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일: 2025-11-26 11:37 (수)

마한은 어디에 있었고 주체는 누구였을까 ?

고조선 정체성은 마한에서 고구려족으로

한(韓)의 위치 여전히 논란

일연, 고구려 영토 연관 주장

구맥·구이, 고조선 유민 지칭

아홉 곳 위치 대체적 유사

삼한, 요서에서 요동으로 이주분열 이후 삼한 독립적 국가 운영

1. 마한의 위치와 주체한국고대사에서 한(韓)의 위치 비정에 대해서는 아직 논란이 남아 있다. 고조선 이후 ‘한후’(韓候)로 명명된 기준(箕準)왕이 세운 한씨(韓氏)조선과 한(韓)은 분명히 다른 민족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일부 국사학자들은 기준(箕準)이 세운 한씨조선과 한(韓)민족을 동일시하려는 이들이 있다. 일연의 〈삼국유사〉 찬술(1281) 직후 같은 충렬왕 때에 간행된 이승휴의 〈제왕운기〉에 의하면 한반도와 만주지역에는 한(三韓)ㆍ부여ㆍ비류ㆍ신라ㆍ고구려ㆍ남옥저ㆍ북옥저ㆍ예ㆍ맥 등의 나라가 있었다고 한다. 이승휴는 〈제왕운기〉의 ‘전조선기(前朝鮮記)’에서 이들 나라 모두를 고조선의 통치지역으로 비정하고 있다. 그리고 〈제왕운기〉의 ‘한사군급열국기(漢四郡及列國記)’에서는 이 나라들을 모두 단군(壇君, 〈삼국유사〉)의 후손으로 적고 있다.이승휴의 주장은 〈시경〉(詩經) ‘한혁(韓奕)’편과 동한시대의 왕부(王符)의 〈잠부론〉(潛夫論)에 나오는 ‘한후’(韓侯)와 ‘한(韓)의 성’(城)에 대한 기록에 의해 좀 더 분명해진다. 특히 왕부는 “옛날 (서)주의 선왕(宣王) 때에 또한 한후(韓侯)가 있었으니 그 나라는 연(燕)나라에서 가까웠다”고 한 뒤 “그 뒤 서쪽에서도 또한 성(姓)을 한(韓)이라 하였는데 위만(衛滿)에게 공벌(攻伐)당하게 되어 해중으로 옮겨가 살았다”고 했다. 왕부는 서주 왕실과 동성인 ‘희성’(姬姓)으로서 한(韓)나라 제후였던 환숙(桓叔)의 후손(韓씨ㆍ言씨ㆍ?씨ㆍ禍餘씨ㆍ公族씨ㆍ張씨 등)이었던 한씨(韓氏)와 다른 또 하나의 한후(韓侯)가 있었는데 그 나라는 연(燕)나라와 가까웠다는 것이다. 환숙의 후손이었던 한(韓)은 지금의 섬서성(陝西省)에 있었던 서주의 제후국이었으며 그 군주 역시 한후(韓侯)였다. 때문에 〈시경〉 ‘한후’편의 한후는 연(燕)나라와 가까이 있었던 기준(箕準)왕이 분명하다고 할 수 있다.당시 연나라는 지금의 천진(天津)시와 접해있는 발해만(渤海灣)으로부터 동쪽에 자리한 갈석산(碣石山) 사이에 걸쳐 있었다. 이렇게 본다면 한씨조선은 기자의 후손인 기준왕이 위만(衛滿)에 밀려 무리 수천을 거느리고 도망하여 바다(가)로 들어가 한(韓)의 땅에 거주하면서 스스로 한왕(韓王)이라 일컬었던 곳으로 짐작된다. 그리고 한후(韓侯)의 나라는 중국의 동북쪽에 자리한 지금의 북경 가까이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연나라 군사들은 연나라 국경선 가까이 있는 한후의 나라 사이에 연장성(燕長城)을 쌓았고, 이 성을 〈시경〉 ‘한혁’편에서는 ‘한의 성’(韓城)이라고 불렀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기준왕이 다스렸던 기자조선의 후신인 한씨조선은 고조선 서쪽 변경인 난하(?河) 유역에 있었으며 지금의 요서지역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왕부가 말하는 한후의 나라는 기자조선 이전부터 그 동쪽에 있었던 고조선이었다. 