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무아공과 선
괴로움도 실체가 없는 법
무아 공 정견하면 지혜가
영원한 대자유의 길 찾자
코로나19 대유행과 지구 이상 기후로 세계 인류가 극심하게 병과 죽음의 고통을 받는 지금, 우리는 부처님의 깨달음 중도를 바로 알아 마하 지혜로 생로병사의 괴로움에서 대자유로 속히 건너가야 한다.
불교 ‘무아 공’과 힌두교 ‘아트만’
<반야심경>의 핵심은 앞에서 강조하였듯이 ‘오온이 공한 것을 비추어 보고 온갖 고통에서 건너다’이다. ‘나’라는 오온(五蘊)이 모두 연기, 무아이니 공하다. 나라고 할 실체가 없다. 이것이 불교의 기본이다.
그런데 부처님 당시 브라만(지금의 힌두)교에서는 ‘나’를 아트만(我, tman)이라 하여 우주를 주재하는 절대 신인 브라만(梵, Brahman)의 분신으로 보고 실체가 있다고 보았다. 우주의 실재인 브라만과 그 분신인 나는 실체가 있으니 생로병사하고 죽어서 다음 세상으로 가는 윤회를 말한다. 흔히 윤회(輪廻)를 불교 사상으로 알고 있는데, 부처님 이전부터 인도 종교계의 공통된 입장이며, 서양에서도 고대에 윤회 사상이 있었다.
싯다르타가 중도를 깨치고 부처가 되어 생사 윤회에서 해탈을 선언한 것이 불교의 출발이다. 부처님은 생사 윤회를 설한 것이 아니라 깨달음을 통한 생사 해탈의 길을 깨치고 우리에게 알려준 것이다. 부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뜻이 여기에 있다.
지금 우리 불교계에 생사 윤회만을 말하고 깨달음을 말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불교가 아니라 힌두교의 입장이다. 특히, 내가 실체가 없는 무아, 공이라는 것을 모르고 아트만처럼 실재하는 나, 깨칠 나, 윤회하는 나, 생로병사 하는 나가 있다고 보면 힌두교의 해석이 된다. 흔히 진아(眞我), 참나, 주인공과 같은 말도 무아 공의 입장에서 사용하면 합당하나 힌두교의 아트만처럼 실체가 있다는 견해라면 불교가 아닌 외도가 되어 버리니 정견을 잘 세워야 한다. 참으로 안타까운 것이 지금 우리 불교계에 불교의 무아 공과 힌두교의 진아(眞我) 아트만을 구분하지 못하는 견해가 너무 많다는 것이다.
대승 사상이 일어날 무렵에도 이 무아에 대한 견해에 오해와 혼란이 많았던 모양이다. 대승 사상을 집약한 <반야심경>에는 ‘오온이 공’함을 역설한 뒤 ‘모든 법(法)은 공하여 나지도 멸하지도 않으며(不生不滅), 더럽지도 깨끗하지도 않으며(不垢不淨), 늘지도 줄지도 않음(不增不減)’을 설한다. 여기에서 ‘법(法)’은 부처님이 깨친 우주 만물의 존재원리, 진리를 말한다. 우주 만물은 ‘나지도 멸하지도 않는 불생불멸’이다.
왜냐? 일체 만물이 연기, 무아, 공이기 때문이다. 일체 만물이 실체가 없으니 나는 것도 멸하는 것도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을 무아(無我), 무상(無相), 공(空)이라 한다.
선(禪)에서는 이 무아와 공, 불생불멸의 도리를 생사일여(生死一如) 또는 중생이 본래부처라 표현한다. 나와 우주 만물은 본래 실체가 없으니, 삶과 죽음이 본래 하나이고, 번뇌와 지혜가 따로 없으며, 중생이 본래부처라 한다. 참 어려운 말이지만, 선은 대승의 이 깊은 진리인 무아, 공을 우리 일상에서 정견하여 삶과 죽음이 둘이 아니며 중생이니 부처니 하는 것도 분별망상일 뿐 본래는 둘이 아니라는 것을 깨우친다.
