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반야심경〉과 선 上
인간의 본성 ‘희로애락’
정견으로 바로 보아야
영원한 대자유를 증득
부처님은 중도를 깨달아 생사윤회를 해탈하시고 우리에게 그 길을 알려주셨다. 부처님이 깨친 중도의 마음을 〈금강경〉에서는 “응당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이 난다”로 말씀하신다. ‘금강반야’란 우리 마음이 다이아몬드 같이 밝고 단단한 지혜로 온갖 분별망상을 벼락같이 부셔버리는 것이다. 이 다이아몬드 금강 지혜를 〈반야심경〉에서는 ‘마하반야’라 하는데, 바로 큰 지혜다. 큰 지혜로 생사고해를 건너 영원한 행복으로 가는 핵심 경전이 바로 〈반야심경〉이다. 이 〈반야심경〉의 반야 지혜가 바로 禪이다.
〈반야심경〉이란 무엇인가?
〈반야심경〉은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을 약칭한 경전으로 당나라 현장 법사가 649년에 번역했다. 〈반야심경〉은 팔리어본이 없고 산스크리트어본만 있는데, 제목은 ‘마하 프라즈냐파라미타 흐르다야 수트라(mah-Prajpramit-hdaya-stra)’이다. 마하는 크다는 뜻이고, 프라즈냐는 지혜, 파라미타는 건너다, 흐르다야는 핵심, 수트라는 경이란 말이다. 큰 지혜로 깨달음으로 가는 핵심의 길이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이다. 조계종단에서 〈반야심경〉을 한글로 번역할 때 무슨 까닭인지 제목은 그대로 두었는데, 제목까지 번역한다면 우리에게 훨씬 쉽게 다가올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반야심경〉도 ‘반야(지혜)’라는 경 이름이 보여주듯이 〈금강경〉과 함께 방대한 대승 반야부 경전 중 하나다. 〈반야심경〉은 동아시아 불교 문화권에서 가장 많이 자주 독송되는 경전이니만큼 불교 대승사상이 잘 드러나 있다. 〈반야심경〉은 사찰에서 조석 예불과 불교의 모든 법회, 행사에서 의식으로 봉독하여 불제자들의 일체감을 만들어 준다. 특히 한국을 넘어 중국과 일본 불교계와 합동 법회 시에 함께 〈반야심경〉을 봉독하는데 말은 달라도 뜻은 하나이니 그런 훌륭한 앙상블도 없다. 인종과 민족, 그리고 국가와 언어가 다른 동아시아 불자들을 하나로 연결시키는 가장 중심이 되는 경전이 바로 〈반야심경〉이다.
〈반야심경〉은 방대한 반야부 경전 600권의 핵심을 표현한 경전으로 한자 260자, 한글 438자로 짧은 경전이나 그 뜻은 매우 심오하여 어렵게 느껴진다. 특히 한자를 병행하면 더 그렇다. 하지만, 〈반야심경〉도 부처님이 깨친 중도로 보면 그 뜻이 쉽게 드러난다.
괴로움서 벗어나는 마하 지혜, 〈반야심경〉
마하 큰 지혜로 생사윤회를 건너가는 요긴한 길을 설한 〈반야심경〉 중에서도 핵심이 ‘오온이 공한 것을 비추어 보고 온갖 고통에서 건너느니라’(照見五蘊皆空度一切苦厄)이다. 이 말씀은 〈반야심경〉뿐 아니라 불교의 모든 경전 중에서도 가장 요긴한 마하 금강 지혜다. 〈금강경〉에서 부처님이 말씀하신 ‘금강 지혜’와 〈반야심경〉에서 관세음보살님이 말씀하시는 ‘마하(큰) 지혜’는 같은 뜻이다.