때문에 여기서 한후(韓侯)는 고조선의 최고 통치자인 단군(壇君)을 가리키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한(韓, 三韓)은 바로 단군조선이 해체된 이후 그 후예들에 의해서 다스려진 나라였다.한(韓)은 이후에 마한과 진한과 변한으로 나뉘어졌다. 삼한은 한반도 바깥 만주지역의 요서와 요동 지역에 있었다. 고조선이 해체된 뒤 그 후예들은 부여와 고구려 및 진국(辰國) 등으로 흩어져 살았다. 진국은 〈후한서〉 ‘동이열전’ 〈한전〉에서 보이는 것처럼 지금의 요동(遼東)지역에 자리해 있었다. 〈위략〉에서 위만조선의 우거왕 때 “조선상(朝鮮相) 역계경(歷谿卿)이 우거(右渠)에게 간하였으나 받아들이지 않으므로 동쪽의 진국(辰國)으로 갔다”고 적은 것처럼 서쪽 난하(?河) 유역에 있었던 위만조선에서 볼 때 진국은 동쪽에 자리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진국 사람들은 한(韓)의 지배층이 되어 고조선으로부터 내려온 앞선 문명을 한인(韓人)들에게 계승시켰다. 최치원의 지적처럼 마한이 고구려라면 고조선의 해체 이후 그 유민들이 진국을 거쳐 한(韓)으로 이어졌음이 분명하다. 동시에 마한은 고구려의 무대였던 요동지역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일연(一然) 역시 마한을 “지금 사람들이 혹시 (익산 지역의) 금마산으로 인해 백제라고 한 것은 대개 잘못된 것이다. 고구려에 본래 마읍산(馬邑山)이 있었으므로 마한이라 이름 지은 것이다”라고 했다. 그리고 북부여에서 갈려나와 졸본부여를 거쳐 고구려를 세운 동명왕은 당시에 마한을 아우르며 새롭게 도약을 시작했다.2. 동이의 여러 나라‘동이’(東夷)란 명칭은 중국 고대의 화이론(華夷論)에 의거해서 부르는 명칭이다. 그러나 이 표현은 예로부터 우리 민족의 특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夷)란 활을 잘 쏘는 주몽(朱蒙)이란 뜻 이외에도 ‘군자’(君子)라는 의미도 담겨 있다. 그런데 이(夷)에는 동이(東夷)ㆍ서융(西戎)ㆍ남만(南蠻)ㆍ북적(北狄)을 통칭하는 사이(四夷), 〈후한서〉의 견이(?夷)ㆍ어이(於夷)ㆍ방이(方夷)황이(黃夷)ㆍ백이(白夷)ㆍ적이(赤夷)ㆍ현이(玄夷)ㆍ풍이(風夷)ㆍ양이(陽夷)의 구이(九夷), ‘이아’(爾雅)「이순」(李巡)의 현토(玄?)ㆍ낙랑(樂浪)ㆍ고려(高麗)ㆍ만식(滿飾)ㆍ부유(鳧臾)ㆍ색가(索家)ㆍ동도(東屠)ㆍ왜인(倭人)ㆍ천비(天鄙)의 구이(九夷)가 있다. 또 구한(九韓)과 예맥(濊貊) 뿐만 아니라 “〈주례〉(周禮)에서 직방씨(職方氏)가 사이와 구맥(九貊)을 관장했는데 구맥은 동이의 종족이니 구이를 일컫는 말이다”고 한 것처럼 구맥도 있다. 여기서 아홉 개의 한(韓)이나 아홉 개의 맥(貊)은 모두 고조선 해체 이후 흩어져 살았던 유민들과 그 거수국의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한나라 회남왕 유안(劉安)이 지은 〈회남자〉(淮南子, 21권)의 주석에는 동방의 이(夷)는 아홉 종이나 된다고 했다. 위나라 하안(何晏)이 지은 〈논어정의〉(論語精義)에는 구이를 현토, 낙랑, 고려, 만식, 부유(鳧臾, 夫餘), 소가(素家), 동도, 왜인, 천비(天鄙)라 했다. 또 신라의 고승이었던 안홍(安弘)이 찬술한 〈동도성립기〉(東都成立記, 海東安弘記〉)에는 구한을 일본, 중화(中華), 오월(吳越), 탁라(羅, 耽羅), 응유(鷹遊), 말갈(靺鞨), 단국(丹國), 여진(女眞), 예맥이라 했다. 