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파산 명해
禪·佛·敎의 협치관계 정립도
참선과 염불 근본적 같은 도리
전국 행각하며 고승 대덕 친견
파산 명해(破山 明海, 1597~1666)의 속성은 건(蹇)씨이고 사천성의 대죽(大竹)인으로, 명나라 초 대학사인 건의(蹇義) 충정공의 후예이며, 강희5년(1666) 세수 70세에 입적하였다. 그는 불교의 거장으로 시인 서예가이기도 하며, 명말 청초의 중요한 선종의 대종장이다. 〈파산연보(破山年譜)〉에서 보면 19세 때 사천성 대죽현(大竹縣)의 불은사(佛恩寺) 대지율사에게 출가를 했고, 다음해 연복사(延福寺)에서 혜연(慧然) 스님으로부터 〈능엄경〉을 배웠고, 〈능엄경〉에서 말하는 일체중생 ‘개유상주진심(皆有常住眞心)’ 사상은 그에게 심원한 영향을 주었다. 그 후 사천성을 떠나 강남의 선지식을 참방하면서 참선수행을 했다. 그는 처음 참선수행을 시작할 때 고봉 원묘의 방식을 따랐다고 전해지며, 후에 다시 천동사(天童寺)의 임제종 고승인 원오 밀운의 문하에서 다년간의 수행을 통해 마침내 개오했다. 또 그는 현재의 총칭시 교외 지역에 있는 쌍계당(雙桂堂)선원의 개산조이며, 당시의 사람들이 세칭 ‘소석가(小釋迦)’라고 칭하기도 했다. 그는 중국 서남 지역에 막대한 영향을 주었으며, 청초에 승가교육을 추진하기도 했고, 선학교육을 위해서 깊고 예리한 통찰력으로 〈복호사개학업선당연기(伏虎寺開學業禪堂緣起)〉라는 책을 저술하기도 했다.
밀운 원오의 선법을 계승한 파산 명해의 선법이 두드러지게 표현된 곳은 간화선에 대한 태도이다. 그는 기타 선사들과 다른 점이 있는데, 그는 선(간화선)·정(淨)·교(敎)를 협치의 관계로 보았다. 이점을 그의 선법에서 중요한 특색이라고 하는데, 그가 지은 〈학도사잠(學道四箴)〉에 잘 나타나 있다. 그의 선학 사상을 중국불교학자인 황하년 선생은 네 가지로 분석했는데, 즉 선과 정토, 선과 교, 선과 율, 화두참구로 나누어서 설명하고 있다.
첫 번째는 선과 정토의 협치로, 파산 명해는 이 두 가지 모두 방편 법문이 된다고 여겼다. 즉 “대저 불조의 방편은 견고한 것이 많지만, 이것을 요약하면 두 종류를 벗어나지 않는데 곧 선(禪)과 불(佛)이다. 참선을 믿으면, 참선에 뜻을 세우고, 염불을 믿으면, 염불에 뜻을 세운다. 비록 돈점이 같지 않으나 곧 모두 하나의 생사심을 벗어나는 것이다”고 했다. 즉 이러한 관점을 근거로 본다면, 곧 참선과 염불은 근본적으로 같은 도리라는 것이다. 이 점은 송대 이후 선사들이 꾸준히 제기해온 바이며, 선종에서 강조하는 일심사상을 벗어난 것도 아니다. 그는 다시 강조하기를 “참선염불은 본래 하나의 도리이다. 염불을 염(念)하는 것도 이 마음이고, 참선을 참구하는 것도 이 마음이다. 마음 밖에 다른 법이 없고, 법 밖에 다른 마음이 없다. 오직 이 일심이며 다른 기로가 없다”고 했다. 여기서 참선은 화두참구하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으며, 그의 화두참구는 주로 염불하는 자가 누구인가에서, ‘수(誰)’자를 참구했으며, 동시에 이 화두를 가지고 후학을 제접하기도 했다.
두 번째는 선과 교의 협치로, 그는 이 두 가지의 법문이 서로 병존할 수 있다고 여겼다. 그는“참선과 교(敎) 두 가지의 법문은 심천(深淺)이 있다. 그러나 심(深)은 선이고, 천(淺)은 교이다. 다만 언어로 나타낸 것은 곧 추상분(?相分)이며 모두 교이다. 만약에 교의 요의(了義)를 통달하면 곧 선이고, 또한 여래선이다. 조사선은 아니다”고 하고 있다. 즉 선과 교는 심천(深淺)이 다를 뿐이며, 교의 요의(了義)를 요달하면 그게 바로 ‘선’이며 ‘여래선’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그의 관점은 시종 선을 우위에 두면서 선교일치 내지 협치를 말하고 있다.
