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달마가 서쪽에서 온 까닭은?
마음깨치는 선 전래
무아법문 속 깨달음
공한 진리를 알리다
부처님이 깨치고 첫 설법을 할 때 꼰단냐를 비롯 다섯 수행자가 모두 깨달아 인가받은 기록은 〈초전법륜경〉과 〈무아상경〉에 나온다. 이후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깨친 이들이 수없이 나왔는데, 부처님은 그중에서도 마하가섭을 당신의 수제자로 삼았다. 마하가섭은 부처님 열반 이후 그 말씀을 결집할 때 좌장 역할로 그 소임을 다하고 아난존자에게 그 법을 부촉한다. 이 전법의 기록은 초기경전에도 나오고 남방과 북방 불교에서도 공히 인정하는 전등 법맥이다.
부처님이 열반에 드시고 1천 년이 되는 무렵에 27대 제자 반야다라 존자가 있었다. 반야다라 존자는 인도 남쪽 향지국 왕의 초청으로 왕궁에 갔는데, 이때 왕의 셋째 아들 달마를 만난다. 동아시아에서 달마도로 널리 알려진 달마는 본래 인도 남부(지금 인도 타밀나두주 첸나이)에서 부처님처럼 왕자로 태어나 깨치고 조사의 법맥을 이어 동쪽으로 와서 선을 전한 전설적인 인물이다.
선종의 초조, 달마는 누구인가?
달마대사에 대한 정확한 기록이 많지 않아 여기에서는 고려 후기 백운경한 선사가 지은 〈직지심체요절〉(세계기록문화유산) 달마조사 편을 근거로 말하고자 한다.
달마대사는 본래 인도 향지국 국왕의 아들로 반야다라 존자를 만나 교류하던 중 마음을 깨치고 28대 제자가 된다. 반야다라는 달마가 불법을 크게 일으킬 인물이라 보고 동쪽으로 가서 전법하기를 권한다. 달마대사는 국왕의 후원으로 큰 배를 타고 3년 동안 항해하여 중국 남해(지금 광동성)에 도착하니 이때가 양나라 무제가 통치하던 서기 527년이다.
중국에는 서력 기원 전후에 실크로드를 통해서 불교가 전래되었고 이후 신장 출신의 구마라습(344~413) 같은 대역경사들의 노력으로 〈금강경〉 등 대승 경전이 한문으로 번역되어 불교가 정착한다. 대승 경전의 한역과 유통으로 중국 불교는 한 단계 발전하게 되는데, 양무제의 아들 소명태자는 〈금강경〉을 공부하기 편하게 단락을 나누고 제목을 새로 붙였다. 하지만, 당시 중국 불교는 부처님의 말씀인 경전을 공부하는 교학과 계율을 연구하고 지키는 율학뿐이어서 마음을 바로 깨쳐 부처가 되는 선을 알지 못했다.
달마대사와 양무제와 문답과 무아 법문
달마대사가 동쪽으로 온 6세기 중국에는 남북조시대였고, 한국은 삼국시대였다. 중국 남쪽은 양나라 무제(武帝, 464~549)가 통치하였는데, 그는 불심천자로 불리운 황제였다. 양무제는 많은 스님들께 공양을 베풀고 불경 역경과 편찬을 후원하면서 큰 불사를 하여 기록에 의하면 2500여 절을 짓고 탑을 세우는 선업 공덕으로 황제 자신의 무병장수와 국운 융성을 빌었다. 그런데, 이 큰 불사 공덕에도 마음은 불안하였던 모양이다. 양무제는 인도에서 조사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는 달마대사를 황궁으로 초청하여 융성한 공양을 하고는 이렇게 물었다.
“짐이 오늘까지 절을 짓고 불상을 조성했는데, 어떤 공덕이 있습니까?”
“공덕이 없습니다”
“어째서 공덕이 없습니까?”
“이는 인간과 하늘의 작은 과보요 번뇌의 인연이니 그림자가 형체를 따르는 것과 같아서 비록 선한 인이 있다고는 하나 실상(實相)이 아닙니다.”
“도대체 무엇이 거룩한 진리입니까?”
“성스러운 진리는 결코 없습니다.”
“그럼 짐과 마주한 당신은 누구요?”
“모르겠습니다(不識)”
양무제와 달마대사의 문답은 이러했다. 무제는 ‘내가 있다’는 입장에서 불사 공덕과 그 과보를 말한다. 양무제가 공부하고 믿은 불교는 이처럼 내가 있고, 부처님과 부처님 법도 있다고 보는 불교를 믿었다. 그리하여 수많은 불사 공덕을 지으면 그 복을 받아 무병장수하고 죽어서는 극락에서 태어날 것이라 믿는 불교다.
