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 깨침의 길 7
오래 전의 일이다. 어느 식당에서 점심 식사를 마치고 나오다 평소 알고 지내던 불자 한 분을 만났다. 나는 반가운 나머지 ‘안녕하세요, 보살님.’ 하고 인사를 드렸다. 순간 식당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그를 향하고 있었다. 무속인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내가 실수한 것도 아닌데 괜스레 미안한 마음이 일었다. 그러면서도 불교용어를 사용하는 데 남의 눈치를 봐야 되나 하는 생각에 화가 올라왔다. 무속인은 ‘보살’이란 용어를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사용금지 가처분 신청이라도 내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 용어에 담긴 의미가 너무 거룩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보살은 어떤 삶을 지향하는 것일까? 보살이 지향하는 길을 보살도(菩薩道)라 하는데, 발심(發心)과 원(願), 행(行)의 세 단계로 이루어져 있다. 먼저 발심은 글자 그대로 마음을 내는 것이다. 본래 발심은 발보리심(發菩提心)의 준말이다. 보리(菩提, bodhi) 즉 진리, 깨달음의 마음을 낸다는 뜻이다. 이는 불성이라는 씨앗을 땅에 심는 일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불교는 깨침을 목표로 하는 종교이기 때문에 이 마음을 내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그래서 발심이 되었는가 아닌가에 따라 출가와 가출을 구분하기도 한다.
발심이 되었으면 이를 구체적인 삶의 목표로 확립해야 하는데, 이것이 보살도의 두 번째 단계인 원(願)이다. 이는 보살로서 ‘이렇게 살겠다.’라는 굳은 다짐이다. 보살과 중생을 구분하는 기준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보살은 원으로 사는 사람(願生)이고 중생은 욕심으로 사는 사람(欲生)이다. 원에는 모든 보살에게 공통적으로 해당되는 총원(總願)과 각자의 특성과 여건에 맞는 별원(別願)이 있다. 대표적인 총원이 널리 알려진 사홍서원(四弘誓願), 즉 네 가지 큰 서원이다. 이는 중생을 모두 구원하겠다는 서원을 시작으로 번뇌를 끊고 법문을 배워서 마침내 불도를 이루겠다는 다짐으로 마무리된다. 여기에서 불교의 깨침과 닦음은 중생구제를 위한 길로써 의미를 가진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불교의 모든 의식이 사홍서원을 합송하면서 마치는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이러한 사홍서원은 현실적으로 모두가 실천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원이 커도 너무 크기 때문이다. 그래서 각자의 능력이나 여건에 맞는 서원이 요청되는데, 별원이 바로 그것이다. 예컨대 의사가 환자들을 ‘내 부모님을 모시는 마음으로 진료하겠다.’고 다짐한다면 매우 훌륭한 별원이 된다. 개인적으로 강의를 위해 집을 나설 때 ‘오늘은 조는 사람이 없도록 하겠다.’는 별원을 세우곤 한다. 항상 성공하는 것은 아니지만, 서원을 세울 때와 그렇지 않을 때의 결과는 분명 다르다.
아무리 서원이 간절하다고 해도 그것을 현실에서 이루기가 결코 만만치 않다. 그래서 필요한 일이 바로 수행이다. 마음을 내고 서원을 세웠다면, 이를 이루기 위한 구체적인 실천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이것이 보살도의 세 번째 단계인 행(行)이다. 이 단계가 다름 아닌 대승불교의 실천체계인 6바라밀이다. 보시(布施)와 지계(持戒), 인욕(忍辱), 정진(精進), 선정(禪定), 지혜(智慧)는 보살도를 완성하기 위한 수행이다. 이러한 실천을 통해 우리 모두 괴로움이 가득한 이곳(此岸)에서 괴로움이 멸한 저곳(彼岸)으로 도달한다(到)는 것이 대승의 이상이었다. 이것이 다름 아닌 바라밀로써 지혜의 완성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내용을 한마디로 정리한다면, 보살은 마음을 내어 모든 중생을 구원하겠다는 서원을 세우고 이를 이루기 위해 수행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보살은 발심과 원, 행이라는 세 가지 양식으로 살아가는 존재인 것이다. 앞에서 ‘보살’에 담긴 의미가 성스럽다고 한 이유도 바로 이러한 철학에 바탕을 두고 삶을 살기 때문이다.
이름에는 그에 부합하는 내용뿐만 아니라 준엄한 책임도 함께 따른다. 다른 이의 아픈 상처를 보듬는 것이 아니라 이를 이용해서 개인적인 욕심을 챙긴다면, 보살이라는 이름에 담긴 거룩한 의미를 크게 훼손하는 일이다.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보살이란 이름을 함부로 쓰고 있는 이들에게 묻고 싶다. 진정 보살의 길을 걷고 있는지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