세 번째는 선과 율의 일치로, 지계와 참선을 둘로 보지 않았다. 즉 지계본체 자체가 곧 ‘일심’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나누어질 수 있는 성질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가 말하기를 “부처님께서 바라제목차를 설했는데 이름이 십중(十重)이며, 48경이 이 계의 차등으로 대소승이 이것이다. 만약에 본(本)을 논하자면, 다 일심으로 돌아간다. 일심은 불생이며, 만법에는 허물이 없다. 계를 가지지 않는 것이 없고, 마음이 하나가 아닌 것이 없기 때문에 이것은 진원대계(廬圓大戒)의 총지(總持)이다.” 여기서 바라제목차는 범어의 음역인데 ‘계’를 말한다. 그는 ‘일심’이 계체(戒體)의 자체가 되기 때문에, ‘일심불생’이며 곧 지계를 구현하는 최고가 된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 관점은 육조 혜능의 무상계를 연상시키고 있으며 동시에 유사성도 존재한다.
네 번째는 화두 참구이다. 사실 위의 세 가지 일치사상의 관점은 모두 선사의 입장에서 선종을 더욱 드러내기 위한 태도이기도 하다. 그는 일생을 참선에 몸을 바쳤고 특히 “한 구의 화두로 도독고(塗毒鼓, 독을 칠한 북소리를 듣게 해서 죽게 만든다)를 친다”고 했다. 그는 간화선이 선법의 최고가 된다는 것을 믿어 의심하지 않았고, 누구보다도 열심히 간화선을 제창했다. 또 그의 화두관은 매우 독특했는데,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마주치는 일체의 사물들이 다 화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반드시 조사의 공안어구(公案語句)를 고집하고 준수할 필요는 없다고 하였다. 위에서 간단하게 소개한 내용을 종합해 보면, 그가 비록 제종의 통합을 발의해서 널리 선양했지만, 사실 이러한 행위는 이전의 고승대덕들도 이미 강조했던 내용들로서, 그리 특이한 점은 아니다. 다만 그는 이러한 형식을 취해서 더욱더 자기의 사상체계를 보충 보완하고 발휘한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파산 명해는 깨달음을 얻은 후에 전국을 행각하면서 당시의 영향력이 있는 고승대덕들을 친견해서 법을 구하기도 했다. 중국 선종에서 행각은 사방(四方)을 운요(雲遊)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전통의 시작을 〈조정사원(祖庭事苑)〉에서 “행각이라는 것은 고향을 멀리하고, 천하를 행각하면서, 정(情)을 벗어나고 묶여 있는 여러 가지를 버리는 것이며, 선지식과 스승을 심방(尋訪)해서 법을 구하고 증오(證悟)하는 것이다. 그래서 배움에는 일정한 스승이 없다는 것으로, 편력(뤝歷)을 숭상하는 것이다. 선재는 남쪽에서 청하고, 상제(常啼)보살이 동쪽에서 청한 것은 대개 선성(先聖)의 구법이 된다. 영가(永嘉)는 이른바 강해(江海)에서 헤엄을 치고, 산천을 돌아다니다가 스승을 찾고 도를 참구해서 참선을 했다. 어찌 삿되게 그렇지 않다고 하리요”라고 했는데, 행각의 의미는 위의 내용을 실천하는 것으로, 즉 운요수행(雲遊修行)을 가리킨다. 이 방식은 선종의 수행방법 가운데 하나로서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그도 깨달음을 얻은 후에 사방을 참학하면서, 한편으로 법을 구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본인의 선경(禪境)을 선지식들로부터 검증 받고 인가 받는 것을 목적에 두고 전국 각지를 행각했다.
기록에 의하면, 그가 이와 같은 행각을 통해서 운요수행을 할 때, 당시의 유명한 고승 대덕들을 참방하거나 가르침을 청해서 교류했다고 전해진다. 내용은 아래와 같다.
