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일: 2025-11-26 11:37 (수)

지금 말하는 것이 바로 그대 마음

 

알고 보면 마음은
너무 가깝게 있어서,
싱거울 정도로 맛이 없다.
중생들은 아무 맛이 없으니

▲ 사진 박구원

믿지를 못하는 것이다.

깨달음은 본래 없지만,
그래도 깨닫지 않으면
안 된다 하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의심이 한 덩어리가 되면
스스로 터져나가든
선지식에게 물었을 때
언하에 대오하든
기연이 일어나는 것이다.

 

깨달음은 수행을 빌려서 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지금의 자기 마음을 알면 자기의 본성을 보리니, 결코 달리 구하지 말라.

 

자기 성품을 보는 것은 수행을 가사하고 안 하고 관계없다. 본래 가지고 있는 성품을 스스로 확인하고, 그것을 믿어 헛된 노력을 내려놓을 줄 알면 된다. 하지만 사람들은 따로 뭔가 있을 것이라고 착각하여, 자꾸 찾아 나서는 분별망상의 병에 걸려있다. 알고 보면 마음은 너무 가깝게 있어서, 싱거울 정도로 맛이 없다. 중생들은 고추장이라도 발라서 매운 맛을 보고 싶어 하는데, 오히려 아무 맛이 없으니 믿지를 못하는 것이다.

 

어떻게 자기의 마음을 아는가?  지금 말하는 것이 바로 그대의 마음이다.

 

이 마음을 떠나서, 입을 열어 말할 수 있는 근거는 없다. 황벽 스님은 ‘지금 말하는 것’이 바로 인심이라고 직지해주고 있다. 당장 지금 여기에서 작용하는 ‘이 마음’이 곧 성품이지, 달리 다른 무언가가 있을 수가 없다. 하지만 여기서 바로 계합이 되어야지, 생각으로 이 말을 이해하려고 해서는 즉시 어긋나고 만다.

 

만약 말하지 않고 작용도 하지 않는다면, 마음의 본체는 허공과 같아서 모양도 없고 또한 방위와 처소도 없다.

 

한 법도 만들어지기 이전의 본래 마음은 모양도 없고 방위와 처소도 없지만, 인연 따라 온갖 작용을 베푼다. 상(相)놀음에 젖어있는 사람들은 ‘모양도 방소도 없는 것이 지금 말을 한다.’고 하면 알아듣기가 쉽지 않다. 그렇더라도 근본 마음 하나가 인연 따라서 이렇게도 펼쳐지고 저렇게도 펼쳐지고 있다는 사실을 믿고 들어가야 한다. 믿음이 성숙하면 계합되고, 계합되면 저절로 환히 드러나서, 불조의 모든 말이 다 소화가 된다. 그렇지 못하면, 무슨 말을 듣던 하나도 소화하기가 힘들다. 이런 조사 어록을 읽고 소화가 안 되면, 스스로 눈 뜬 장님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발심하여야 한다. 그저 목마른 사람이 물 찾듯 간절함을 더해가다 보면, 어느새 먹구름이 걷히고 모든 것이 환하게 드러난다. 그때는 조사의 말씀이 화살촉끼리 들어맞듯 내 마음에 흔연히 일치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저 한결같이 없는 것이 아니니, 있으면서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조사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참 성품이 마음땅[心地]에 감추어져 있으니

머리도 없고 꼬리도 없다.

인연에 응하여 사물을 드러내니

방편으로 일러 지혜라 부른다.’

이 게송은 서천 제26조 불여밀다(不如密多)의 전법계이다. 마음자리에는 본래 지혜도 없고 어리석음도 없다. 마음이라 하는 말도 억지로 붙인 말이지, 실제 마음을 어디서 찾을 수 있는가? 그 모습 없는 모습을 억지로 이름 붙여서 마음이라고 한 것이다.

한편 우리가 지금 인연 따라서 부처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그런 가르침 속에서 깨달음이라는 근거를 잡들여서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고 있는데, 자칫 이런 말과 이치를 배우고 이해하여 겉넘게 되는 것을 극히 경계해야 한다. 불법을 배워 조금 알게 되면 흔히, “행주좌와 어묵동정에 마음 아닌 것이 없다 하면서, ‘마음 깨달으라.’ 함은 또 무슨 말인가? 마음을 너도 가지고 쓰고 있고 나도 가지고 쓰고 있고, 깨달은 사람이나 깨닫지 못한 사람이나, 늙은이들이나 이제 세상에 갓 태어난 꼬마들이나 다 마음 가지고 쓰는 거지 다른 마음이 따로 있나? 이 마음이 그 마음이고 그 마음이 이 마음이지, 무슨 마음 또 깨달으라고 ‘깨달아라, 말라’ 하나? 다 허망한 소리 아닌가? 이것이 바로 마음이라면 그대로 알고 쓰면 그만이지.” 하면서 머리로 다 끝내버린다.

그렇지만 이런 사람은 알음알이로 시비를 하면서도, 뭔가 양심상 ‘아직 내가 마음을 깨닫지 못했잖느냐?’ 하는 찝찝한 게 딱 자리하고 있다. 머리로는 다 안 것 같아도, 가슴에서 흔쾌하지 않다면 틀림없이 견해의 장애 속에 있는 것이다. 아는 것이 오히려 깊은 병이 되어, 여우같이 자기 꾀에 속고 있는 것이다. 그럴 땐 선지식 앞에 나아가 지남을 받아서, 참다운 의심 속에 사무쳐 들어가야 한다. 그 의심이 익어 의정이 되고 의단이 되면, 시절인연 따라 묻고 대답하는 과정 속에서 탁 터지는 날이 온다. 그때는 “아! 큰일 날 뻔했구나. 내가 내말에 속아서 스스로 발등 찍는지도 모르고 내가 다 안다고 자만했구나. 늘 머리만 굴리며 이치에 나가떨어져서 실제를 모르고 있었으니까, 그래 가지고는 꿈엔들 깨달을 수 있었겠나? 깨달음은 본래 없는 것이지만, 그래도 깨닫지 않으면 안 된다 하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구나!”

모든 사람들이 자기 마음 가지고 쓰고 살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마음을 알고 쓰느냐 모르고 쓰느냐는 천지현격의 차이가 있다. 만일 이 마음을 모르고 있다면, 수행을 통해서 깨달음으로 전환할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한 부처님의 가르침이나, 또한 조사들이 시설해놓은 장치 속에 나아가 한바탕 정신의 벽을 뚫고 나와야 비로소 걸림 없이 이 마음을 자유자재로 쓰고 살아갈 수 있다. 그 전에는 늘 구름 낀 것처럼 안개 서린 것처럼, 갑갑한 것이 마음 한쪽 끝에 있었지만, 깨닫고 보면 구름이 끼나 안 끼나 그만 상관이 없어져 버리는 것이다. 허공은 구름이 끼고 안 끼고 상관없이 늘 텅 비어 있는 것처럼, 이 마음도 알고 보면 하루 종일 분주히 온갖 일을 하면서도 여여하고 부동하여 일한 바가 도무지 없는 것이다.

다만 모르는 그 일 하나를 의심하는 게 귀하다. 그 의심이 한 덩어리가 되면, 경우 따라 스스로 터져나가든지 선지식에게 물었을 때 언하에 대오한다든지 하는 기연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런 변화가 일어났을 땐, 지체 없이 명안종사를 찾아서 자세히 점검받고 다음 일을 기약해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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