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일: 2025-11-26 11:15 (수)

바람 멈춘 곳에 바람이 넘치는 도리를 아는가?

세상을 편하게 하는 파계사- 부도밭 기행 65

▲ 산책을 하다가 부도를 향해 예를 표하는 파계사 조실 도원 스님

영원스님 기도로 탄생한 영조의 ‘불공원당’
어의 발원문 등 발견되어 설화내용 입증돼

종수 고송 스님 부도와 비 웅장하게 조성
선정과 지계에 간절했던 수행의 모범 전해

숙종 계유년(1693) 시월 초닷새 밤에 임금께서 예스럽고 소박하게 생긴 스님 한 분이 대궐로 들어오다가 이내 자취를 감추는 꿈을 꾸었다. 그로부터 사흘 뒤 상서로운 빛이 대궐의 안을 비추자 사람을 시켜 빛이 솟아나는 곳을 찾아보도록 하였다. 그 자가 남대문에 이르니 본사(파계사)의 도승(道僧) 영원(靈源) 스님이 관서 지방을 두루 거쳐 한양의 여각에 머물고 있었다. 임금께서 스님을 불러 놓고 손을 잡으며 기뻐하시더니 수락산으로 보내어 칠성님께 백일기도를 드리도록 하였다. 이듬해인 갑술년(1694)에 원자가 탄생하였다. 을해년(1695) 스님이 돌아 올 때 ‘현응(玄應)’이라는 호를 내리고 두터운 예우로 전송하면서 내탕금을 주었다. 이것으로 칠성전과 백화루를 지으니 칠성전이 곧 자응전(慈應殿)이다.

1936년에 파계사에 세워진 ‘팔공산파계사사적비’의 일부입니다. 칠성전과 백화루를 지은 사연을 적었지만, 많은 일들이 담겨 있습니다. 조선 중기 파계사의 중창주인 영원 스님과 숙종의 만남, 뒷날 왕이 되어 조선왕조에서 최장수 재임을 하는 영조와 파계사에 대한 이야기가 압축되어 있습니다.
대개의 설화나 민담이 그렇듯 이 이야기도 자료나 구전 내용이 지역마다 차이를 보입니다. 수락산 내원암이나 삼각산 금선사 관련 설화에서는 영원 스님이 ‘용파 스님’으로 전해지는데 ‘파계사 스님’이라는 것은 같습니다. 또 파계사 구전에서는 영원스님이 당시 사찰에 대한 지방 양반들의 횡포와 각종 세금과 노역에 시달리는 것을 상소하기 위해 한양으로 올라간 것으로 전해집니다. 즉 영원 스님은 머리를 기르고 속복을 입고 도성으로 올라가 물장수를 하며 때를 기다리고 있던 중에 왕의 부름을 받고 숙종을 만났고 세자의 출생을 위한 기도를 올렸다는 것입니다. 왕의 부탁을 받은 영원 스님은 도반인 농산(聾山) 스님을 삼각산 비봉 아래의 금선암에서 기도하게 하고 자신은 수락산 내원암에서 100일 기도를 했는데, 농산 스님이 숙빈 최씨의 몸을 빌려 왕자로 환생했다는 것이 대강의 줄거리입니다.

어찌되었든, 설화의 핵심인 영원 스님과 숙종의 만남, 영원스님과 농산 스님의 기도, 훗날에 영조가 될 원자의 탄생, 숙종과 영조의 파계사에 대한 귀의와 보은 등의 이야기는 파계사 역사의 중요한 대목입니다. 성전암과 백화루, 진동루, 칠성전(자응전), 기영각 등의 건축물이 모두 영원 스님 때부터 왕실의 시주에 의해 지어졌고, 1979년 원통전 관음상에서 발견된 복장유물 가운데 영조의 어의(御衣)와 발원문은 설화를 실재의 역사로 증명해주었습니다. 영조 17년(1740) 9월에 작성된 발원문에는 ‘대법당의 불상과 나한상을 중수했으며 왕은 탱화 1000불을 희사하고 불공원당지처(佛供願堂之處)로 삼았으며 왕의 청사(淸沙) 상의로 만세유전을 빌면서 복장한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영조는 자신을 세상에 탄생시켜 준 영원 스님과 파계사에 대해 극진한 정성을 보였던 것입니다.