먼저 감산 덕청(벱山 德헌, 1546~1623)으로 주굉(?宏) 진가(廬可) 지욱(智旭)과 함께 명대 4대 고승 가운데 한 사람이다. 감산 덕청도 역시 선정(禪淨), 선교일치를 주장했던 선사로서, 생전에 여러 가지 방면에서 많은 저술을 하기도 했다. 특히 그중에서도 〈능엄경통의(楞嚴經通議) 〈관능가경기(觀楞伽經記)〉 〈법화경통의(法華經通義)〉 〈자술연보(自述年譜)〉 및 그가 입적한 후에 제자들이 편저(編著)한 〈감산노인몽유집(벱山老人夢遊集)〉등이 있다. 파산 명해는 〈능엄경〉의 묘명진심(妙明廬心)에 대해서 특별한 흥미를 가지고 때때로 익혀서 마침내는 마음이 익숙한 경지에 이르렀다. 그래서 그는 친히 강남의 여산(廬山) 아래의 법운사(法雲寺)에서 77세 고령의 감산 덕청을 참방하고 이것에 대한 가르침을 청했다.
다음은 조동종 계통의 무이 원래(無異 元來, 1575~1630)를 참방했는데, 무이 원래는 명대 조동종의 고승으로 당시 조동종의 유명한 고승인 무명 혜경(無明慧經, 1548~1618)으로부터 인가를 받았다. 무이 원래는 본래 조동종의 선사이지만, 역시 평생 선정불이(禪淨不二)의 종지를 제창하였다. 파산 명해가 26세 때 의기충천하고 패기가 넘치는 혈기 왕성한 시절에 중국 전역에서 명성을 떨치고 있었던 무이 원래를 참방하고 가르침을 청했다고 전해진다.
설교 원신(雪嶠 圓信, 1571~1647)은 임제종의 선사로서, 환유 정전(幻有 正傳, 549~1614)이 배출한 대덕으로, 그로부터 인가를 받고 선법을 계승했으며, 밀운 원오(密雲 圓悟) 천은 원수(天隱 圓修)와 더불어 이 세 사람은 각각의 지역에서 임제종을 중흥시킨 인물이며, 아울러 명 말 임제종의 유명한 종장들이다.
담연 원징(湛然 圓澄, 1561~1626)선사는 조동종의 운문 계통의 선사이다. 파산 명해는 그로부터 구족계를 받았으며, 항주의 보국선원(報國禪院)에서 담연 원징을 참방했다고 한다. 처음 만나 선문답을 통해 의기투합했으며, 몇 번의 기봉(機鋒, 날카로운 선어)을 주고받으면서 그는 담연 원징에게 매우 감복했다고 한다. 담연 원징은 파산 명해가 혜근(慧根)이 출중함을 알고 그의 법요(法要)를 전수해줄 뜻이 있었지만, 기연이 맞지 않아서 그로부터 인가는 받지 못했다고 한다.
密雲 圓悟(밀운 원오, 1566~1642)는 임제종의 선사로서, 환유 정전(幻有 正傳)의 제자이며 그로부터 인가를 받았다. 그 후 용지산(龍池山) 우문사(禹門寺)에서 선법을 전수하기 시작했고, 다시 강남 일대의 천태산 황벽산 천동산 등지에서 30여 년 교화를 했다. 기록에 의하면 제자가 3만은 넘었다고 한다. 비교적 유명한 제자로서 도민(道뤿)·도용(通容)·법장(法藏) 등을 꼽을 수가 있다. 파산 명해가 담연 원징으로부터 구족계를 받은 후에, 항주의 서산에 이르렀을 때 중병을 앓고, 막 병마를 벗어났을 때, 당시 밀운 원오는 막 절강에 있는 천영사(天寧寺)를 맡았다. 파산 명해는 이때 병색이 짙은 형상으로 그를 친견하였고, 그 후 대부분 시간을 밀운 원오 곁을 떠나지 않았고, 마침내 그에게서 인가를 받고 정식으로 ‘조계정맥’을 이은 임제정법의 선법을 전수할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되었다.
위의 내용을 통해서 볼 때 파산 명해선사는 어느 특정 종파에 구애받지도 얽매이지도 않으면서, 진정으로 구법을 위해서 제종파를 초월하는 실천수행을 했으며, 전국 각지를 유역하면서 평생토록 신심을 바쳐 마침내는 본인이 목적한 바를 달성했던, 그 시대를 대표하는 선종의 대 거장이었음을 알 수가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