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견성
평상심 체득하는 것이 좌선·참선
자기 마음·성품 보는 것이 깨달음
불교에서 마음은 연기이면서 무아
見性은 연기·무아 보아 깨치는 것
중도·연기·무아, 깨달음의 기준
불교 무아·공은 중도를 말하는 것
허무주의의 무아·공 아님 알아야
앞에서 우리는 좌선이란 마음이 안과 밖으로 흔들리지 않고 안정되는 것이라 했다. 그럼 왜 좌선을 하는가? 부처님처럼 밖의 물질에 집착하지 않고 안으로도 어지럽지 않는 평안한 마음으로 사는 것이다. 삶의 고난에도 늙음과 병의 괴로움에도 죽음의 공포에도 평상심으로 여여하게 맞이하는 그런 마음을 체득하는 것이 좌선이고 참선이다. 부처님께서는 이것을 일러 마음을 깨쳐 생사윤회에서 해탈하여 열반을 성취하는 것이라 하셨다.
과학기술과 문명의 발달 덕분에 물질적인 풍요는 날로 좋아졌으나 빈부와 갑을, 남녀와 노소 양변의 대립과 갈등은 점점 늘고 있다. 코로나19 대유행으로 문명의 발달조차 한낱 환상이었음을 일깨운다. 이러한 시대에 우리는 어떻게 해야 자유롭고 행복하게 잘 살 수 있을까?
우리는 “불교에 답이 있다, 부처님의 깨달음과 삶에 지혜가 있다”고 말해주어야 한다. 범부 중생은 내 밖의 물질에 집착하고 욕망을 추구하는 삶을 최상이라 하나 부처님은 무소유와 비움, 그리고 남을 돕는 일을 통해서 얼마든지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을 몸소 우리에게 알려주었다. 참선이란 우리도 부처님처럼 각자의 마음을 깨달아 자유자재한 삶을 누리는 것이다. 참선 수행자들은 깨달음을 ‘견성(見性)’이라고도 한다. 과연 견성이란 무엇인가?
〈육조단경〉의 견성이란?
선종(禪宗)의 종전 〈육조단경〉은 ‘견성(見性)’을 이렇게 말한다. “마음을 알아 견성(見性)하면 스스로 불도(佛道)를 이루나니 즉시 확연히 깨쳐 본래 마음에 돌아간다.” 자기 마음을 알아[識心] 견성하면 스스로 부처님의 중도를 이루어 즉각 확철대오하여 본래 마음으로 돌아간다는 법문이다. 6조 혜능대사는 자기 마음을 알아 성품을 보는 것이 곧 깨달음이고 부처라고 한다. 깨달아 부처가 됨은 곧 본래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이니 선의 본래청정, 본래성불을 말한다. 이것이 선에서 말하는 깨달음이고 견성하여 부처가 됨이다. 6조 대사의 법문으로 볼 때 선에서 깨달음은 자기 마음을 아는 것[識心]이다. 자기 마음을 알아 성품을 보는 것이 깨달음이다.
마음이란 무엇인가?
마음을 알아 성품을 봄〔識心見性〕이란 무엇인가? 불교에서 마음만큼 애매모호한 말도 드물다. 우리는 흔히 “무슨 일이든지 마음먹기 나름이다”고 말하거나 〈화엄경〉의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마음이 일체를 이룬다”를 자주 인용한다. 어떤 스님은 “팔만대장경을 한 단어로 표현한다면 ‘마음 심(心)’자로 요약된다”고도 한다. 과연 마음이란 무엇인가?
