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선종의 종전, 〈육조단경〉
선종의 宗典 〈육조단경〉
‘정혜품’서 지혜방편 일러
양변의 분별망상 버려야
지난 도쿄올림픽에서 화제를 모은 배구 국가대표 리더 김연경 선수는 ‘기독교는 성경, 불교는 불경, 배구는 김연경’이라는 슬로건으로 자존감을 드러내었다.
불교는 부처님의 가르침이고, 부처님의 가르침은 불경(佛經)에 담겨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 생로병사의 괴로움에서 벗어나 행복하게 살려는 불제자라면 누구나 불경을 공부하고 생활에서 실천해야 한다.
그런데, 불교에서 부처님 말씀이 아닌 그 제자의 말을 모아 경(經)이라 붙인 경전이 딱 하나 있으니 이것이 바로 선종의 종전(宗典) 〈육조단경(六祖壇經, 이하 단경)〉이다.
〈육조단경〉은 선종의 6조 조계 혜능 대사가 법문한 것을 소주 자사(刺史, 지금의 도지사) 위거가 제자인 법해(法海)에게 기록을 부탁하여 필사하고 책으로 편집되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단경〉은 거의 1300년의 오래된 책이니 필사와 전승 과정에서 첨삭이 많아져 후대에 여러 본이 전해져 혼란이 없지 않았다. 20세기 초에 돈황 막고굴에서 ‘돈황(敦煌)본’이 필사본 형태로 발견되니 가장 오래된 원형로 평가된다. 성철 스님은 돈황본을 구해서 손수 번역 출판하여 선 수행자들에게 지침을 삼도록 하였다.
〈단경〉은 참선 수행자들에게 지침서일뿐 아니라 중국 공산혁명의 지도자 모택동도 가까이 두고 탐독하였다고 한다. 공산당은 본래 종교를 인민의 아편이라며 억압하는데, 혜능대사는 가난한 나뭇꾼이었으니 노동계급 출신의 성인이라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본다. 또 〈단경〉은 〈논어〉, 〈맹자〉, 〈도덕경〉, 〈삼국지〉와 함께 중국 5대 명저로 꼽힌다. 동아시아 불교문화권에서는 〈육조단경〉을 보지 않고 불교를 말한다면 달은 영영 보지 목하고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 본 사람이라 한다.
선종의 종전인 〈육조단경〉을 ‘돈황본’으로 공부하며 선의 지혜를 밝혀보자.
6조 혜능, 소주에서 설법하다.
6조가 조계산에 주석할 때 소주(지금의 소관시) 지사가 관료와 시민을 위해 설법해주실 것을 청한다. 이에 소주 대범사(지금의 대감사)에서 1만여 명이 참석한 큰 법회가 열렸다. 이것이 〈단경〉이 설해지는 연유이다. 이 법문은 6조의 제자 법해가 기록하여 전해지게 되었는데, 〈돈황본 육조단경〉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소주) 자사가 문인 법해(法海)로 하여금 기록하게 하였는데, 이것을 모아 널리 유행케 하여 후대에 도를 배우는 사람들이 이 종지를 계승하여 서로 전해주게 함이라.”
〈단경〉을 설하고 기록하여 후대에 전하는 것은 종지(宗旨)를 계승하여 전해주려는 것이다. 여기에 기록자와 기록하여 전하려는 이유가 명백하게 나와 있다.
그럼에도 대만 학자 호적과 일부 일본 학자, 그리고 이들에 영향 받은 일부 국내 학자와 학승들은 아직도 ‘육조단경의 신회 조작설’과 ‘육조단경의 허구설’을 공공연히 주장하니 참으로 통탄할 일이다. 이분들이 〈단경〉을 이렇게 폄하하는 것은 선의 종지(宗旨)를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니 선에 입문하는 이들은 반드시 선의 종지에 안목을 갖춘 바른 선지식과 정견을 세우고 공부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엉뚱한 길로 가서 돈오선을 등지고 생사 윤회에서 영원히 벗어나지 못할 수가 있다.
