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일: 2025-11-26 11:15 (수)

유권자여, ‘팬’ 아닌 ‘주인’이 되라

24. 한국정치 방향

정치 애착과 일체감의 발로
스포츠처럼 대리싸움 변질
중도적 유권층 ‘스윙 보터’
일방지지층보다 합리성 도움

각 나라마다 열광하는 스포츠가 있다. 미국은 미식축구, 야구, 농구에 열광하지만 축구에는 열광하지 않는다. 반대로 유럽은 축구에 열광하지만 미식축구와 야구는 거의 하지를 않는다. 나는 뉴질랜드 오클랜드 대학에서 1년 동안 안식년을 보냈는데 뉴질랜드인은 정말 스포츠를 좋아하는 국민이다. 통계에 의하면 국민 중 스포츠 클럽에 가입하는 비율이 가장 높은 나라가 뉴질랜드이다. 여성도 남성 못지 않게 거친 스포츠를 좋아한다. 뉴질랜드가 열광하는 스포츠는 축구도, 야구도, 미식축구도 아닌 럭비다.

럭비는 워낙 보편화된 운동이 아니다보니 영연방 국가끼리만 한다. 럭비가 원래 영국에서 시작된 탓으로 주로 영연방 국가에 보급되었다. 최근에는 다른 나라에서도 럭비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지만 아직도 영연방 국가가 럭비에 열광한다. 럭비도 축구처럼 월드컵 같은 리그전이 있는데 영연방 국가가 참가하여 경기를 한다.

뉴질랜드의 원주민은 마오리족이다. 마오리족은 체격이 좋고 운동에 뛰어나서 유명한 럭비 선수가 많다. 마오리족이어도 럭비 선수이면 전국적인 인기도를 누린다. 내가 1년간 머물렀던 오클랜드 대학의 어떤 교수는 뉴질랜드가 워낙 스포츠에 관심이 많다보니 지적인 측면에는 관심이 없다며 한탄했다. 뉴질랜드는 매년 전국의 고등학교가 동일한 시험을 치르고 성적의 순위를 발표한다. 뉴질랜드는 아직도 영국의 엄격한 교육시스템을 이어 받아 남자고등학교, 여자고등학교, 남녀 공학의 세 가지 종류의 고등학교가 있다. 1등부터 10등까지에 포함된 고등학교 중 9개 고등학교가 여자고등학교다. 게다가 나머지 하나 마저도 남자고등학교가 아니라 남녀공학이다. 그 오클랜드 대학 교수는 공부는 여자가 하고 남자는 운동이나 한다는 식으로 한탄했다.

이른바 ‘럭비 월드컵’이 치러지는 기간에는 온 뉴질랜드가 들썩인다. 마치 우리나라가 월드컵 4강에 진출했을 때 온 국민이 열광했듯이 뉴질랜드 국민도 마찬가지다. 뉴질랜드가 결승에 오르면 마치 전쟁터를 방불하게 하는 긴장감이 돌기도 한다. 결승에서 승리하면 온 국민이 길로 뛰쳐나와 축제를 벌린다. 패배하면 전국민 우울할 정도로 분위기가 가라앉는다.

정치는 여러가지 면에서 스포츠 경기와 유사하다. 국민은 양편으로 나뉘어 전쟁 같은 응원을 한다. 내 편 정당이 상대편 정당을 박살내기를 간절히 바란다. 가짜뉴스를 동원해서라도 이기기를 바란다. 나라에 무엇이 유익한가보다는 상대를 꺾어야 나라가 좋아진다는 생각이다. 내편 정당이 이기면 의기양양하고 지면 침울해진다. 더구나 지역정당으로 나뉘어 있는 대한민국의 현실에서 이긴 지역과 진 지역의 선거 후 집단 정서는 학문적 연구 대상이다.

선거는 대한민국을 위해서 어떤 정책이 좋은가를 알아보는 기회가 아니다. 한명이라도 내편 정당이 더 많은 국회의원과 자치단체장을 당선시켜야 하는 전쟁이다. 대화를 통해 더 좋은 정책을 이끌어내려는 토론의 기회도 아니다. 가짜뉴스라도 동원해서 상대방 정당을 묵사발 만들어야 하는 말싸움의 전쟁터에 불과하다. 내편을 돕는 언론이 총동원되어 죽기 살기로 전쟁을 하는게 선거다. 정치인이 내 뱉는 혐오와 증오의 말에 동조하는 국민이 많을 수록 싸움은 유리해진다.

