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4조 도신대사, 선을 정착시키다
중국문화 맞는 청규 제정
선농일치 문화 정착 시켜
동아시아 중심 사상 발전
인도의 부처님 이후 28대 달마 조사가 동쪽으로 와서 초조(初祖)가 되어 본래성불의 선법을 혜가대사에게 전하고, 2조는 다시 불치병의 거사가 깨치자 출가시켜 3조로 삼아 선의 씨앗이 동토에 뿌려지고 있었다.
하지만, 초조 달마의 독살(毒殺), 2조 혜가의 장살(杖殺)에서 보듯이 선은 아직 바람 앞에 등불처럼 위태로웠다. 당시 중국은 남북조시대에서 혼란기를 거치며 수나라(581~618)의 통일, 그리고 당나라로 바뀌며 점차 안정되어 갔다. 불교계는 경전을 읽고 외우고 설법하는 교학과 부처님의 계율을 지키고 행하는 율종, 그리고 부처님 이름을 지극 정성으로 부르는 염불이 중심이었다. 양무제처럼 큰 불사 공덕을 짓거나 중생이 경전을 읽고 계율을 지키며 염불하여 그 수행 공덕으로 다음 세상에 극락왕생하는 것이 바람이었다. 이런 불교계의 풍토에서 본래성불의 선은 ‘마구니 말’로 배척받아 뿌리 내리기가 쉽지 않았다. 이 어려운 토양에 걸출한 조사가 출현하여 선을 정착시키니 그가 바로 4조 도신이다.
14세 사미가 깨쳐 4조가 되다
어느 날, 승찬 대사에게 도신(道信)이라는 14세 사미가 와서 절하고 물었다.
“스님, 제게 해탈법문을 들려주십시오.”
“누가 너를 구속했느냐?”
“아무도 구속한 이가 없습니다.”
“아무도 구속한 이가 없으면 그대는 이미 해탈한 사람이다. 어찌 다시 해탈을 구하는가?”
도신은 이 말 끝에 크게 깨달았다. 본래 우리는 지혜와 복덕이 구족된 완전한 존재이다. 다만, 스스로 중생이니 부처니 하며 분별심을 일으켜 허망한 생각에 집착하니 중생이라 속박되는 것이다. 선지식의 법문을 듣고 본래 완전함을 바로 깨치는 것이다. 이것은 3조 승찬이 전생의 죄 때문에 불치병을 얻었다고 평생 괴로워하다가 “나도 죄도 전생도 본래 없다”는 선지식의 법문을 듣고 마음을 바로 깨친 것과 같은 도리다. 결국 4조 도신 대사도 부처님 말씀대로 무아를 깨쳐 속박된 마음에서 단박에 해탈한다. 어린 사미가 깨치자 3조는 9년 동안 곁에 있게 한 뒤 성년이 되자 비구계를 주고 달마대사의 가사를 전하여 4조로 부촉한다.
4조 도신 대사, 참선 도량을 열다
4조 도신(道信, 580~651) 대사의 성은 사마(司馬)씨로 호북성 출신이다. 승찬 대사가 입적한 뒤 여러 곳을 유력하다 기주 황매현 쌍봉산(雙峰山) 서쪽에 정착하여 30여 년 동안 도량을 개척한다. 선종의 초조 달마와 3조 승찬 대사까지는 일정한 도량 없이 떠돌며 전법했는데, 4조 도신 대사에 이르러 선은 비로소 한 도량에 정착하게 된다. 당시 불교계는 양무제처럼 기복과 교학, 율학 전통으로 인하여 선(禪)을 몰랐다. 때문에 선사들은 고정된 도량도 없이 교학이나 율종 사찰의 한 귀퉁이에서 더부살이를 했다. 그러나 4조는 이런 현실을 타개하려고 쌍봉산에 넓은 도량을 마련하고 많은 수행자가 함께 농사짓고 수행하는 최초의 선종 도량을 조성하여 전법 교화의 기반을 다지게 되었다.
