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독립 후 첫 총리 우 누(U Nu)
불교적 가치로 국가 통치
스스로 신심 깊은 수행자
불교 민주주의 확대 노력
네윈의 쿠데타로 축출 돼
‘전륜성왕’ 같은 리더 필요
한국과 비슷한 현대사의 역사를 가진 나라가 있다면 천불천탑의 신비를 가진 미얀마를 꼽을 수 있다. 식민지시기, 쿠데타, 민주화운동과 같이 비슷한 아픔을 우리나라처럼 겪었다. 미얀마는 1962년에 군부 쿠데타로 인해 군사정권이 시작된 이후 2015년까지 오랜 시간동안 군부가 권력을 장악했다.
2015년 11월 8일에 치뤄진 총선거 이후 미얀마는 우리나라와 같이 민주화의 발전을 시작했다고 미얀마 국민들은 큰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다. 2020년 11월 8일에 총선거에서도 미얀마 민주화의 상징인 NLD가 군부를 상대로 압승을 거두며 민주정부 2기 출범을 꿈꿨다.
역사는 반복된다고 하지만 미얀마에는 너무 잔인하게도 쿠데타의 발생이 약 5년만에 재발생했다. 이번 쿠데타는 더 잔인하고 무식한 변명으로 진행되었다. 2020년 11월 총선거가 부정선거라는 명분으로, 미얀마 군대는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여 아웅산 수지 국가고문 및 우윈민 대통령을 포함하여 장관들과 NLD 국회의원들을 동시다발적으로 구금했다.
쿠데타가 발생한지 2달이 지나간 현재 약 700여 명이 민주화 시위를 하다가 사살되었다고 보도되지만, 전체적으로는 약 1000여 명이 사망하며 ‘피의 미얀마’로 얼룩지고 있다. 미얀마 현대사의 공식적인 두 번째 쿠데타가 발생했는데, 첫 번째 쿠데타가 네윈 장군에 의해 발생되기 이 전까지 독립이후 미얀마를 이끌던 지도자는 누구였을까?
미얀마 독립 이후 첫 초대 총리이기 때문에 미얀마 독립운동의 아버지로 존경받는 ‘아웅산 장군’아니야? 라고 많이들 묻는다. 아웅산 장군은 미얀마의 독립을 이끌었지만 불운하게도 독립이 되기 6개월 전에 총에 맞아 사망했다.
독립이 된 후 미얀마의 초대 총리의 자리에 오른 것은 우 누였다. 이 당시 미얀마의 양곤대학교는 동남아시아에서 최고의 대학교 지위를 누렸고, 미얀마의 수재들은 모두 양곤대학교로 모였다. 인도와 동남, 동북아시아를 이어주는 육로 교통의 요충지였으며 현재 경제적으로 부유한 나라 중 하나인 싱가포르도 초창기 발전 목표가 ‘버마(미얀마의 예전 이름)처럼 잘 사는 것’이었다.
우 누는 전반적으로 불심이 깊은 미얀마에서도 정말 불심이 깊은 불교 집안에서 어린시절을 보냈다. 그는 새벽 4시 30분에 기상해서 경전 독송과 명상을 매일 같이 하며 청정한 생활을 하기 위해 평생에 걸쳐 노력했다. 그는 자신이 ‘버마인’이라는 것에 굉장히 큰 자부심을 가졌다. ‘버마인’이라는 자부심 안에는 불교가 핵심적인 가치로 자리잡고 있었다.
그는 불교의 사상을 통해 현대 사회에서 나타나는 문제들을 해결하고 극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영국의 식민지 시기를 거친 후 발생한 소수 민족과 여러 계층들의 갈등도 불교적인 가치관을 통해 해결되길 바라며, 과거의 역사 속 미얀마 왕들이 자신의 공덕과 백성들의 평화와 안정을 바라면서 파고다를 건립했던 것과 같이 파고다 불사를 많이 했다.
그는 사회주의와 불교가 사상적으로 유사점이 있다고 생각했다. 불교적 가치관에서 사회주의를 포용한 ‘불교사회주의’를 주장했다. 또한 그는 경제적인 불평등을 극복하고자 경제사상에 불교적 가치관을 도입하여 ‘불교경제’사상을 창시했다. 예를 들면, 소비를 지속적으로 하여 만족을 느끼는 것보다, 소비보다 만족을 더 큰 가치로 두는 것이다.
슈마허(E. F. 슈마허,1911~1978) 경제학자는 우 누의 경제 자문역이었는데 미얀마에 와서 소득 수준은 엄청 높지 않지만 행복하게 사는 미얀마 국민들에게서 영감을 받아 쓴 책이 〈작은 것이 아름답다〉이다.
