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수경〉
왜 ‘조상탓’을 할까?

참회를 하고 용서를 비는 것은 대단히,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왜 그렇게 어려운 일일까? 이 점을 우리는 이해해야 한다.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참회를 한다는 것은 자기를 부정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부정(否定)한다는 것은, 자기를 죽이는 일에 다름 아니다. 죽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까? 잘못된 행위를 했을 때의 ‘자기’를 한번 죽여야 한다. 그렇게 해야, 다시 비로소 새롭게 태어날 수 있다. 그것이 참회이다.
그런데 그것이 어렵다. 자기를 부정하고, 자기를 죽이는 것이 어렵기 때문이다.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은, 그만큼 그가 수행이 깊고 투철함을 말하는 것으로 평가해서 좋을 것이다. 에고(ego), 아만, 자부심, 프라이드(pride)가 높은 사람들은 더욱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비는 참회를 할 수 없다.
그럼 어떻게 할까? 그 대신에 ‘조상탓’을 하게 된다. 돌아가신 조상탓을 하든, 살아있는 부모 탓을 하든…. 남의 탓을 하면 된다. 이것은 내가 잘못한 것이 아니다. 책임을 남에게 돌린다.
그런 반면에 참회를 할 수 있다는 것은, 그 순간에 자기를 한번 죽이는 일이 된다. 이렇게 자기를 죽임으로써, 우리는 무아(無我)가 된다. 무아의 존재가 부처님 아닌가. 그러므로 참회를 통해서, 우리는 부처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수행자라면 언제나 스스로의 잘못을 명백히 인정할 수 있는 겸허함과 용기, 그리고 하심(下心)하는 자세를 갖추어야 할 것이다. 과연 나 스스로는 수행자일까, 아닐까? 그것을 판가름하는 하나의 기준이 바로 이것이다. ‘조상탓’을 하는가, 아닌가?
공(公)과 사(私)
다시 물어보자. 왜 우리는 자기부정을 해야 하는가? 왜 그것이 부처가 되는 길이라는 말일까? 이 물음의 배경에는, 불교라는 종교가 갖는 커다란 성격 하나가 놓여있다.
자기를 버리고 따라야 할 공도(公道)가 있다. 이런 전제를 불교는 하고 있다. 그 공적인 길을, 불교에서는 법(dharma, dhamma)이라 한다. 이 법은 중생들인 우리만이 따라야 할 것은 아니다. 부처님마저 복종하지 않을 수 없다.
<아함경>에서, 부처님은 이 법에 대해서 분명하게 말씀하시고 있지 않던가. “이 진리는 여래가 이 세상에 출현하든지 안 하든지 무관하게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부처님 출현 전에도 그 진리는 존재하였고, 부처님이 안 계시더라도 그 진리는 존재한다는 것이다. 가령 불교가 완전히 이 세상에서 자취를 감춘다 해도, 그 진리는 존재한다.
그런 법을 부처님께서는 밝게 아시고 밝게 깨치시고서 부처님이 되신 것이다. 그리고 그 길을 우리에게 일러주신 것이다. 그 진리에 비추어 본다면, 무엇이 잘못인지를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이야말로 시비가 분명하신 분이다. 너무나 시비가 분명하기에 시비가 없다.
그런 반면에 우리는, 나 밖에 존재하는 공도를 알지 못하기에 시비가 많다. 시비에 밝지 못하고서 시비를 하는 것이다. 이것은 나의 잘못이 아니라, 너의 잘못이다. 이런 식으로 말이다.
내가 가끔 “불교는 자비의 가르침이 아니다. 무자비의 가르침이다.”라고 말하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이다. 무자비는 이 공도의 무자비성을 말하는 것이다. 공도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불교를 자비의 가르침인 줄로만 안다.
그래서 자비라는 이름으로, 실제로는 공도를 사도(私道)로 만들려 한다. 참회를 통해서 부정해야 할 자기를, 공도 속에 섞으려 한다. 그것은 법을 오염시키는 행위에 다름 아님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자기를 부정하는 일, 참회가 그만큼 어려워서 생기는 일들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