왕실과 파계사의 관계를 증명하는 또 다른 유물은 하마비(下馬碑)입니다. 파계사 사역에 들어 문화관광해설사 사무실 뒤쪽으로 난 길을 따라가면 높다란 석축 위에 정갈하게 펼쳐진 부도밭을 만납니다. 부도밭 오른쪽 끝에 하마비가 서 있는데 ‘대소인개하마비(大小人皆下馬碑)’라는 글자가 선명합니다. 왕의 권위가 깃든 사찰이니 지방에서 행세께나 하는 벼슬아치라 해도 말에서 내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겁니다. 하마비 하나가 곧 사격(寺格)일 수 있었던 것은 당시가 억불의 시대였기 때문입니다.

▲ 파계사 대비암 근처의 부도밭. 두번째가 현응당 비

지나간 시간의 흔적이 현재로 이어지는 것은 유형의 사물을 통해서도 가능하고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이야기를 통해서도 가능합니다. 유물에 대한 해석도 시대의 흐름에 따라 달라지고 입으로 전하는 이야기도 시절에 따라 변하게 마련입니다. 오늘날 과학이 발달하여 역사의 기록이 완벽하다 하더라도 후세 사람들의 해석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역사는 해석이기 때문입니다.

파계사 부도밭에 겨울바람이 스칩니다. 작년 겨울의 바람도 아니고 내년 겨울의 바람도 아닙니다. 오늘의 바람 속에 있습니다. 근래에 조성된 고송(古松, 1906~2003) 스님의 비와 부도, 사적비, 전명대사비와 부도, 원의대사 비와 부도, 한송당 스님의 행적비가 말없이 부도밭 풍경을 이루고 있습니다. 고송 스님은 늘 “인생은 호흡지간이며 바람 속의 등불이니 열심히 정진해야 한다”며 후학들의 공부를 독려 했습니다. 오대산 상원사에서 한암 스님에게 받은 전법게가 유명합니다.

경전도 읽지 않고 좌선도 않으면서
묵묵히 마주하는 이것은 무슨 종(宗)인고
바람 없는 곳에 바람이 넘치나니
푸른 묏부리에 천년 고송(古松) 빼어나구나!

스승의 인가는 곧 제자의 삶이어서 천년 고송의 가풍은 검소함과 고요함이었습니다. 받침돌에 푸른 이끼가 얹혀 있는 옛 부도는 팔각원당형의 양식을 따랐지만 소박합니다. 보광당 전명대사와 회진당 원의대사가 주인인데 1651년과 1648년에 세워진 것입니다. 두 스님의 자세한 전기는 전하지 않습니다.

이제 조선중기 파계사의 새로운 역사를 쓴 주인공인 현응당 영원 스님의 부도와 탑비를 순례할 차례입니다. 영원 스님의 부도는 대비암 가는 길을 따라 가다보면 오른쪽에 있습니다. 아름드리 소나무 아래, 바람도 멈춰 버린 고요한 풍경 속에 석종형 부도 4기가 서 있습니다. 모두 특별한 장식 없이 닮은꼴로 서 있는데 두 번째 석종 앞에 작은 비가 하나 서 있습니다. 빗돌 가운데는 ‘선종현응당대사지고현(禪宗玄應堂大士之高現)’ 이라는 글씨가 선명하고 왼쪽에는 ‘성상즉위 37년 경인 7월 일 립’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습니다. 영조가 즉위한 지 37년 되는 해 7월에 세웠다는 말입니다.