불교사회주의를 주장한 그는 ‘민주주의’ 또한 불교의 가치관과 유사하다고 판단하여 불교사회주의에 민주주의라는 가치를 접목시키려고 노력했다. 결국 그에게 ‘사회주의’ ‘민주주의’는 ‘불교’라는 종교적인 가치관을 현대적으로 수용하기 위한 현대적인 이론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주장한 이론을 통해 결국에는 국민들 모두가 불국토에 사는 것을 꿈꿨다.
유달리 그가 ‘불자(佛者)’여서 불교적인 가치관을 통해 국가를 다스리려고 했던 것이 아니다. 그의 형태는 과거의 바간 시대부터 마지막 미얀마 왕조까지 ‘전륜성왕’이 되기 위한 미얀마 정치 전통의 사상을 그대로 답습하고 현대적으로 승화한 것이다.
미얀마에서 불교는 왕권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당시의 정치 형태를 반영하며 발전과 쇠퇴를 되풀이했다. “왕이 훌륭한 지도자인가?”하는 것은 왕의 불심(佛心)에 따라 판단되는 것과 같이 불교는 지배자의 자질을 묻는 하나의 기준이었다. 불심은 지배에 정통성을 부여하는 가장 중요한 가치이자 기준이었다.
하지만 현대는 과거의 상황과 같지 않아 예전의 미얀마 왕들처럼 그의 통치법이 현대적으로 성공했다고는 할 수 없지만, 미얀마의 전통적인 정치적인 역사흐름을 살펴보면 미얀마 사람으로서는 매우 당연한 선택이다.
또한 그는 자신이 ‘선거’라는 현대적인 장치의 산물로 선출되었지만 사실상 불교에서 백성들의 선거에 의해 처음으로 선출된 마하삼마타(Mahsammata)이자 전지전능한 전륜성왕으로 대중에게 각인되기를 원했다.
전륜성왕으로 칭송받는 아쇼까왕이 제3차 경전결집대회를 개최한 것처럼 그는 부처 탄생 2500주년을 기념하여 세계 불교도 대회를 개최하여 많은 스님들과 불교학자를 미얀마로 불렀다. 그가 세계 불교도 대회를 개최한 궁극적인 이유도 전륜성왕이 되기 위한 과거의 왕들의 행적을 현대적으로 답습한 것이다.
그의 ‘불교사회주의’ ‘불교경제’는 불교를 중심으로 현대적인 또 다른 사상들을 포용하려고 했던 새로운 시도였다. 전륜성왕이 되기 위한 그의 마음은 컸지만, 그가 꿈꾸던 것만 큼 미얀마에서 불국토를 건설하지 못했다. 그는 결국 1962년 네윈의 쿠데타에 의해 축출되었다.
과거 바간의 아노야타가 사회를 재정립하고자 불교를 통해 통합된 바간 왕조를 만들었던 것처럼, 그도 식민지 시절 분열되고 혼란스러웠던 사회를 불교를 중심으로 재통합하려 했다. 그는 1961년 불교를 국교로 지정했지만, 그 다음해에 네윈에 의해 불교 국교화는 폐지되었다.
전륜성왕의 의무에는 법의 현실적 실현이 포함되어 있다. 즉 국민을 위험의 순간으로부터 보호하며, 악행이 퍼지지 않도록 노력하며, 가난한 자에겐 재화를 나눠주고, 천륜(天輪)이 가는 대로 법을 전하는 것이다. 전륜성왕이 통치하는 이상 국가는 법에 의해 국민들이 안정된 질서 속에서 도덕성을 강조하고 국민들이 물질적 빈곤감을 최소화하는 사회를 전제하고 있다. 즉, 인간의 정신적인 면과 물질적인 면이 균형을 이루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전륜성왕은 사람들의 도덕성을 높이고 재화의 평등분배를 실천해야 하는 것인데 우 누가 주장한 사상을 살펴보면 전륜성왕의 조건과 일치한다.
선(善)이 악(惡)을 이기기 위해서는 많은 희생과 노력이 필요하다고 한다. 전륜성왕을 꿈꾸던 우 누는 무력을 동원해 쿠데타를 일으킨 네윈에 의해 자리에서 내려오게 되었다. 불교적 가치인 자비와 비폭력을 기반으로 민주화운동을 이끈 아웅산 수지도 결국 총과 무기를 든 민아웅흘라잉의 또 한 번의 쿠데타로 인해 감금되었다.
미얀마의 불운한 쿠데타의 역사가 ‘전륜성왕’을 꿈꾸고 불교적인 사상과 가치관을 통해 미얀마의 부국강병과 발전을 꿈꾼 우누의 원력이 미얀마 현대 정치에 되살아 나길 바란다.<양곤대 박사과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