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기수 김희로(상)
1968년 2월 일본 시즈오카현, 한 남자가 야쿠자 두목과 부하 1명을 총으로 쐈다. 그 남자는 재일교포 김희로 씨였다. 김 씨는 사람을 죽인 뒤 근방의 여관에서 투숙객들을 인질로 잡은 혐의로 인해 무기수가 됐다.
김 씨는 한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갖은 멸시와 모욕을 겪으며 다사다난한 삶을 살았다. 남들보다 깊은 반일감정을 품은 그는 ‘여관 인질극’으로 일본사회의 반향을 일으킨 인물이다.
조선인 출신이란 이유로
학교 중퇴, 이혼 겪어…
일본사회 만연한 차별
부당함 알리려 인질극
김 씨를 알게 된 건 TV에 생중계된 88시간의 인질극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때 나는 여관에서 일어난 재일교포의 인질극을 영화처럼 보고 있었다. ‘저 사람은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어 저러나’ 하며 막연한 생각을 할 뿐이었다.
김 씨와의 인연은 일본에 가게 된 후 이어졌다. 1983년 나는 처음 일본에 갈 일이 생겼다. 알고 지낸 일본인 스님과의 연으로 재일교포 수감자들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그 때 다시 김 씨 생각이 났다. 그동안 김 씨는 장장 7년간의 재판 끝에 무기형이 확정된 상태였다.
당시 김 씨에 대한 양국의 생각은 엇갈렸다. 한국인의 눈엔 야쿠자를 죽인 의인이지만, 일본인이 보는 김 씨는 악인 중의 악인이었다.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일본에서 영향력 있는 스님들에게 무기수 김 씨를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미결수에서 무기수가 된 그는 구마모토 형무소로 이감됐고 김 씨를 만날 가능성은 더욱 희박해졌다. 김 씨의 면회를 주선해달라고 부탁받은 스님마다 “그 김희로? 그런 요주의 흉악범은 아무나 만나기 힘들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그런 상황에서 김 씨를 만나는 건 사실상 불가능했다. 그러다가 김 씨 어머니 소식을 들었다. 날마다 면회를 했던 김 씨의 노모가 3년 전부터 오지 않는다는 이야기였다. 김 씨의 어머니는 중풍으로 쓰러진 뒤 홀로 요양원에서 지내고 있었다. 나는 김 씨의 노모가 너무 안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측은지심이 들어 돕고 싶었다.
나는 김 씨의 어머니가 있는 지역이 ‘가케가와’라는 것밖에 몰랐다. 통역을 해줄 사람과 무작정 가케가와로 갔다. 김 씨가 수감된 형무소와 멀리 떨어진 지역이었다. 주소는 물론이고 요양원 이름조차 모른 채로 길을 떠났다. 나는 몇 사람의 인연을 통해 겨우 김 씨의 어머니가 있는 요양원을 찾아갈 수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일본에서 살인죄로 잡혀간 무기수를, 심지어 면회도 하기 어려운 김 씨를 구명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렇게 나는 김 씨보다 그의 어머니를 먼저 만났다. 김 씨의 어머니 박득숙 씨는 팔순이 넘은 할머니였다. 휠체어에 몸을 의지한 박 씨를 만난 나는 애절한 모정에 이끌리고 말았다. 박 씨는 병세가 깊어 정신이 온전치 못했다. 하지만 자기 아들의 이름을 듣자마자 통곡했다. 박 씨는 내 장삼자락을 잡고 “아들이 나오는 것을 봐야 눈 감을 수 있다”면서 “스님이 좀 데리고 나와달라”고 빌었다. 명백한 중범인 김 씨를 석방시킬 방법은 없었다. 그 상황에서 나는 희로를 꼭 데리고 오겠다는,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헛소리 같은 약속 때문에 김희로에 묶인 셈이 됐다.