4조가 선 수행 도량을 크게 조성하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 선종 역사서에는 몇 가지 일화가 전한다. 하나는 4조가 길주(吉州)성에 머무를 때 큰 도적떼가 성을 포위하고 수십 일을 공격하였다. 오랜 포위로 성 안에는 식량이 떨어지고 식수마저 고갈되어 백성들이 죽음의 공포에 떨었다. 이에 4조가 백성들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성에 올라 지극한 마음으로 ‘마하반야바라밀’을 합송케 하였다. 이때 도적떼들은 갑자기 성에 수많은 신병(神兵)들이 나타나는 것을 보고는 겁이나 도망쳐버렸다. 사람들은 도신 대사가 신통을 부려 도적떼를 쫓아버려 겨우 살아났다고 하며 4조를 더 따르게 되었다.
선농일여(禪農一如), 선의 자주, 자립 정신
4조가 쌍봉산에 주석하여 도량을 개척하자 명성을 듣고 500명의 수행자들이 몰려들었다. 깊은 산중에 많은 수행자들이 모여 살았으니 부처님처럼 탁발도 어렵고 양식도 부족했다. 4조는 수행자들에게 선과 농사가 하나라는 선농(禪農)일여를 기치로 농사를 지어 스스로 먹을 양식을 마련케 하였다. 사실 이것은 부처님께서 출가자는 직업과 노동을 금하는 계율에 어긋나는 행이다. 하지만, 북방처럼 사계절이 뚜렷하고 산중 깊은 도량에서는 걸식이 불가능하였다. 이런 현실적인 조건에서 4조는 수행자들이 예불, 독경과 좌선에만 머물지 말고 농사짓고 도량 가꾸고 청소하는 그대로가 수행이라고 가르쳤다. 이것이 일행삼매(一行三昧)이다. 결국 남방에서 출발한 불교가 북방으로 와서 사회 환경에 맞게 창의적으로 발전한 것이 선종의 자작자수 정신과 청규라 할 수 있다.
선은 4조 도신 대사 대에 부처님 당시의 초기불교의 모습에서 벗어나 중국 현실에 맞는 창의적으로 변화 발전하였다. 걸식과 유랑하며 전법하던 초기 불교의 모습에서 상주 도량에서 예불, 좌선하며 농사를 지어 자급자족의 수행공동체 생활로 변화한 것이다. 또 정해진 부처님 계율에서 상주 공동체 현실에 필요한 청규의 제정과 활용으로 나아갔다. 이러한 자주적이고 자립적인 선의 정신은 불교가 북방 동아시아 사회 문화에서 중심 사상으로 등장하는 기반이 되었다.
또한 4조 도신 대사에게는 특별한 능력이 있었는데 병을 다스리는 의술도 뛰어났다. 〈초목집성〉이라는 의서를 지을 정도로 4조는 의술이 뛰어났는데, 그 소식이 황궁에까지 전해져 당 태종 이세민(재위 626~649)이 큰 병이 들어 어의도 어쩌지 못하자 4조의 처방대로 약을 지어 먹고 쾌차했다고 한다. 태종 황제는 사자를 보내어 4조를 황궁으로 초청하여 융숭한 대접을 하고자 했으나 도신 대사는 병을 이유로 사양하였다. 황제의 명을 3차례나 거절하자 태종은 마지막으로 거절하거든 목을 가져오라 명한다. 사자가 황제의 명을 전하자 4조는 말없이 목을 앞으로 내밀었다고 한다. 목숨이 끊어지더라도 황궁으로 가지 않겠다는 뜻이다. 황제의 사자는 차마 어찌 하지 못하고 태종에게 그 상황을 전하자 황제는 귀한 선물을 보내어 도신 대사의 뜻을 존중했다고 한다. 그 뒤 대종 황제가 대의(大醫) 선사라 시호를 내려 4조 대의도신 대사라 부른다.