현대 과학에서는 마음을 인간의 뇌에서 일어나는 의식, 정신 현상으로 이해한다. 불자 뇌과학자로 유명한 국가 연구소의 한 연구자는 마음을 뇌의 의식 현상으로 보고 뇌 구조의 조작을 통해서 의식이 변화하는 연구를 하고 있다. 이처럼 과학자들이 주장하는 마음은 인간의 뇌에서 일어나는 의식 현상으로 국한하여 본다. 하지만, 불교에서 말하는 마음[心]은 물질과 정신이 융합된 연기 현상을 말한다. 즉 불교의 마음은 단순히 뇌 의식 현상이 아니라 5온과 4대, 그리고 6근, 6경, 6식 등을 두루 포함하는 우주 만물의 연기 현상이다. 이렇게 보면 마음은 곧 연기이니 실체가 없이 만물이 상호 의존하여 존재할 뿐이다. 그래서 불교의 마음은 연기이면서 무아이다. 우주 만물은 서로 서로 의존하여 존재하는 것을 부처님은 연기(緣起)라 하였고, 연기는 곧 나라고 할 실체가 없는 무상(無相), 무아(無我)다. 초기 경전에서 연기, 무상, 무아를 대승에서는 공이라 하고 선에서는 무심(無心), 무념(無念) 등으로 표현할 뿐 다른 것이 없다.
불교에서 마음을 연기 = 무상 = 무아 = 공 = 무심 = 무념, 하나로 보는 것이니 마음이나 연기, 무아는 실체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중도(中道)인 것이다. 우리는 〈초전법륜경〉에서 부처님이 중도를 깨달았다는 것을 확인했는데, 곧 부처님의 깨달음 중도는 연기고, 무아이며, 마음이라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니 선의 종전 〈육조단경〉에서 “마음을 알아 성품을 봄[識心見性]”이란 우리 마음이 연기임을 알아 무아를 보는 것이다.
결국 선종의 깨달음, 견성(見性)이란 연기, 무아를 보아 깨치는 것이다. 선에서 말하는 견성이라고 달리 무슨 특별한 깨달음, 성품을 보는 것이 아니다. 부처님처럼 중도, 연기, 무아를 보고 깨치는 것이다. 모든 불교가 중도, 연기, 무아, 공에서 벗어나지 않고 이것을 배제하고 달리 깨달음이나 견성을 말한다면 그것은 불교라 할 수 없을 것이다.
견성에 대한 오해와 혼란
그런데, 참선 수행자뿐만 아니라 한국불교에 이 ‘견성’이란 말을 오인하여 깨달음에 대한 혼란이 적지 않다. 견성성불(見性成佛), 성품을 보는 것이 부처라 하니 그 ‘성품을 봄’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조금 공부해서 지견이 나면 “나는 깨달았다”고 하는 이들이 수 없이 많다. 요즘 유행하는 유튜브나 인터넷에 보면 ‘견성 콘서트’니 ‘정법시대’니 하면서 너도나도 견성했다고 깨달았다고 알았다고 하는 도인 천지다. 정법시대가 아니라 도인시대다. 이들의 특색은 불교의 좋은 말인 ‘견성’, ‘정법’, ‘무심’ 용어를 가져다 문패를 걸어놓고는 속으로는 자기가 조금 이해하고 체험한 소견으로 대중에게 견성, 정법, 깨달음이라 주장한다. 더구나 이분들은 자기와 견해가 맞지 않으면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선지식들을 공부를 잘못했다거나 무식하다며 매도하기 일수다. 많은 불자들조차 이들의 유창하고 현란한 말에 현혹되어 견성과 정법이라 믿고 따르니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이다.
하기야 달마대사도 비방과 독살 위협에 시달렸고, 부처님 당시에도 부처님을 시해하고 교단을 장악하고자 사악한 행동을 한 제바닷다 무리가 상당하여 〈왕오천축국전〉을 지은 신라 혜초 스님이 인도에 갔을 때인 8세기에도 제바닷다를 추종하는 무리들이 있었다고 하니 선지식이 드문 이 시대에는 더 말할 것이 없겠다.