무아이니 생로병사도 본래 없다
‘나’라는 오온이 공하니 나라고 할 실체가 없다. 이것이 부처님의 깨달음이고 불교의 기본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중생들은 늘 나도 있고, 괴로움도 있다고 보니 생로병사의 괴로움에 시달린다. 죽음과 더불어 우리를 가장 괴롭히는 것이 병이다. 과학기술이 아무리 발달해도 여전히 코로나19와 같이 알 수 없는 바이러스와 병이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부처님도 인간의 근본 문제인 생로병사에 대한 해결을 위해 위대한 출가를 결단하고 중도를 깨치고 생사 윤회에서 해탈을 선언하였다.
부처님이 깨치고 보니 생로병사라는 것도 ‘내가 있다’는 착각이 낳은 분별망상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반야심경>에서 ‘늙고 죽음도 늙고 죽음이 다함까지도 없다’고 한다. 가히 충격이 아닐 수 없다. 인류 문명사에서 인간의 생로병사만큼 큰 문제가 어디에 있겠는가? 그런데, 부처님은 이 생로병사가 본래 없고 ‘내가 있다’는 착각에서 나온 것이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처님이 깨달음의 길로 제시한 마하 지혜를 밝혀 ‘내가 있다’는 양변에 떨어져 생로병사의 괴로움을 받지 말고 무아 공의 정견을 세워 해탈의 대자유로 가야 한다. 내가 있다고 보면, 병도, 늙음도, 죽음도 필연적으로 따르게 된다. 그러면 죽어 영혼도 있게 되니 다음 세상도 지옥과 극락도 가는 윤회를 피할 수 없다. 무아 공의 정견을 세우면 나도 없고 병도 죽음도 없고 영혼도 없으니 집착할 것도 괴로워할 것도 생사 윤회도 본래 없는 법을 깨친다.
부처님과 선사들의 열반
부처님께서는 죽음을 어떻게 맞이 하였을까? 깨달음으로 생사 윤회의 해탈을 선언한 부처님께서는 80세에 대장장이의 아들 쭌다의 상한 버섯요리 공양을 드시고 심한 설사를 하시다 열반에 든다. 이때 부처님은 죽음을 근심하지 않고 오히려 당신에게 상한 음식을 공양한 쭌다를 연민하셨다. 부처님은 당신이 열반에 든 뒤 쭌다가 대중의 지탄을 받아 잘못되는 것을 우려하고 일부러 아난을 보내어 쭌다를 위로해 주게 한다. 부처님은 당신의 죽음을 고뇌한 것이 아니라 당신을 죽음에 이르게 한 쭌다를 더 배려함으로 병과 죽음에서 해탈하였음을 증명하였다.
죽음에 대하여 초연한 분으로 조계종 초대 종정 한암 스님의 행적이 감동이다. 오대산 상원사에 주석하던 한암 스님은 한국전쟁 당시 1.4후퇴 때 국군이 청야작전으로 월정사를 불태우고 상원사까지 불 지르러 오자 가사 장삼을 수하고 법당에 올라가 삼배를 한 뒤 좌선 자세로 앉아서 불을 붙이라 하였다. 군인들이 놀라서 스님께서 앉아 계신데 어떻게 불태우겠느냐고 나오라 사정해도 한암 스님께서는 미동도 하지 않으셨다. 급기야 군인들은 상원사 소각을 포기하고는 스님께 허락을 구한 뒤 법당 문짝만 몇 개 떼어 불태우고는 물러갔다. 이후 한암 스님께서는 실제 법당에서 가사 장삼을 수한 뒤 좌선하는 자세로 열반에 들었다. 앞서 육조 혜능 대사의 열반상과 마찬가지로 한암 스님도 좌선하는 모습 그대로 삶과 죽음이 둘이 아닌 도리를 보여주셨다. 당시 불자인 군종장교가 스님께 문안 인사를 드리러 갔다가 앉아서 돌아가신 한암 스님의 법구를 보고는 사진을 찍어 일간 신문에 크게 실려 세상에 큰 화제가 되었다. 한암 스님은 죽음의 순간에도 평상시처럼 좌선하다 가신 것이다.
