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봉려관 스님 생애 바로 세우기
근대 제주불교 재건한 봉려관
스님의 입적후 82년 지났지만
생애·업적 조명 미흡한 수준
2017년 왜곡된 주장 알게 된 후
문헌자료·구술채록 등 본격화
90여명 증언 확보해 교차 검증
노스님과 사숙은 종종 혜달 스님을 앉혀두고 봉려관 스님의 이야기를 꺼냈다. 조선시대 제주목사로 부임한 이형상에 의해 수많은 사찰들이 폐허가 되고 불교의 씨앗이 사라졌던 제주도, 이후 200여년간 지속된 암흑기의 제주불교를 다시 일으킨 비구니 봉려관.
그는 엄혹했던 시기 여성의 몸으로 육지와 제주를 오가며 관음신앙에 의지해 불연의 씨앗을 지폈고 관음사를 비롯한 사찰들을 창건했으며, 항일운동에도 투신했던 입지전적인 스님이었다. 듣고 있자면 흥미로웠다. 그러나 당시 혜달 스님에게 봉려관은 단지 문중 스님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하는 대단한 비구니 스님의 이야기, 그 뿐이었다.
1989년 노스님이 입적했다. 스님을 떠나보내는 자리에서 스님의 상좌 법인 스님을 만났다. 법인 스님은 봉려관 스님의 이야기로 3일 밤낮을 지새웠다. 그리고 한삼모시적삼 한벌을 꺼냈다.
“봉려관 스님의 행장을 정리하겠다고 약속해라. 내 말을 기억한다면 연종 스님을 찾아가서 봉려관 스님의 삶을 들어라. 반드시 해야 할 일이다.”
광주 흥룡사에서 법희 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후, 문중 스님들을 통해 전해듣기만 했던 봉려관 스님의 삶이 하나의 실체로서 혜달 스님에게 불쑥 와 닿은 순간이었다.
그러나 인연은 쉬이 닿지 않았다. 스님은 그해 묘엄 스님의 권유로 대만 유학길에 올랐고, 한동안 봉려관 스님을 잊고 살았다. 사실 미처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는 표현이 적합하다. 국립 대만사범대학에서 학사학위 취득을 시작으로 석사, 박사과정까지 수학하며 공부와 연구에만 푹 빠져살았던 시기였다.
법인 스님이 잊었던 약속을 상기시켰다.
“봉려관 스님을 절대 잊지 마라. 봉려관 스님의 업적이 정리된다면 이는 우리 문중을 넘어 한국 비구니의 자존심이 될 것이다.”
봉려관 스님을 다시 만난 것은 2017년 12월 한 세미나장에서다. 혜달 스님은 큰 충격을 받았다. 한 연구자가 봉려관 스님과 관련해 왜곡된 주장을 펼치기 시작한 것이다.
스님은 “한 발표자가 근거 문헌 없이 봉려관 스님의 입적지를 느닷없이 산천단이라고 주장하는 모습을 보고 경악했다”며 “봉려관 스님의 입적지는 관음사이며 이는 기록과 문중스님들의 증언으로 이미 확인된 사실이다. 그 기억은 봉려관 연구에 본격적으로 매진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고 설명했다.
“연구를 시작한 후 일부 제주연구자들에 의해 봉려관 스님의 생애와 업적이 축소·왜곡되는 등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으며, 확실한 근거 없이 수차에 걸쳐 사실과 다르게 알려지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봉려관 스님의 은사부터 관음사 창건내력, 입적지까지 문중 스님들로부터 들어온 구술과 다른 것은 물론, 역사적 사실과도 맞지 않고 명확한 근거자료도 없었죠. 봉려관 스님의 행적을 역사적으로, 바르게 정립해야 할 필요성을 매순간 절감했습니다.”
혜달 스님은 “심지어 명확한 근거 없이 관음사 창건연도조차 바꾼 주장들이 수차에 걸쳐 제기되고 있었다”고 한탄했다.
스님에 따르면 1908년 계를 받고 제주도 산천단 거처로 돌아온 봉려관 스님은 4월 대흥사 제주도 담당 포교사로 임명됐다.(승적부) 이어 근대 제주불교사상 최초로 산천단에서 부처님오신날 행사를 봉행했지만 이후 토착민들의 방화로 한라산으로 향했다. 사찰 건립을 위한 100일 관세음보살 기도에 전력한 스님은 기도 성취 후 해월굴에 머물며 사찰 건립에 매진했고, 1909년 봄 근대 제주불교 최초 사찰 관음사를 창건했다.
혜달 스님은 “일부 연구자가 봉려관 스님과 함께 관음사를 창건했다고 주장한 인물은 1909년 7월 22일 대구 형무소에서 나왔고, 관음사 창건을 직접 언급한 문헌들에도 언급되지 않는다”며 “오류가 발생하자 관음사 창건연도를 1908년으로 밝혔는데 문헌기록과 대치될 뿐 아니라 사실상 불가능한 주장”이라고 일축했다.
봉려관 스님에 대한 왜곡을 확인한 혜달 스님은 관련 자료들을 닥치는 대로 모았다. 기초자료가 될 수 있는 문헌들은 관음사 화재 등으로 총 4차에 걸쳐 유실된 상황이었다. 구술채록이 필요했다. 기존의 문헌자료에 입각해 봉려관 스님의 생애를 1차적으로 정리한 스님은, 이를 토대로 스님의 발자취를 되짚어나갔다.
노스님 안광호 스님(1915-1989)과 상좌 법인 스님(1931-2011), 법선(1899-1991, 제주보현암) 스님을 비롯해 봉려관 스님을 기억하는 스님과 재가자들을 찾아 직접 만났고, 증언을 녹음했다. 구술 기록들은 문헌과 역사적 사실, 다른 이의 구술과 교차 대조해 치밀하게 검증하는 절차를 거쳤다.