하지만, 진정한 불교의 지혜를 통하여 생사의 괴로움에서 해탈하여 영원한 행복을 깨치고자 한다면 반드시 부처님과 조사 선지식들께서 한결같이 말씀하신 중도, 연기, 무아를 깨달음의 기준으로 보아야 한다. 모든 불교는 중도 정견과 연기, 무아에서 벗어나면 외도 마구니가 된다는 것을 불제자들은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 정견이고 어떤 것이 외도 마구니 길이란 말인가? “나는 깨쳤다” “나는 견성했다” “나는 도를 이루었으니 내말을 따라야 한다” 이런 말을 하는 이들을 조심해야 한다. 불교의 깨달음은 중도, 연기, 무아이니 자기를 내려놓고 비우는 것이 깨달음이다. 그럼에도 자기와 자기 수행을 앞세우고 자기가 얼마나 대단하게 수행했고, 공부했는지를 자랑하고 과시한다면 그것은 자기 기준의 깨달음일지는 몰라도 부처님, 불교의 깨달음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또한 “나는 견성했으니 계율도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하거나 “견성한 도인이 무슨 계율이냐?”며 막행막식하거나 색과 권력, 그리고 명예에 집착하며 세속적인 가치를 추구한다면 그것은 불법과 도를 가장한 마구니 외도라 하겠다.
선의 견성은 무아를 깨치고 행함
부처님의 깨달음이나 선의 견성은 공히 중도, 연기, 무아를 깨치고 행하는 것이다. 깨달음, 견성이 특별한 것이 아니라 ‘내가 없음, 무아’를 깨치고 행하는 것이다. 〈금강경〉에서는 이것을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4가지 상이 없는 무상(無相)을 부처, 여래”라 한다. 〈반야심경〉에서는 “오온이 공함을 비추어 보면 온갖 괴로움과 재앙을 건넌다”고 한다.
모든 불교 경전과 사상은 모두 무아, 무상, 공을 깨치는 것이다. 어디에도 ‘나’라는 상을 세우라는 가르침은 없다. “내가 있다”고 하거나 “내가 이만큼 깨쳤다”, “내가 이만큼 안다”고 하면 아직 무아, 무상을 깨치지 못한 것이다. 견성이 아니다.
다른 한편, 무아, 무상을 깨치는 것이 견성성불이라 하니 “아무 것도 없다”고 하거나 “깨칠 것도 없다”고 하면서 수행 자체를 부정하고 폄하하는 이들도 있다. 이런 견해는 허무주의이거나 무아, 공을 말하니 무아, 공에 집착하는 양변에 떨어진 경우다. ‘내가 있다’는 유아가 양변이라면 ‘내가 없다’는 무아에 집착하는 것도 양변이다. 유아와 무아의 양변을 떠난 것을 중도라 하는 것이다. 불교의 무아와 공은 중도를 말하는 것이지 허무주의의 무아와 공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부처님과 조사를 모델로 정진해야
우리 불자들의 모델은 부처님과 조사 선지식이다. 우리는 정견과 신심을 굳건히 하여 흔들림 없이 나아가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늘 혼란스럽고 혼돈의 연속이다. 이럴 때일수록 부처님의 경전과 조사어록을 수행 지침으로 삼아 정견을 세우고 정진해야 한다.
얼마 전에 입적한 한국불교의 대표 선승 고우 스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부처님처럼 깨치려면 참선이 가장 빠르지만, 꼭 참선이 아니라도 좋다. 염불, 주력, 간경, 위빠나사, 지계, 절, 보시, 봉사도 훌륭한 불교 수행이다. 중도연기, 무아, 공을 기준으로 한 불교 수행에는 우열이 없다. 다만, 한 가지 전제가 있는데, 참선도 마찬가지다. 모든 불교 수행은 자기를 비우는 수행이다. 무아를 깨치고 행하는 것이다. 자기를 비우지 않으면 불교 수행이라 할 수 없다.”
삶의 고난에도 늙음과 병의 괴로움에도 죽음의 공포에도 평상심으로 여여하게 맞이하는 그런 마음을 체득하는 것이 좌선이고 참선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