정치판의 싸움이 항상 양쪽으로 갈리지는 않는다. 정치의 영역에는 그 어느 쪽에도 기울지 않는 부동층이 존재하며 선거란 부동층을 자기 편으로 만들기 위한 싸움이기도 하다. 미국에서는 부동층을 스윙보터(swing voter)라고 하는데 사안에 따라 민주당을 지지하기도 하고 공화당을 지지하기도 하기 때문에 스윙이라고 표현한다. 부동층이 되어야 불교적이라고 생각한다면 부처님의 중도사상에 대한 오해이다. 하지만 단 한번도 민주당이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는 민주당 지지자나 단 한 번도 공화당이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는 공화당 지지자는 분명 극단이지 중도는 아니다.

선입관, 고정관념, 편견, 아집, 독선, 슬픔, 기쁨, 분노가 없이 정치와 정책을 보고 판단한다면 중도다. 정치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여실지견(如實知見)이 중도다. 지지하는 정당에 대해 사랑하고 미워하는 마음을 떠난 상태에서 정당을 지지하고 반대하는게 중도다. 평균과 중간을 항상 고집한다면 그것 또한 극단이다. 중도란 연기법의 실상을 바로 볼 때 가능하다.

정치판의 어떤 싸움은 선과 악의 싸움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부처님은 빔비사라 왕의 아들 아자타사투르 왕을 나쁜 왕이고 그의 정치는 나쁜 정치라고 비판 하신다. 국민은 어차피 둘로 나뉘게 되어 있다. 독재에 저항하는 국민과 독재를 지지하는 국민의 싸움은 선과 악의 싸움이지만 산업단지개발예산을 증액할 것인지 복지예산을 증액할 것인지의 싸움은 선과 악의 싸움은 아니다. 하지만 얼핏 선과 악의 싸움으로 보이지 않는 싸움도 깊이 심사숙고해보면 선과 악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연기의 세계에서는 모든 사물과 현상은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다른 요인과 조건에 직접 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모든 정치 현상은 선과 악의 싸움과 완전히 절연된 경우는 없다.

왜 우리는 서로 분열되어 싸울까? 그건 우리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증일아함경에서 중생이란 모두 스스로 집단을 이루고 집단에 소속되어 집단을 따른다고 설하신다. 인간을 무작위로 두 집단으로 나뉘어도 마치 서로 많이 다른 것처럼 싸운다는 학문적 연구결과를 이미 살펴 보았다. 하물며 무작위로 나눈게 아니라면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인종이 다르다면, 출신 지역이 다르다면 충분히 싸울만한 이유가 된다. 만약 싸우지 않는 두 집단이 있다면 한쪽의 힘이 너무 강해서일 수도 있다. 겉으로는 싸움으로 보이지 않지만 사실상 싸움인 경우도 있다.

무작위로 나뉜 집단도 소속원에게 소속감과 애착을 느끼게 만든다. 무작위로 나뉜게 아닌 집단은 소속원에게 더욱 강한 일체감을 느끼게 한다. 집단의 소속원은 집단에 대해 자신의 정체성을 수시로 확인한다. 정체성은 다른 집단과 싸울 때 극명하게 드러난다. 정당과 지지자는 집단을 이룬다. 내가 사랑하는 정당이 미워하는 정당과 싸움을 벌일 때 나는 내가 사랑하는 정당에 깊은 애착을 느낀다. 애착으로부터 많은 문제가 이어진다.