우리가 아무리 고통스럽고 죽음을 앞둔 생사의 경계에 서 있어도 이 마하 지혜로 생사의 고통을 단박에 건널 수가 있다. 지금 인류에게 가장 큰 고통은 코로나19 바이러스다. 2021년 4월 19일 기준, 전 세계 코로나 감염 사망자수가 300만 명을 넘고, 확진환자는 1억 4000만 명이 넘는다. 전염의 위험 때문에 가족도 친구나 도반도 만나기도 어려운 실로 괴로운 시절이다. 이처럼 괴로운 상황에서도 우리가 평상심으로 자기 본분에 충실하며 여여한 삶을 살아가는 지혜는 어디에 있는가? 바로 우리 마음에서 ‘오온이 다 공’이라는 정견을 세우면 가능하다.
오온(五蘊)은 ‘나’를 구성하는 다섯 가지 요소다. “나는 누구인가?”하고 묻는 이에게 불교의 대답은 ‘오온’이라 말해 준다. ‘나’는 색(色)이라는 물질 요소와 수(受)·상(想)·행(行)·식(識)이라는 정신 요소가 연기하여 존재한다. ‘나’는 살과 뼈 등 물질 요소와 이 물질이 연기하여 느낌과 생각, 의지, 의식이 난다. ‘나’를 구성하는 다섯 가지가 모두 공(空)하다고 비추어 본다함은 정견(正見)으로 본다는 말이다. 정견으로 보면, 〈금강경〉에서 부처님이 말씀하신 일체 중생이 모두 무아(無我)라고 보는 것이고, 〈반야심경〉에서는 그 무아를 공(空)이라 한 것이다.
내가 코로나19에 감염되어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나 죽지 못해 산다는 삶이나 늙고 병들고 죽는다는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가장 빠른 길은 ‘나’ 없음의 공으로 보는 것이다. 내가 있다고 한다면, 삶과 늙고 병들고 죽음을 피할 수가 없다. 더구나 ‘내가 있다’고 보면 죽은 뒤에도 영혼이 있다고 본다. 그래서 생사윤회의 괴로움을 영원히 벗어날 수가 없다.
결국, 불교에서 생사의 괴로움에서 벗어나 영원한 행복을 누리려면 나와 일체 만물을 무아 공으로 보는 정견이 가장 중요하고 모든 수행의 시작이자 끝이다.
기공, 단학, 힐링 명상의 한계
지금 인류 문명이 자본주의로 운영되는 시대라 ‘경쟁’이 제도화되어 있다. 이런 시대에 교육에서 경제생활까지 경쟁 아닌 곳이 없다 보니 인간의 삶은 일상화된 경쟁 속에서 서로 상처를 주고받으며 피폐하기 그지없다. 더구나 물질 중심의 가치관이 횡행하다 보니 부동산이나 주식 등을 통한 물질적 재산 축적에 마음이 쏠려 사회 공동체 구성원으로서의 도덕관이 마비되고 있다. 부처님의 소욕지족의 지혜와 무소유의 탁발 수행 공동체 삶을 기준하여 볼 때 참으로 안타깝다. 지금 우리 앞에 닥친 코로나19 팬데믹과 지구 이상 기후 등 인류 문명의 대위기 속에서도 평상심으로 한그루 사과나무를 심기 보다는 물질에 열광하는 현실이라니…
이런 물질 중심의 경쟁 사회에서는 정신적 공허감과 우열 경쟁에서 벗어나기 위해 마음수련, 기공, 단학 등과 같은 수련단체나 힐링 명상 프로그램이 각광 받고 있다. 물질 중심의 경쟁 사회에 지친 사람들에게 수련과 명상을 통하여 정신적 육체적 회복을 돕고 삶의 균형을 되찾는다면 좋은 일이다.
하지만, 이런 수련과 힐링 명상이 ‘내가 있다’는 전제에서 나를 더 건강하고 행복하게 하는 목적으로만 한다면 이것은 한계가 분명하다. 이런 길은 ‘내가 있다’고 보기 때문에 영원히 생사윤회의 괴로움을 근본적으로 벗어나는 불교의 마하 지혜가 아니다.