김 씨가 3살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는 폐지를 주워 팔며 생계를 꾸렸다. 1933년 어머니가 재혼하면서 의붓아버지의 성을 따 권 씨에서 성을 바꿔 ‘김희로’란 이름으로 불렸다. 김 씨는 재일조선인으로 극빈층의 삶을 살았다. 학창시절 김 씨는 의붓아버지의 구박과 소학교 동급생들의 차별을 겪으며 학교를 그만두었다. 그리고 13살 나이에 돈을 벌겠다며 집을 나갔다. 김 씨는 배가 고파 음식을 훔쳐 먹은 것을 시작으로 수차례 구치소를 드나들며 젊은 시절을 보냈다.
김 씨는 의붓아버지와 사이가 몹시 나빴다. 집을 떠난 것은 어머니가 의붓아버지 사이서 낳은 동생 셋과 가정을 일구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하지만 유년시절부터 ‘조센징’이라 손가락질 받으며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부당한 대우를 받았던 김 씨였다. 어머니에게는 지극한 효자였지만 집을 나간 뒤로 김 씨는 변변한 직업도 구하지 못한 채 건달의 삶을 살았다.
김 씨와 결혼한 일본인 아내는 그의 출신을 알고 자신을 속였다며 이혼을 요구했다. 김 씨는 조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차별이 만연한 일본 사회에 신물이 났다. 일본인에 대한 부당함과 삐뚤어진 마음은 날이 갈수록 커져갔다.
그런 그는 1968년 자신을 쫓던 야쿠자 둘을 죽이고 도망쳤다. 그리고 도주하다 맞닥뜨린 여관에 들어가 일본을 상대로 1인 전쟁을 선포했다. 이것이 바로 일본의 한인 차별에 항거한 재일교포 김 씨의 인질극 사건의 배경이다.
김 씨가 인질극을 벌인 모도가와네 온천 후미여관. 일본 경찰은 헬기를 띄우고 여관 건물 주변을 포위했다. 김 씨는 당시 벌떼같이 모여든 취재진을 향해 말했다.
“나는 민족차별의 피해자다. 가해자는 일본이다. 일본은 나를 ‘더러운 돼지 새끼’라고 불렀으며 조국을 욕되게 하고 멸시하는 언행을 일삼았다. 그들이 공식 석상에 나와 나에게 진심으로 참회하고 사과하지 않는다면 나는 인질들을 절대 풀어주지 않겠다. 여관 안으로 나를 잡으러 온다면 내 몸에 두른 이 폭탄으로 모든 것을 끝내겠다.”
협박이자 절규였다. 나중에 특별면회를 통해 김 씨를 만나 직접 들은 이야기에 따르면 김 씨는 애초부터 자결할 마음으로 인질들을 해칠 생각이 없었다. 실제로 김 씨는 인질들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결코 해치지 않겠다며 안심시켰다. 인질 가운데 한 명이 공무원 시험을 치르기 위해 잠시 빠져나갔다가 다시 돌아온 일도 있었다. 김 씨와 인질로 잡힌 이들 사이에 충분한 대화를 했고 신뢰하게 됐는지를 짐작하게 하는 부분이다.
대치상황이 길어지자 일본 경찰은 김 씨를 설득하기 위해 어머니 박 씨를 데려왔다. 마이크를 손에 쥔 박 씨는 김 씨에게 말했다.
“너는 한국인이다. 일본 경찰에 붙잡혀 모진 고문을 당하며 목숨을 잃는 모습은 이 어미가 보고 싶지 않다. 그러니 자결하라.”
어머니의 단호한 말을 들은 김 씨는 곧바로 자결할 마음을 먹었다. 하지만 김 씨는 88시간 만에 검거됐다. 기자로 위장한 경찰을 피하지 못했던 것이다.
한편 일본의 한국인 차별 철폐를 외치며 인질극을 벌인 이 사건은 영화 〈김의 전쟁〉으로 제작돼 더욱 알려졌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