이와 같이 부처님이나 육조 혜능 스님이나 한암 스님이나 병과 죽음에 대하여 두려워하거나 괴로워하지 않고 생사가 둘이 아닌 불생불멸의 도리를 그대로 행하셨다. 선사들 중에는 이런 불생불멸, 생사불이의 도리를 알려준 열반이 수 없이 많다.
내가 없으니 고집멸도도 지혜도 본래 없다
<반야심경>에서 나도 없고, 생로병사도 본래 없으니 불생불멸이고 더러움도 깨끗함도 본래 없다는 것을 깨달아 영원한 대자유로 가야 한다.
그런데, 부처님의 무아 공을 바르게 알지 못하고 자꾸 ‘내가 있다’고 보아 생로병사도 있고, 연기하는 나, 깨달음을 구하는 나가 있다는 양변에 떨어지니 분별망상이 일어나 생사 고해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깨치고 첫 설법에서 중도를 깨쳤노라 하지만, 다섯 수행자는 중도를 알 수 없었다. 부득이 중도를 팔정도, 여덟 가지 바른 길로 자상하게 풀어서 제시하였다. 이렇게 중도와 팔정도를 설해 주어도 깨치지 못하자, 부처님은 다시 고집멸도의 사성제(四聖諦)를 설한다. 그때 “집법(集法)이 곧 멸법(滅法)이다”는 부처님 설법을 듣고 마침내 꼰단냐가 처음으로 깨치고 이어서 나머지 네 수행자도 다 깨달았다.
지금 팔리어로 된 초기경전만을 중시하는 남방불교에서는 팔정도와 사성제를 근본교리로 삼으면서도 중도는 아예 언급하지 않는 흐름도 있고, 이와 달리 중도를 중시하는 흐름도 있다.
북방의 대승과 선종에서는 중도, 무아, 공을 중시하면서도 사성제는 방편으로 본다. 즉, 본래성불의 선에서 볼 때 괴로움인 고(苦)는 무아 공을 모르고 ‘내가 있다’는 착각에서 일어난 것이다. 자기를 무아 공으로 정견하면 괴로움도 실체가 없는 것이니 착각에서 깨어나 본래 완전한 연기로 돌아가는 것이다.
두려움과 착각서 깨어나 완전한 열반으로
오온이 공하니 생로병사도 고집멸도도 지혜도 얻음도 본래 없다는 <반야심경>은 곧 선과 직결된다. 괴로움도 죽음도 ‘내가 있다’는 착각에서 일어나니 그 착각 망상을 완전히 비우면 깨달음이고 본래 부처로 돌아간다.
어떤 분들은 이를 두고 “뭘 닦고 깨칠 것도 없다. 그냥 놓아버리면 된다. 이것 밖에 다른 것이 없다. 깨달음도 없다”라고 말하는 것을 본다. 이런 말에 속으며 안 된다.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다. <반야심경>의 “나도 없고 지혜도 얻음도 없다”는 마하 지혜는 깨달음도 아무 것도 없다는 허무주의나 적멸에 머무름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견해는 유와 무, 유위와 무위, 유아와 무아의 양변에 떨어진 견해로 부처님이 깨친 중도의 지혜가 아니다. 삼세의 모든 부처님께서는 고와 락, 유와 무, 번뇌와 지혜의 양변을 멀리 떠나 완전한 열반을 성취하여 자유자재하였다. 마하 지혜는 불교의 중도이고 위없는 바른 깨달음이고 완전한 열반이며 자유자재를 말한다.
내가 있다는 착각에서 빠져나오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