4조의 황제에 대한 약처방은 널리 중생을 제도하는 자비심의 발로였지만, 황제의 초청을 거절함은 세속 권력과 일정한 거리를 둠으로 불교의 세속화를 막고 자주적이고 자립적인 불교 정신을 견지하기 위함이었다. 이런 4조의 자주 정신은 후대 선사에게 일관되게 확인될 뿐 아니라 후대에 혹독한 불교 법난 속에서도 선이 살아남는 동력이 된다.
4조와 신라 법랑 스님의 법연
4조가 교화한 쌍봉산 사조사에는 오백 명 대중 가운데 5조가 된 홍인도 있었지만, 머나먼 신라에서 구법 온 법랑(法郞, 632~?) 스님도 있었다. 법랑은 4조로부터 깨달음을 인가 받아 신라로 돌아와 교화한 분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법랑 스님의 행적이 거의 전해지지 않는다. 그나마 고운 최치원이 봉암사 지증대사비문을 지어면서 희양산문의 개산조 지증(智證, 824~882)대사가 4조 도신으로부터 법을 이어 받은 법랑 - 신행 - 준범 - 혜은 대사의 법맥을 이어받았다고 기록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법랑 스님의 법맥을 이었다는 신행(神行, 704∼779)대사는 이상하게도 법랑 대사가 입적한 뒤 다시 당나라로 유학하여 5조 홍인 대사의 제자였으나 깨달음을 인가를 받지 못한 신수 법맥의 지공(志空)에게 수학하고 법을 이어온다. 선종에서는 일반적으로 신수의 법맥을 깨달은 정통 법맥으로 보지 않는 것이 정설이고 실제 신수 법맥은 3대에 가면 흐지부지 되어 소멸되어 버리니, 이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지금 중국 쌍봉산 사조사에 가면 4조가 제자들에게 법을 전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전법동이 세워져 있는데, 거기에는 5조 홍인과 나란히 ‘신라인 법랑’ 입상이 모셔져 있어 한국에서 간 순례객들에게 감동을 안겨준다.
4조와 5조의 드라마 같은 법연
4조가 주석하던 쌍봉산 도량 아래 마을에 소나무를 가꾸며 살아가던 한 노인이 있었다. 그는 신심이 지극하여 일흔 살에 출가의 뜻을 세우고 4조를 찾아뵈었다. 4조는 나이가 너무 많으니 ‘몸을 바꿔 오너라’고 한다. 노인은 산을 내려와 마을을 지나다 빨래하는 처녀를 만났다. 처녀에게 하룻밤 쉬어가게 해 달라 간청하고는 그 자리에서 죽어 처녀의 몸으로 들어갔다. 이렇게 하여 열 달 뒤에 태어난 이가 5조 홍인 대사이다. 처녀가 아이를 낳았으니 집안의 미움과 고초는 짐작하고도 남을 것이다. 아이는 일곱 살이 되도록 이름을 짓지 못할 정도로 처녀 혼자서 힘겹게 키웠으나 유달리 총명하여 그 소문이 4조에게까지 들렸다.
어느 날 4조가 길을 가다가 그 아이를 만났다.
“네 성이 무엇이냐?”
“성은 있으나 예사 성이 아닙니다.”
“그 성이 무엇이냐?”
“불성(佛性)인 성입니다.”
“그러면 이름은 무엇이냐?”
“내 본성이 공(空)인데 이름인들 있겠습니까”
“이 아이가 예사롭지 않으니, 크게 불사를 이루리라.”
이렇게 출가한 아이가 바로 4조의 법을 이은 5조 홍인(弘忍, 601~675)대사다. 5조가 된 홍인 대사는 쌍봉산의 동쪽 봉우리(東山)로 불린 빙무산으로 와서 도량을 조성하고 전법교화하는데 회상에는 항상 제자가 1000명이 될 정도로 성황이었다. 4조 대에 도량에 정착한 선사들은 5조 대에 선을 전파할 기반을 갖추게 된다.
이것이 그 유명한 전설이 된 ‘동산법문(東山法門)’이다.
불교 자주화의 첫걸음, 4조 도신대사부터 시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