그런데, 달마대사는 이런 견해를 완전히 부정해 버렸다. ‘내가 있다’는 입장에서 아무리 많고 좋은 불사 공덕을 쌓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양변에 머물고 집착하는 상대 분별의 세계이니 생사 해탈의 불교가 아닌 것이다. 결국 양무제가 믿었던 불교는 중생이 생사윤회를 해탈하는 깨달음의 불교가 아니라 중생이 선행하고 불사 공덕을 지어 복 받아 다음 생에 잘 태어나는 방편의 가르침을 믿었던 것이다. 〈금강경〉에서 부처님은 “머무는 바 없는(無住相) 보시”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공덕이 있다고 하였다. 반면에 내가 있고 받을 공덕도 있다는 머무름이 있는 보시는 선한 복이 있을지라도 생사윤회를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불심천자 양무제의 비참한 과보
양무제는 달마대사의 법문을 알아듣지 못했다. 결국 그는 부처님의 무아 법문을 들었으나 자기가 있다는 견해에 집착하여 삿된 소견을 끝까지 버리지 못했다. 그리하여 양무제는 자기 자신을 위한 이기적인 마음으로 엄청난 불사 공덕을 지었으나 부하 장수의 반란으로 황제의 지위에서 쫓겨나 민가에 유배되었다가 굶어죽는다. 양무제가 그토록 바라던 장수와 국운융성은 오지 않고 비참한 과보를 받았으니 우리는 이 불사 시주 공덕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양무제의 불행한 과보는 부처님이 깨치고 말씀하신 연기 즉 인과의 법칙이 그대로 증명된 사례였다. 왜냐하면 양무제는 불교를 믿었으나 정견을 갖추지 못하고 삿된 견해에 집착하여 엄청난 불사를 일으켰는데, 황제의 자비(自費)가 아니라 백성들의 혈세를 짜내어 불사에 시주한 것이니 백성들의 원성이 하늘을 찔렀고 민심이 흉흉하여 반란을 자초한 것이다. 결국 양무제는 어질고 현명한 인재를 등용하여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을 잘 살게 하는 황제의 본분을 버리고 불교에 집착하여 이기적인 마음으로 황제의 권력을 앞세워 백성들의 혈세로 불사 공덕을 지어 받고자 하였으니 황제의 지위에 쫓겨나 굶어죽는 지옥행의 과보를 스스로 지은 것이다.
달마대사는 이것을 깨우쳐 주려고 “공덕이 없다”는 법문을 해주어도 삿된 소견에 집착하여 어리석은 행을 하다가 급기야 준엄한 과보를 받은 것이다.
달마대사, 2조 혜가에게 선법을 전하다
달마대사는 불교의 정견과 무아법을 설해도 불심천자라는 황제조차 자기에 집착하여 알아듣지 못하자 아직은 때가 아니라 판단하고 양자강을 건너 북쪽 숭산 소림사로 가서 9년 동안 은둔한다.
어떤 분들은 달마대사의 9년 면벽을 ‘9년 동안 참선 수도해서 깨달았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선을 모르고 하는 말이다. 달마대사는 이미 인도에서 27조 반야다라 존자에게 깨달음을 인가 받고 동쪽으로 왔다.
그럼 9년 동안 면벽했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법을 설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달마대사가 소림사에서 설법하지 않고 9년 동안 무엇을 했을까? 무아의 선 법문을 알아들을 발심 구도자를 기다린 것이다.
이때 신광이라는 스님이 있었다. 부유한 가문에 태어나 유교와 노장의 경전을 두루 공부하였으나 만족하지 못했는데, 불경을 보니 마음이 편해져 출가하였다. 그런데, 출가하여 경전을 볼 때는 마음이 편했으나 일상생활을 할 때에는 여전히 초조하고 불안한 마음이 있었다. 이에 신광스님은 초조 불안한 마음을 해결하고자 인도에서 온 대선지식 달마대사를 찾아가 만나고자 하였다.
하지만, 달마대사는 만나주지 않았다. 이에 신광은 마지막으로 굳은 결심을 하고는 어느 겨울 눈 내리는 날 소림사 조사전 앞에서 만남을 청했다. 밤새 내린 눈이 무릎까지 차올라도 달마대사는 아무런 기척이 없자 신광스님은 법을 구하기 위해 자기 몸을 버리는 위법망구(爲法忘軀)의 굳센 의지를 보여주고자 칼로 자신의 팔을 잘랐다. 이를 본 달마대사는 비로소 도를 구하는 발심 수행자가 왔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조사당으로 불러 문답한다.
“어찌 왔느냐?”
“화상께서 초조하고 불안한 마음을 편안케 해 주십시오.”
“그 마음을 가져오너라. 편안케 해 주리라.”
“마음을 찾아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벌써 네 마음을 편안케 하였다.”
혜가는 이 말 끝에 확철대오하고 이렇게 말한다.
“오늘에야 모든 법이 본래부터 공하고 깨달음이 멀리 있지 않음을 알았습니다.”
달마대사와 문답과 신광스님의 깨달음도 결국 무아 공을 깨친 것이다. 내가 본래 무아이듯이 초조하고 불안한 마음도 있는 것이 아니다. 있다고 착각하고 집착하고 있을 뿐이다. 이 착각에서 깨어나는 것이 무아의 깨달음이다. 무아의 깨달음은 생사윤회에서 영원히 해탈하여 대자유를 누리는 것이다.
달마대사는 신광의 깨달음을 인가하면서 스승에게 받은 가사를 전하고 혜가(慧可)라 새 법명을 주었으니 바로 선종의 2조 혜가대사이다.
달마대사는 혜가에게 부처님의 지혜를 전등(傳燈)하고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이 땅에 온 뒤 여러 번 독약을 받았는데 가려내었다. 이제 법을 전했으니 갈 때가 되었다.”
말끝에 단정히 앉아서 가셨다. 선종의 초조 달마대사는 독살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당시 승단의 율사와 강사들의 소행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은 형상을 떠나 마음을 바로 깨치는 달마의 선 법문을 마구니 말이라 시비하며 악행을 저질렀다(이것은 해동 초조 도의스님이 조사가 되어 신라로 돌아왔을 때 마구니 말을 한다고 배척받은 상황과 똑같다).
달마대사는 머나먼 동쪽으로 와서 부처님 무아 법을 전하며 무아 도리를 증명하듯이 몸소 독약을 마시고 그렇게 갔다. 법을 이은 이조 혜가대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보시공덕조차 머무를 곳 없는 바를 깨치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