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일: 2025-11-26 11:37 (수)

단순한 것이 답이다

[906호 9월 19일]

 학승이 질문했다.
“질문이 없을 때는 어떠합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상어(常語)가 어그러진 거야.”

問 無問時如何 師云 乖常語

선사들의 대답은 늘 평범하고 맞는 말이다. 상어(常語)는 평상시 대담이다. 상어가 어그러졌다는 것은 대담이 깨졌다는 것이다. 말없이 앉아있을 때, 상어 쪽에서 보면 대담이 깨진 것이다. 그것일 뿐이다. 그 외에 더 이상 다른 것을 찾지 말라. 단순한 것이 답이다. 동시에 옳은 답이다. 선은 있는 그대로 말한다. 더 이상 나가면 도의 담백함을 잃는다.

학승이 물었다.
“사방의 산이 마구 다가올 때는 어떻습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도망갈 길이 없다.”

問 四山相逼時如何 師云 無出跡

지진이 일어나 사방이 무너질 때 어디로 도망치면 좋을까? 일방이 아닌 사방에서 무너지고 있다면 도망할 방법이 없다. 이것이 정답이다. 그때 더 이상 출로를 찾으면 가슴이 답답하고 머리가 어지러워진다. 사방의 산이 다가올 때는 아무도 피하지 못했다. 석가도, 소크라테스도, 공자도, 예수도, 신도 어쩌지 못했다. 포기해야한다. 죽음을 받아들일 때, 죽은 순간까지 그대는 편안할 것이다.

학승이 질문했다.
“그 속에 대하여 말해도 얻지 못할 때는 어떠합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말할 수 없어.”
학승이 물었다.
“무엇이 도(道)입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말해도 얻지 못한다.”

問 到者裡道不得時如何 師云 不得道 云如何道 師云 道不得處

도에 대해 묻는가? 말로써 얻어지는 것이라면 어찌 도라 하겠는가? 행동으로 도를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행동으로 도가 설명되는 것이라면 어찌 일찍이 도는 형체가 없다고 했겠는가? 할[喝]로서 도를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임제 스님 아래에 깨달은 자들이 수없이 나와야할 것이다. 방(榜)으로 도를 알 수 있다고 하겠는가? 그렇다면 덕산 스님이 암두 스님의 소곤거림에 귀가 먹지 않았을 것이다. 천하의 납자들이여! 이때를 당하여 뭐라고 한마디 하겠는가? 이 질문에 마음이 편안해진다면 불조의 자식이지만 아직도 마음이 답답하다면 아직 문밖의 손님이다.

학승이 물었다.
“모든 언어는 정수리를 벗어나지 못한다고 합니다만 어떤 것이 정수리 바깥의 일입니까?”
스님은 사미 문원을 불렀다. 문원이 대답하자,
“오늘 이른가, 늦었는가? (산보 갈 시간이)”

問 但有言句盡不出頂 如何是頂外事 師喚沙彌文遠 文遠應諾 師云 今日早晩也

손자는 전쟁을 함에 5사(五事)를 잘 갖추어야 실패가 없다고 했다. 5사는 도ㆍ천지ㆍ인ㆍ상(道天地人償)이다. 5사 중에 첫 번째가 도(道)다. 도는 천지간에 가득 찬 기운이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도에 어긋나면 대의명분을 잃으므로 백성이 외면한다. 백성이 외면하면 그 전쟁은 지고 만다. 세속의 이치를 탐구한 병법가도 하물며 도를 최고 높은 곳에 놓고 전쟁을 치렀는데 진실을 찾는 구도자가 어찌 삶의 정수리가 되는 도를 논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정수리 바깥의 일은 도대체 무엇인가? 공부하다 엉뚱한 짓하는 것이다.

학승이 물었다.
“무엇이 비로자나불의 스승입니까?”
조주 스님이 말했다.
“악한 말 하지 말게.”

問 如何是毗盧師 師云 莫惡口

그 분이 계신 곳은 아주 고운 모래로 아름다운 정원을 만들어 놓았다. 누가 조심스럽게 다가가도 발자국이 남으므로 금방 알아채고 다른 곳으로 가버린다. 그렇기 때문에 그곳에 대하여 입만 벙긋해도 죄를 범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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