부처님은 애착을 알면 욕망을 알게 된다고 하셨다. 애착으로부터 많은 욕망이 이어진다. 먼저 우리는 같은 편으로부터 여러가지 이익을 제공 받는다. 정부의 직책을 제공 받고, 특혜를 받고, 쉽게 로비할 수 있어서 정부 세금을 내 돈처럼 갖다 쓸 수 있다. 그뿐인가? 심리적 이익도 수반된다. 내가 지지하는 사람, 내 편, 우리 편이 정권을 잡으면 나도 덩달아 뿌듯해진다. 오바마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었을 때 흑인이 뿌듯해한 것처럼 말이다. 지역주의로 갈라진 우리나라의 경우, 내 지역 사람이 대통령이 되면 괜히 으쓱해진다. 뿌듯한 감정은 때로는 우월주의와 결합된다. 백인이 흑인에 대해 우월감을 느끼고 이태리 북부 사람들이 남부 사람들에게 우월감을 느끼듯이 우리나라 지역주의에도 우월감이 개입되어 있다.

자신이 지지하는 대통령은 나와 동일시 된다. 나의 감정이 이입되어 대통령이 나의 정체성을 확인해준다. 내가 지지하는 대통령이 높은 지지율을 기록하면 자기 자식이 성공하듯 자랑스러워진다. 내가 지지하는 대통령이 감옥에 가면 지지자는 치욕감에 떨게 된다. 우리나라 전직 대통령 중 노무현 대통령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전두환, 노태우, 이명박, 박근혜 대통령은 모두 감옥에 갔다. 노무현 대통령이 세상을 떴을 때 지지자는 슬퍼하고 분노했다. 자신이 지지하는 대통령이 감옥에 갈 때 자신이 감옥에 간 것처럼 치를 떠는 지지자도 있다. 이러한 감정 이입이 꼭 나쁜 것은 아니다.

슬픔, 분노, 모욕감, 원한, 복수심은 우리의 눈을 멀게 한다. 정치현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극단으로 치닫게 한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정보만 선택해서 자신의 결론을 합리화할 논리를 만들어낸다. 자신의 논리와 반대되는 주장에 대해서는 또 다시 한탄하고 분노한다. 어차피 정치가 이겨야 되는 싸움이라면 정치현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여실지견의 능력이야 말로 가장 중요한 능력이다. 우리는 과연 잘 싸우고 있는걸까? 정말 이기고 싶다면 여실지견해야 한다.

싸움의 고수한테 들은 재미 있는 이야기다. 대부분 싸움의 경험이 없는 사람은 흥분하여 마구 주먹을 휘두르고 잘 보지 못한단다. 고수는 상대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잘 보인다고 한다. 정말 상대 정치인과 정당을 물리치고 내가 지지하는 정치인과 정당이 승리하기를 바란다면 슬픔, 분노, 모욕감, 원한, 복수심에 눈이 멀어서는 안되고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여실지견의 능력이 필요하다. 정치가 싸움이 되어버린 현실은 한탄할 일이지만 인간이란 어쩔 수 없는 동물이다. 싸움을 경쟁으로 바꿀 수 있는 사회가 선진사회이다. 우리는 과연 싸움을 경쟁으로 바꿀 수 있을까?

시장자본주의는 인간의 본성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 각자가 추구하는 이기심으로 시장 효율성을 실현하려고 한다. 정치도 경제와 마찬가지로 정치인의 이익을 위해 싸우는 전쟁터이다. 지지자는 심리적 이익, 경제적 이익, 기타 이익에 좌우되어 휘둘린다. 불교는 인간의 이러한 본성을 본성이 아니라고 본다. 인간에게는 중생의 한계를 벗어날 수 있는 역량이 내재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수행이란 연기법의 중도 실상을 깨닫기 위한 노력이다. 진정 불교가 세상에 빛을 줄 수 있는 종교라면 불자부터 정치현상을 있는 그대로 보고 불교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

인간의 불완전성으로 인하여 그리고 타고난 본성으로 인하여 정치는 어쩔 수 없이 전쟁으로 치닫는다. 정치판의 싸움을 좋은 세상을 위한 경쟁으로 바꾸려면 인간이 먼저 변화되어야 한다. 불교는 인간을 주어진 것으로 가정하지 않고 수행을 통해 해탈을 추구한다. 깨달음의 길을 가는 수행자는 조금씩 여실지견의 역량을 가진다. 정치가 우리를 절망하게 만들때마다 우리는 불교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 정치가 바로 서기 위해서는 나도 세상도 변해야 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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