〈단경〉에서 6조는 이 법문을 듣는 이들을 ‘선지식(善知識)’이라 한다. 대승불교에서는 일반적으로 깨달음을 향해 바른 길을 알려주는 이를 선지식이라 하는데 6조 대사는 법문을 들으려 모인 사부대중을 선지식이라 하였다. 이것도 선종의 특색이다. 이것은 법문을 하는 6조 대사나 법문을 듣는 사부대중이나 차별이 없는 본래 부처임을 드러낸 말이다. 〈단경〉은 이처럼 본래성불(本來成佛)의 종지를 철저히 드러내고 있다.
〈단경〉의 핵심, 정혜(定慧)
6조는 〈단경〉 ‘정혜품’에서 이렇게 말한다.
“선지식아! 나의 이 법문은 정(定)과 혜(慧)로써 근본을 삼는다.”
이 정혜가 〈단경〉의 핵심이고, 근본이다. 6조가 말한 정혜(定慧)를 바르게 이해해서 안목을 갖춰야 비로소 선(禪)에 대한 정견(正見)이 서는 것이다. 6조의 정혜란 바로 부처님이 깨달은 중도(中道)를 말한다. 불교는 중도를 떠나서 성립될 수 없다. 부처님이 깨달아 생사의 괴로움에서 영원히 벗어난 것이 중도인데, 6조는 이 중도를 정혜라고 표현한 것이다. 그러니 중도와 정혜는 이름은 다르지만 본질은 같다.
정혜란 무엇인가?
정혜란 우리 마음을 말한다. 우리 마음이 양변을 여의면 정(定)이 되고, 그 자리에서 지혜가 나오는 것을 혜(慧)라 한다. 남방불교에서 말하는 ‘사마타-위빠사나’가 바로 정혜다. 정 = 사마타는 우리 마음에 번뇌망상이 없는 경지, 고요함을 말하고, 그 고요한 자리에서 지혜가 나오는 것이 혜 = 위빠사나다.
정혜를 지관(止觀)이라고도 한다. 혜민 스님의 유명한 베스트셀러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책 제목이 바로 지관이다. 지관이 바로 정혜다. 우리 마음이 분별망상을 멈추면 지혜가 나오는 것이다. 말은 다르지만, 이치는 같다. 예를 들어 같은 물도 우리는 물이라 하지만, 영어로는 워터(water)라 하듯이 부처님이 깨친 중도를 6조는 정혜라 하였다.
정혜는 부처님의 깨친 마음이다. 중생의 마음은 나-너, 있다-없다, 안다-모른다 하는 양변에 집착하여 분별망상이 끝없이 일어났다 사라지고를 반복한다. 깨친 부처의 마음은 분별망상이 사라져 고요하면서도 지혜가 항상 비친다. 정혜, 지관, 사마타위빠사나가 항상하는 것이다. 이것을 깨달음, 중도, 깨어있기로 표현한다.
정혜쌍수는 교(敎), 정혜등지가 선(禪)
그런데, 부처님의 깨달음, 정혜를 정과 혜로 나누어 보아 정과 혜가 다르니 정과 혜를 각각 닦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이렇게 정과 혜를 다르다고 보아 따로 따로 닦는다는 말은 6조 당시에도 있었던 모양이다. 그 대표적인 말이 ‘정혜쌍수(定慧雙修)’이다. 정과 혜를 둘로 보고 닦는 것을 말하는데, 정은 선정의 힘을 키우고, 혜는 지혜의 힘을 키운다고 말한다. 그러니 정만 닦아도 안 되고 혜만 닦아도 안 되며, 정과 혜를 같이 닦아야 한다고 정혜쌍수를 주장한다.
그러나, 6조는 〈단경〉에서 ‘정과 혜가 다르다고 하지 말라’고 한다.