“학자의 기본은 연구입니다. 확실한 자료를 토대로, 산별적으로 널려있는 정보, 흩어진 자료와 기록들을 취합해 교차검증해 명확한 근거를 찾아나가는 과정이죠. 봉려관 스님 입적 후 80년 세월이 지나면서, 실제 만났거나 기억하는 분들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특히 구술채록에 속도를 냈습니다.”
봉려관 스님의 발자취가 닿은 곳이라면 어디든지 찾아갔다. 운전을 하지 못해 대중교통을 이용해 발로 뛰는 수밖에 없었다. 겨울에는 털신을, 여름에는 고무신을 신고 전국 곳곳을 누비다보니 발이 만신창이가 되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허탕을 친 적도 있었고 아무 기대 없이 찾은 곳에서 핵심적인 증언을 확보한 경우도 있었다. 구술을 받으며 만난 모든 이들을 스승으로 여겼다. 최대한 많은 증언을 확보해 교차검증하는 과정에서 사실 가능성 여부를 드러내는 것이 중요했기에 가능성도 항상 열어뒀다. 그렇게 만난 이들의 수가 2018년 한해만 87명, 지금까지 90여명을 훌쩍 넘는다.
혜달 스님은 최근 근거문헌과 90여명의 구술 기록을 정리해 봉려관 스님의 일대기를 정리한 책 <봉려관-근대 제주불교를 일으켜 세우다>를 출간했다. 그간 왜곡됐던 봉려관 스님의 행적과 근대 제주불교사를 교차검증해 바로잡아 온 성과들이 담겼다.
그럼에도 혜달 스님은 “아직도 갈 길이 멀다”고 말했다. 근거가 확인된 내용만을 선별해 담아내다보니 전체 연구 내용의 30% 정도밖에 담지 못해 되레 아쉬운 마음이 크다.
“봉려관 스님의 행적을 되짚어나가는 과정이 결코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인쇄된 책을 확인하면 기쁠 줄 알았는데 눈물부터 나더라고요. 무엇보다 봉려관 스님에게 죄송한 마음이 컸어요. 너무 늦어서, 그리고 아직도 스님의 생애를 모두 다 드러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과제도 산적해 있다. 봉려관 스님은 이제 명실공히 근대 제주불교를 재건한 비구니이자 제주불교 첫 비구니로 널리 조명되고 있는 반면, 여전히 항일운동 행적에 대한 연구는 미진하다. 항일운동 거점사찰로 추정되는 법정사를 중심으로 그 행적을 명확하게 드러낼 필요가 있다는 신념이다.
“봉려관 스님이 항일운동을 하다 독살당했다는 증언들이 있습니다. 스님이 중창한 법정사는 사람이 다니기 힘든 곳에 위치해 있으며 뒤편으로도 통로가 있어요. 스님이 법정사에 항일투사들을 숨겨줬고 자금을 만들어 대흥사 등에 전달했다는 증언도 있습니다. 불교계 항일운동은 법정사를 넘어설 수 없음에도, 아직까지 제대로 연구되거나 알려져 있지 않죠. 우리 불교계의 관심이 필요한 지점입니다.”
왜곡을 바로잡기 위한 노력은 시작일 뿐이다. 나아가 봉려관 스님의 생애와 업적을 제대로 조명하고 이를 토대로 그 유지를 잇기 위한 노력을 이어갈 생각이다.
“요즘 포교하기 힘들다고 하지만 불연이 끊였던 그 시절 제주보다 더하겠습니까. 거처에 불을 지르고 돌팔매질을 하는 이들 속에서도 봉려관 스님은 관음신앙에 의지해 당당히 저변을 넓혔고 종국에는 근대 제주불교를 재건했습니다. 엘리트도 아니었죠. 아주 평범한 여성이었습니다. 봉려관 스님은 원력으로 그에게 주어진 수많은 일을을 헤쳐나갔고 그것이 쌓여 ‘비범한 업적’이 됐습니다. 우리 후손들이 되새겨야 할 지점입니다.”
비구니 문중서 구술로 전해졌던 봉려관 스님의 비범한 삶이 혜달 스님의 손끝에서 그 실체를 드러내고 있다. 혜달 스님은 그 생애와 업적이 완성될 때 모든 자료를 총체적으로 담은 자료집을 출간한 계획이다. 자료집은 봉려관 스님의 참모습을 확연히 드러내는 동시에, 후속 연구자들을 위한 기초자료가 될 것이다.
혜달 스님은 “봉려관 스님이 입적한지 올해로 꼭 82년이 됐다”며 “봉려관 스님의 업적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잘못된 것은 바로잡는 과정을 넘어 한국불교를 지탱한 스님, 그리고 여성리더로서 봉려관 스님을 제대로 알려나갈 것”이라고 다짐했다.
송지희 기자 jh35@hyunbul.com
혜달 스님은
1982년 법희 스님(광주 흥룡사)을 은사로, 자운 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계했다. 1987년 자운 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수계하고, 1988년 3월 봉녕사 승가대학 대교과를 졸업했다. 1994년 국립 대만사범대학에서 학사학위 취득 후 1997년 국립 대만사범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2002년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일본 하나조노대학 연구원, 동국대학교(서울) 선학과 강사, (사)보조사상연구원 연구위원을 역임했으며, 현재 관음정사(제주) 문화원장, BBS 제주불교방송 운영위원(감사), (사)봉려관선양회 이사, (사)봉려관불교문화연구원 원장이다. 〈제주의 여성 리더 봉려관〉에 이어 어른들이 읽는 동화 〈고마워요 봉려관〉을 기획·감수했다. 최근 그간 연구성과를 담은 〈봉려관〉을 출간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