여러 기록들을 검토해 보면 시대에 따라 표기가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아홉 곳이 자리했던 그 지역을 살펴보면 각 나라의 비정이 조금만 다를 뿐 대체적으로 같다. 그렇다면 이들은 고조선이 해체된 이후 유민들이 그곳으로 이주해 가서 지배했던 나라들이거나 고조선의 거수국들을 총칭하는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동이의 여러 나라들은 고조선의 앞선 문명을 흡수하면서 살아왔다. 고조선의 지배자인 단군(壇君)을 한후(韓侯)라고 한 것은 중국이 만리장성 바깥의 만주 전역과 한반도를 ‘조선’이라고 일컬은 것과 상통한다. 이 지역에서는 통치자를 한(汗, Han) 혹은 칸(干, Khan, 可汗, Kahan)이라고 불렀고 이것을 한자로 적은 표기가 한(韓)이다. 단군은 고조선의 통치자이다. 그런데 우리는 ‘단군’의 표기가 ‘단군’(壇君, 〈삼국유사〉)과 ‘단군’(檀君, 〈제왕운기〉) 두 가지임을 통해 이 명칭이 한자에서 온 것이 아니라 한민족의 순수한 토착어였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단군’은 비슷한 소리의 한자로 표기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처럼 그는 하늘을 받드는 천군(天君)이자 종교의 최고 지도자였다. 해서 단군은 중국의 천자(天子)와 같이 종교적 의미를 지닌 칭호였다. 이로 미루어보아 고조선에서도 통치자를 ‘한’이라 불렀을 것이다. ‘단군’이 종교적 지도자다면, ‘한’이 정치적 지배자를 일컫는 칭호였다. 종교가 정치보다 우위에 있었던 고대사회였던 점을 감안하면 고조선에서는 ‘단군’이란 호칭이 ‘한’이라는 호칭보다 더 권위를 지녔을 것이다. 이 때문에 고조선 내에서는 ‘한’보다는 ‘단군’이라고 불렀을 것으로 이해된다. 고조선의 ‘단군’은 중국의 천자에 대응하는 호칭이었다. 반면 ‘한’(韓)은 왕 또는 황제에 대응하는 호칭이었다. 때문에 고조선 해체 이후 그 유민들에 의해 통치되거나 거수국에서 독립한 ‘한’(韓)은 ‘단군’조선과 긴밀한 관계 속에서 한민족의 동질감을 만들어 나갔을 것으로 짐작된다. 3. 삼한과 원삼국고조선 해체 이후 그 거수국이었던 한(韓)은 고조선의 단군들에 의해 한동안 지배를 받았을 것이다. 한(韓)은 기자조선을 밀어낸 위만조선과 그를 밀어낸 한사군과 충돌하면서 점차 요서지역에서 요동지역으로 이주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때문에 한(韓)은 부여족ㆍ고구려족ㆍ예족ㆍ맥족 등과 경쟁하면서 고조선 이래의 한민족의 정통성을 견지해 갔을 것으로 짐작된다. 하지만 한은 마한과 진한과 변한의 삼한으로 갈려나갔다. 이후 삼한은 제 각기 독립적으로 국가를 경영해 나갔다. 그 중에서도 요서와 요동을 넘나들며 고조선의 정체성을 이어갔던 마한은 고구려족으로 이어지면서 주도적인 역할을 해 갔다. 〈통전〉에는 “조선의 유민이 70여 국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모두 지방이 100리였다”고 했다. 또 일연은 “백제 온조왕의 말에는 동쪽에 낙랑이 있고, 북쪽에 말갈이 있다고 했는데, 이 말은 아마 예전 한나라 때의 낙랑군 속현(屬縣)의 땅일 것이다”고 했다. 이 때의 낙랑은 난하(?河) 이동의 요서지역에 설치되었던 낙랑이지만 문맥상으로 보면 일연은 평양 주위로 보고 있는 듯하다.최치원은 “마한은 고구려고 진한은 신라”라고 했다. 그리고 “변한은 백제”라고 했다. 