장이다. 즉, 중생과 부처를 나눠서 중생에서 세세생생 점점 닦아 가서 수다원·사다·아나한·아라한과를 성취하는 점수법, 차제법을 말한다. 이런 수행관을 점수돈오(漸修頓悟)라 할 수 있겠다. 물론, 위빠사나 수행자들은 돈오를 부정할 것이다.
삼매의 즐거움, 열반, 적멸의 즐거움
정혜쌍수와 사마타를 닦아서 선정의 힘을 키운 뒤 위빠사나를 닦아 깨달아 삼매를 완성한다는 입장과 달리 禪에서는 중생이 본래부처라 보고 중생의 본래 마음도 부처님처럼 삼매로 되어 있다고 본다. 禪에서 삼매는 누구나 완성되어 있지만, 스스로 중생이라 착각하여 분별망상에 가로막혀 사는 이들은 본래 가지고 있는 삼매의 지혜와 즐거움을 누리지 못한다. 그러니 내가 있고, 내가 중생이라는 착각과 분별망상만 비우면 된다.
일체의 번뇌망상을 없애어 깨치게 되면 부처님처럼 열반 삼매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적멸의 즐거움이다. 깨달아 삼매를 성취하면 생로병사의 4고(苦)에서 벗어나며 8풍(風)에도 자유자재하다. 불교 삼매는 오직 체험의 세계이니 말과 문자의 이해로는 영원히 알 수가 없다. 금강산 그림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직접 가보는 것과는 천지 차이다.
매순간 내가 있고, 내가 중생이라는 착각과 분별망상을 비우면 삼매 속 지혜가 솟아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