스님들에게는 대사(大師)라는 호칭이 통용되지만, 이 비석에는 대사(大士)라고 표기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숭유억불의 시대였다 하더라도 왕실의 귀의를 받은 당대의 고승이 ‘스승’이 아닌 ‘선비’로 표현된 것은 뭔가 큰 착오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비 자체가 높이 1m도 되지 않는 작은 규모이고 보니 비문도 간단하고 앞에 소개한 설화와 관련한 내용은 전혀 언급이 없습니다.

“대사의 휘는 영원이며 옥산 이씨(李氏)의 자손이다. 동진(童眞) 출가(出家)하였으며 20세에 눈에서 신비한 구슬이 나오더니 실명하였다. 동운 대사에게서 법을 전수 받고 선의 근원을 탐구하였다. 승랍 이순(耳順)에 이르러 문득 입적하시니 뼈 구하는 것을 넘어서 골신(骨身)을 얻었다. 2개의 정수리 뼈를 각각 탑 3곳에 봉안하고, 또 한 곳에서 일찍이 백일동안 흰옷 입고 공양을 바쳐 마음이 성품의 공한 성질과 딱 들어맞아 사리(舍利) 1개를 얻었다. 또 당나라 승려의 서적을 얻어 보니 비로소 숙세의 한스러움이 서려 있음을 알아 비(碑) 조성을 권하여, 비구니 의성(義性)과 계자(戒者)가 특별히 도감인 인원(忍元)과 별좌인 광학(廣學)에게 청하였다.”

영조의 귀의를 받고 왕실의 후원으로 중창불사를 크게 일으킨 스님의 행장 치고는 지나치게 간소합니다. 임진왜란(1592~98)에 이어 정묘호란(1627)과 병자호란(1636~37)의 전화(戰火)가 꺼진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절, 억불의 기세도 수그러들지 않았겠지만 영원 스님의 부도와 비를 보는 느낌에는 서운함이 큽니다.
옛 부도가 모여 있는 자리에서 대비암 쪽으로 화강암 난간을 두른 화려한 부도 하나가 우뚝한 탑비를 거느리고 서 있습니다. 돌의 흰 색이 파란 하늘과 대비되어 눈이 부십니다. 일우당종수대율사(一愚堂宗壽大律師, 1918~1985)의 부도와 탑비입니다.

의성에서 출생한 종수 스님은 17세에 파계사에서 벽담(碧潭) 스님 아래서 속세의 옷을 벗고 법의로 갈아입었습니다. 이후 동화사에서 경(經)을 보아 이력을 마치고, 금강산 마하연에서 만공 스님을 친견하여 안거 했으며, 오대산에서는 한암 스님을 모시고 정진한 뒤 동래 범어사로 남행하여 금강계단에서 영명 율사에게 계를 받았습니다. 안거철에는 제방선원에서 정진의 고삐를 다잡고 해제 때면 율장을 탐구하며 계신(戒身)을 엄하게 하여 구도일념을 흩트리지 않았던 종수 스님은 조계종 전계화상과 원로의원에 추대되기도 했습니다.

파계사에는 좌우로 아홉 개의 계곡이 있습니다. 옛 사람들은 이 아홉 계곡을 아홉 마리의 용으로 여겼고 그 기세가 세상을 혼란스럽게 할까 염려했나봅니다. 아홉 마리의 용을 붙잡아 두는 책임을 절에다 맡겼으니 절 이름에 파(把, 잡을 파)자가 들어간 연유입니다.

절은 세상의 혼란을 막는 곳입니다. 혼란의 근원인 탐 진 치 삼독을 다스리는 곳입니다. 파계사 부도밭은 두 군데로 나눠져 있지만, 어느 곳에서나 옛 스승들의 간절한 구도심을 만날 수 있습니다. 천년 고송의 푸른 기상이 있고, 곤혹한 부조리를 항변하던 영원 스님의 용기와 불보살의 가피가 사시사철 불어오는 바람 속에서 날마다 새롭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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