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일: 2025-11-26 11:15 (수)

모든 왕들이 정법正法으로 다스린다면
그 땅은 안온하고 풍족하게 되리라.

〈금광명경〉

‘정치적’과 ‘정치’의 거리

▲ 그림 박구원
개인적인 이야기로 시작하는 것을 독자들은 양해해 주셨으면 좋겠다. 아이가 대학에 들어갈 때의 일이다. 입학원서에는 7지망까지 학과 이름을 써넣도록 되어 있었다. 제1지망에 대해서는 이미 합의가 이루어져 있었다. 영문학과. 그 다음 2지망 이하에 대해서는 의논하지 않았다.

그런데 아이에게서 메일이 왔다. 매우 조심스럽게 ‘정치학과’를 써놓아도 되는지, 아버지의 허락을 구하는 것이 아닌가. 〈홍길동전〉에서는, “아들은 아는 데에는 그 아비만한 사람이 없다”고 하였지만, 그도 아닌 것 같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1지망 후보였던 ‘문화사학과’가 당연히 2지망이 되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이는 ‘정치학’을, 2지망으로라도 선택한다는 데서 큰 부담을 느꼈음에 틀림없었다. 평소 아버지의 생각이 정치에 대해서는 매우 부정적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치를 좋아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탈(脫)정치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글들을 여러 편 쓴 것을 아이도 알고 있었다.

양해를 구하는 아이의 메일에 대해서, 나는 너무나 간단하고도 흔쾌하게 “좋다”는 답변을 보냈다. 어쩌면 이번에는 아이가 놀랐을지도 모른다. 평소의 태도와는 달리, 너무나 쉽게 동의를 했기 때문이다. 영문학과를 졸업한 아이는 지금은 정치학을 공부하고 있다.

이 사이에 있는 거리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정치적인 것을 싫어하는 것과 정치를 외면하는 것은 같은 차원일 수 없다. 실제 내가 비판했던 것은 ‘정치적인 것’이지, ‘정치’가 아니었다. 정치적인 것은 법(法)이 아니라 권력(人)을 의지하는 것으로 생각되었던 것이다.

그럼, 정치는? 외면하거나 무관심할 수 없다. 누구 말마따나 “중생의 번뇌 중 50%는 정치에서 온다”고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불교 역시 ‘정치적인 것’을 미워할 뿐, 정치에 무관심한 것은 아니다. 그 증거의 하나가 〈금광명경〉이다.

 

 

불교의 정치사상

정치는 세속의 일이다. 부처님의 깨달음은 세속의 일이 아니다. 그런데 정치이야기가 불교에서도 나온다. 그렇다면 불교의 정치이야기를 부처님의 깨달음에서 나온 것이라고만 볼 수 있을까? 아니면 그런 부분도 있겠지만, 그 안에는 불교 밖의 세속으로부터 들어간 것도 있다고 보아야 할까?

내 생각은 후자다. 세속적인 이야기가 들어간다. 깨달음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지만, 세속적인 이야기는 시간과 공간을 반영할 수밖에 없다. 이 시공간적 배경을 ‘맥락(컨텍스트)’이라 부른다.

우리가 경전을 읽을 때, 특히 세속적인 일에 대한 입장을 표명하는 경전을 읽을 때는 반드시 그 맥락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어떤 도그마나 고집에 빠지게 된다. 종교에서 근본주의자들이 많이 나오는 이유이다.

〈금광명경〉은 왕(정치지도자)이 이 경전을 읽으면서, 그 경전에서 설하는 진리(正法)으로 정치를 한다면 국내의 문제나 국제문제나 다 해결될 수 있다 말한다. 유토피아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맞는 말일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맥락은 불교가 국교도 아니고, 불교라는 종교만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세속의 정치는 민주주의나 (세속적) 법치주의와 같은 원리에 의해서 움직여진다. 그러므로 〈금광명경〉의 정치사상에 대해서도 현실의 맥락을 고려하는 재해석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럴 때 비로소 ‘불교의 정치사상’이 탄생되리라.

과연, 불교는 지금의 민주주의나 법치주의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정치에 무엇을 줄 수 있을 것인가? 그 한계나 부족한 부분을 불교가 채워줄 때, 또한 그러한 불교의 정치사상 역시 감안되면서 정치가 행해질 때 “그 땅은 안온하고 풍족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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