불교의 마하 지혜는 중도, 무아, 공을 정견하고 실천해야 생사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다. 세계적인 명상 붐에서도 이러한 불교의 정견에 기반을 둔 명상과 참선 수련이 매우 중요하다. 우리는 고통에 빠진 이들에게 진통제 같이 잠시 잠깐의 위로나 힐링 명상이 아니라 생사윤회의 괴로움을 영원히 멈추는 불교의 마하 지혜로 가야 한다.
짜증과 화가 난다면 참된 불자?
우리 같은 재가 생활인들이 현대 사회에서 가장 많이 마주 하는 것이 짜증과 화가 아닐까? 일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상대가 내 마음을 몰라줄 때, 내가 원하는 바가 이루어지지 않을 때, 상대가 나를 오해하여 비난하고 능멸할 때 나는 짜증과 화가 일어난다. 화는 우리를 괴롭히는 탐욕, 어리석음과 함께 세 가지 독 중에 하나다.
그런데, 〈반야심경〉의 가르침으로 본다면, 화가 없어야 진정한 불자라 할 수 있지 않을까?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고 행하는 불자라면 화가 일어날 때 내가 무아 공임을 정견하여 화를 멈추고 온갖 괴로움을 지나가야 한다. 이것이 되지 않아 내가 있다고 보고 집착하고 욕망하고 화내고 원망한다면 불교의 길이 아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마하 지혜는 바로 이런 욕망과 화의 고통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행복하게 사는 길이다.
이렇게 말하면 불교는 참으로 어렵다. ‘희로애락은 인간 본성인데, 화 분노까지 내지 말라 하니 나는 이런 불교는 안 할래’ 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희로애락은 유가(儒家)에서 말하는 본성이다. 유가의 희로애락은 내가 있다는 유아(有我)의 입장에서 생사윤회의 고통 속의 감정을 말하는 것이다. 불교의 마하 지혜는 내가 무아 공이니 희로애락의 감정도 실체가 없는 것이고 머물고 집착할 것이 없는 대자유를 말한다. 그러니 우리가 생사의 괴로움에서 벗어나 영원한 대자유로 가려면 나와 희로애락의 감정을 무아 공으로 정견 해야 하는 것이다.
부처님과 화
불교의 영원한 모델은 부처님이다. 방대한 팔만대장경 어디에도 부처님이 화를 낸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부처님은 화를 내야 할 대목에서도 화가 아닌 자비심을 내셨다.
수많은 일화가 있지만, 〈금강경〉에 나오는 ‘가리왕이 부처님의 사지를 절단’한 엽기적인 사건이 가장 유명하다. 부처님이 전생의 인욕 수행자 시절에 잔악무도한 가리왕을 사냥하던 숲에서 만난다. 왕은 자기 궁녀들이 부처님의 평온한 모습에 감화되어 예경하고 공양을 올리자 가리왕은 시기 질투가 나서 부처님에게 이렇게 묻는다. ‘너는 누구냐?’ ‘인욕행을 닦는 수행자입니다.’ 가리왕은 ‘인욕 수행을 한다니 얼마나 참는지 한 번 보자’하며, 부처님의 두 팔을 자르는 악행을 범한다. 그럼에도 부처님은 화와 원망하는 마음 없이 여여하였다. 이에 화가 더 난 가리왕은 두 다리까지 절단하는 악행을 저지른다. 이런 희대의 악행에도 부처님은 가리왕에게 원망하거나 화내는 마음이 없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부처님은 ‘나’라는 오온을 공으로 보아 내가 있다는 상이 없었기 때문이다. 즉, 무아 공의 정견으로 보니 상대를 원망하거나 화를 내지 않고 오히려 연민하는 마음이 났던 것이다.
부처님처럼 능멸을 받으면서도 화와 원망하는 마음이 없는 평상심이 바로 禪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