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일: 2025-11-26 11:15 (수)

조작됨 없는 마음서 자비심이 일어나네

〈천수경〉

사트바(sattva)로 가는 길

▲ 그림 박구원
힌두교의 성전으로 〈바가바드기타(Bhagavadg?t?)〉라는 책이 있다. 줄여서 ‘기타’라고 부르는, 이 책에 대해서 처음으로 논문을 발표한 것이 1992년의 일이었다. 그 사이 오늘날까지 읽고 또 읽고, 강의하고 또 강의하고, 쓰고 또 쓰고 있다.

불교경전도 아닌 책을, 그렇게까지 빠져서 읽고 쓰고 할 것이 무엇이 있을까? 처음 이끌리게 된 것은, 이 책에 ‘행위의 길(까르마 요가)’이라는 중요한 개념이 나오기 때문이다. 나는 젊어서부터 기본적으로 ‘행위주의자’였다. 그래서 윤리적인 행위의 문제, 실천의 문제를 주로 생각해 오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기타〉에서도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불교에서 말하는 윤리적인 행위의 문제를 힌두교의 성전인 〈기타〉에서의 그것과 함께 생각해 보는 것도 가능하지 않겠는가, 라고 생각한 것이다.

지금 일본의 한 시골에서, 말하자면 폐관(閉關) 비슷한 생활을 하고 있다. 한국에서 떠나올 때의 짐 속에는 이 <기타> 관련 책들만이 있었다.

지난 5개월 동안, 다시 처음부터 정독을 해오고 있다. 거의 다 읽어가는 데, 새롭게 느끼는 것은, 후반으로 오면 올수록 세가지 속성에 대한 이야기가 많다는 것이다. <기타>에서는 사트바, 라자스, 그리고 타마스라는 개념으로 여러 가지를 평가하는 기준으로 삼는다.

사트바는 순수함, 라자스는 격정, 그리고 타마스는 어둠으로 상징된다. 예를 들면, 제사나 고행이나 보시 등의 행위 역시 이러한 세가지 차원으로 평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을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라자스적인 행위나 타마스적인 행위는 피해야 하고, 순수한 사트바적인 행위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트바, 라는 말은 불교에서는 ‘중생’이라는 말이지만 지금 이 맥락에서는 순수, 적정, 청정, 평화 등과 같은 의미를 담고 있는 말이다.

 

사트바에서 나온 행위

〈기타〉를 말하기 시작할 그 무렵부터, 나는 〈천수경〉 역시 말해오고 있다. 〈천수경〉은, 여러모로 〈기타〉와 비슷한 텍스트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 중에 하나는 ‘사트바’로부터 나오는 행위를 찬탄하고 있다는 점이다. 다만 〈천수경〉에서는 사트바적인 마음을 ‘무위심(無爲心)’이라 말하고 있을 뿐이다.

헐떡거리면서, 무엇인가 끊임없이 조작해야 하고, 작위적인 행동을 충동적으로 저지르는 행위는 ‘라자스(rajas)’적인 것이라 말한다. 또 행위를 하기는 하되 언제나 그릇된 방향으로, 잘못된 생각에 근거해서 행해지는 것은 ‘타마스(tamas)’적이라 말해진다.

라자스와는 반대로 사트바는 적정하며, 차분하고, 고요하다. 또 타마스와는 반대로 사트바는 밝고, 명랑하며, 쾌활하다. 사트바는 그런 개념이다.

이번에 〈기타〉를 정독하면서, 나는 새삼 깨닫게 되었다. 수행이라는 것도, 결국은 라자스적이고 타마스적인 데에서 사트바적인 곳으로 돌아가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지 않을까.

사트바적인 마음, 즉 불교에서 말하는 무위심이 되지 않는다면 그로부터 일어나는 행위 역시 자비로운 행위가 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사트바적인 행위가 되려면, 역시 사트바적인 마음이 되어야 한다. 그것 밖에 수행이 없다.

물론, 깊이 더 따지고 들어가면 힌두교에서 말하는 사트바적인 마음과 불교에서 말하는 무위심이 완전히 같은가 아닌가 하는 점을 생각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여기서는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 기본적인 사고방식 자체가 같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으로 충분하리라.

이제 나는 좀더 사트바적인 마음으로 돌아가서 사트바적인 삶을 살고 싶다. 무위심으로 돌아가서, 자비를 실천하는 그런 삶을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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