“반드시 미혹하여 정과 혜가 다르다고 하지 말라. 정과 혜는 몸이 하나여서 둘이 아니다. 곧 정은 이 혜의 몸이요, 혜는 곧 정의 작용이니, 곧 혜가 작용할 때는 정이 혜에 있고, 또 정이 되어 있을 때에는 혜가 정에 있느니라.”
정과 혜는 하나이지 둘이 아니라 한다. 정은 혜의 몸이고, 혜는 정의 작용이라 한다. 6조는 정과 혜가 하나이니 둘로 보게 되면 법을 둘로 보는 양변에 떨어져 삿된 소견에 집착하게 된다고 한다. 즉, 부처님 법은 하나인데, 둘로 보게 되면 입으로는 선(善)을 말하면서도 마음이 선하지 못함과 같다는 것이다. 법(法)을 둘로 보면 두 법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니 양변의 분별망상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6조는 〈단경〉에서 이를 엄중히 경계한다. 깨달음을 수행하는 것은 입으로 다투는 데 있지 않으니 만약 다툰다면 미혹한 사람으로 승부를 끊지 못하고 상(相)에 집착한 것이다.
까닭에 우리 선문에서 흔히 듣는 ‘정혜쌍수’라는 말은 정과 혜를 둘로 보는 견해이니 〈단경〉의 종지에 맞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혹 교학에서는 ‘정혜쌍수’를 주장할 수 있다. 교학은 달과 손가락, 법과 방편을 나눠 손가락, 방편을 적극 활용하는 입장이니 방편으로 본다면 ‘정혜쌍수’라는 말을 쓸 수도 있다. 하지만, 선에서는 ‘정혜쌍수’라는 말은 본래성불의 종지에 어긋나니 온당치 않다.
남방불교의 위빠사나 명상에서도 위빠사나를 닦아 사마타로 완성한다 하거나 사마타를 닦아 선정의 힘을 키워 위빠사나를 닦아 지혜의 힘을 완성한다는 식으로 말한다. 〈단경〉의 입장에서 볼 때 이런 견해도 방편이지 법은 아니다. 정의 사마타와 혜의 위빠사나를 다르다 하거나 선후로 나눠보는 것은 벌써 양변에 떨어지는 것이니 방편, 손가락의 입장이지 법은 아니다.
결국 정과 혜를 나눠 둘로 보거나 위빠사나와 사마타를 둘로 보고 수행하는 입장은 양변에서 닦아가는 것이니 법이 아닌 방편이다. 부처님 법은 중도, 팔정도, 연기, 무아, 정혜다.
고우 스님, ‘정혜품’ 깨닫고 마음이 밝아지다
지난 8월 29일 원적에 든 조계종의 대표적인 선승 고우 스님은 〈단경〉 ‘정혜품’의 “도(道)는 모름지기 통하여 흘러야 한다”는 대목을 보고 깨달음을 얻었다. 이 대목을 깨치니 ‘백척간두 진일보’의 뜻도 환해져 마음이 밝아졌다. 도는 돌이나 나무처럼 단단하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람처럼 물처럼 흘러 자유자재한 것이다. 하나에 고정되어 머물러 있으면 속박되어 자유가 없다.
6조가 〈단경〉에서 근본으로 삼은 ‘정혜(定慧)’는 후대 임제종에서는 ‘살활(殺活)’로 표현한다. 마음의 번뇌망상은 죽이고 지혜는 살린다는 뜻이다. 조사선이 대중화되면서 나온 간화선에서는 정혜를 ‘성성적적(惺惺寂寂)’이라 한다. 마음에서 화두를 성성하게 또렷또렷하게 챙겨나가면 번뇌망상이 사라져 저절로 고요한 적적이 된다. 마음이 별처럼 또렷또렷하면서도 고요한 성성적적 삼매가 된다. 이것이 부처님이 깨친 중도 삼매다. 우리도 부지런히 정혜를 밝혀 나가면 부처님처럼 지혜와 평안이 함께할 수 있다.
도는 모름지기 통하여 흘러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