그런데 〈후한서〉에는 “변한은 남쪽에 있고, 마한은 서쪽에 있고, 진한은 동쪽에 있었다”고 했다. 반면 송나라 구양수(歐陽脩)와 송기(宋祁) 등이 기술한 〈신당서〉와 후한 유구(劉?) 등이 지은 〈구당서〉에는 “변한의 후손들이 낙랑땅에 있었다”고 했다. 이에 대해 일연은 “〈당서〉에 변한의 후손들이 낙랑땅에 있었다고 함은 온조왕의 계통이 동명왕으로부터 나온 까닭으로 그렇게 말했을 뿐이다. 혹 어떤 사람이 낙랑 출신으로서 변한에 나라를 세우고, 마한 등과 서로 대치한 일이 온조왕의 전에 있었던 것 같고, 도읍이 낙랑땅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고 했다. 그렇다면 마한은 한반도 안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요서와 요동에 걸친 만주의 서쪽에 있었고, 그 동쪽에는 진한인 신라가, 그리고 그 남쪽에는 변한인 백제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두루 알다시피 고조선의 해체 이후 부여와 고구려와 한(韓) 그리고 예와 맥 등은 진번ㆍ임둔ㆍ낙랑ㆍ현토의 한사군과 대립하면서 한민족의 정체성을 지켜왔다. 이 정체성은 중국과 변별되는 지리적ㆍ문화적ㆍ정신적 배경 위에서 형성된 것이었다. 때문에 본연적이든 기질적이든 한민족의 문명은 중국 문명과는 그 기원이 다른 것이었다. 그런데 한반도 대동강 유역에는 최리왕(崔理王)이 다스렸던 낙랑국(樂浪國)이 있었다. 이것은 종래 한사군의 낙랑군과 다른 나라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낙랑국을 서한의 낙랑군과 혼동하여 많은 오해가 있었다. 하지만 이 지역에서 발굴된 유적과 유물들의 조성연대가 한사군이 설치되었던 서한(西漢)시대가 아니라 동한(東漢)시대 이후로 밝혀졌다. 일본인들은 이 지역을 난하(?河) 지역에 있었던 한사군의 낙랑군과 동일시하려고 했지만 발굴된 유적들은 그것과 다른 대동강 유역에 자리했던 ‘최리왕의 낙랑국’ 유물이었다. 때문에 많은 오류와 의문점에도 불구하고 일본인들은 한사군의 낙랑군에 견강부회하여 자신들의 논의를 정당화하려고 하였다.고조선 이후에 그 유민들이 그 거수국이었던 한(韓)으로 흘러들었던 무대가 어디였는지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 합의를 보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중국의 사서들이 비정하고 있는 위치를 무시해서는 안될 것이다. 문제는 중국의 사서들이 어느 쪽을 기준으로 방위를 잡고 있느냐에 있다. 마한을 서쪽에 있다고 할 때 어느 지점을 기준으로 해서 서쪽인지 궁금하다. 중국인들의 관점에서 볼 때 서쪽일까? 혹은 한국인들의 관점에서 볼 때 서쪽일까? 아니면 고려의 선사였던 일연의 관점에서 볼 때 서쪽일까? 아직 합의하지 못한 여러 점들을 고려하여 미술사학자 김원룡은 고조선 해체 이후 신고백(新高百) 삼국의 건국 사이를 잠정적으로 ‘원삼국’(原三國)시대로 구분 비정했고 그의 학설을 채택한 국립중앙박물관에는 ‘원삼국실’까지 마련돼 있다.

참고문헌이홍직, 〈증보새국사사전〉(백만사, 1937; 교학사, 1997)이재호 역주, 〈삼국유사〉(솔, 1997)윤내현, 〈고조선연구〉(일지사, 1994;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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