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불교 공인이 늦어진 까닭은 ?
아도의 터잡기
일연은 고구려의 불교 전래 과정을 ‘순도조려’(順道肇麗)라고 했다. 순도법사가 고구려에 불교문명을 열었다는 뜻이다. 백제의 불교 전래 과정은 ‘난타벽제’(難陀闢濟)라고 했다.
마라난타법사가 백제에 불교문명을 열었다는 뜻이다. 일연은 두 나라 모두 ‘열었다’[肇, 闢]고 표현했다. ‘열었다는 것’은 국가와 왕실의 적극적인 지지에 의해 불교의 기초와 기둥과 지붕과 벽을 마련한 뒤 문을 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반면 신라의 불교 전래 과정은 ‘아도기라’(阿道基羅)라고 했다. 아도법사가 신라에 불교문명을 터잡았다는 뜻이다. ‘터잡았다’[基]는 것은 국가와 왕실의 도움을 받지 않고 아도법사 스스로 불교의 터를 잡고 땅을 파고 기초를 다지고 기둥을 세우고 지붕과 벽을 마련했음을 시사해 준다.
일연이 단지 동어반복에서 벗어나기 위해 고구려의 ‘조’와 백제의 ‘벽’과 달리 신라의 ‘기’로 조목명을 표현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신라불교의 전래와 수용이 수많은 아도들과 그들이 가르친 불교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에 의해서 이루어졌음을 암시하기 위해서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무릇 새로운 사유가 처음 들어올 때는 늘 갈등이 있기 마련이다. 기존 사유는 새로이 전래해온 사유에 대해 본능적으로 강력한 배타의식을 지니게 된다. 이를테면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뽑아내려 할 때 박힌 돌 쪽에서는 강력한 저항의식을 일으키듯 말이다. 고구려를 거쳐 들어온 인도 서역의 수많은 ‘아도’들은 낙동강 중상류에 자리한 일선현(善山, 一善縣) 속림(續林)에 자리를 잡았다. ‘머리카락을 깎아 구릉같이 이마가 드러난’ 아도(阿道, 阿頭)들은 하나 둘씩 이곳에 자리를 잡았다. 마치 서울 경기 지역에 동서남아 불교국가 사람들이 다문화 기숙 타운으로 몰려들 듯이 말이다.
이곳 ‘모례의 집’[毛祿家, ‘祿’은 ‘禮’의 誤記]은 육지와 강이 만나는 교통의 요충지였다. 그런데 왜 하필 모례의 집이었을까? 그리고 음독(音讀)인 ‘모례’(毛禮)는 사람이름이었을까? 아니면 ‘털례’라는 훈독(訓讀)의 발음처럼 일본의 사찰을 가리키는 ‘테라’(寺, てら)의 어원이었을까? ‘테라’는 일본의 사찰을 나타내는 ‘지’(寺, じ)와는 분명 구분된다. 그렇다면 ‘모례’는 사람이름이 아니라 ‘성황당’ 혹은 ‘띠로 엮은 집’[茅屋, 草堂]을 가리키며, ‘모례가’는 사모례(史毛禮)라는 어느 남자의 집을 그렇게 부른 것이었을까?
모례의 누이동생 이름이 사씨(史氏)였다는 사실을 통해 모례 역시 사씨였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흔히 부르는 ‘모례’는 ‘초기 사원’의 역할을 했던 ‘모례’에 살던 주인집의 사씨 남자가 아니었을까? 그는 평범한 서민이었을까? 아니면 성황당 혹은 종교적 성소인 ‘모례’에 살면서 무당이나 박수 역할을 했을까? 그리하여 그곳으로 점차 아도들 혹은 묵(흑)호자들이 다가오자 그들과 친해지면서 자기 집을 절로 만들었을까? 마치 법흥왕 때 나라의 성황당인 천경림(天鏡林)의 고목을 베어내고 최초의 절인 대왕흥륜사(大王興輪寺)를 지었듯이 말이다.
마찬가지로 종교적 성소였던 사씨의 집이 ‘모례’(테라)인 절로 바뀐 것은 아니었을까? 왜 그 많은 아도들과 묵(흑)호자들은 ‘모례가’에 모여들었을까? 오빠의 집이 비구들로 가득 차자 그 영향을 받은 사씨 남자(모례?)의 여동생인 사씨 여인은 아도법사에게 귀의하여 신라 최초의 비구니가 된 뒤 삼천기에 영흥사(永興寺)라는 절을 지어 살았다.
얼마 뒤 미추왕이 세상을 떠나자 나라 사람들이 아도법사를 해치려 했다. 아도법사는 속림의 모례가로 돌아가서 스스로 무덤을 만들고 그 속에 들어가 문을 닫고 세상을 떠나 다시 나타나지 않았으므로 불교 또한 폐지됐다고 한다.
일연은 「아도본기」와 「아도본비」를 대비하면서 두 기록의 차이를 지적하고 있다. 그러면서 일연은 ‘짐짓 이것을 논해 보겠다’[嘗試論之]며 “아도가 고구려를 하직하고 신라에 온 것은 마땅히 눌지왕 때였을 것”이며 아도는 “고결한 행동으로 세상을 피하면서 성명을 말하지 않은 까닭”에 “‘묵호자’니, ‘아도’니 하는 이름으로써 두 사람을 만들어 전했을 뿐 아도는 한 사람임을 알 수 있다”고 했다.
또 일연은 ‘논평하여 말하기를’[議曰] “관중에서 온 중국승 담시(曇始)가 동국에 머문 지 10년이나 됐는데 우리 역사에는 그 기록이 없으니 아마도 아도와 묵호자와 난타 세 사람 중의 한 사람이 필경 그의 바뀐 이름[變諱]이 아닌가 한다”고 했다. 아마도 아도는 얼굴이 검었을 묵호자나 난타와 달리 흙탕물을 건너도 발이 젖지 않았던[白足]화상인 담시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법흥왕과 이차돈의 신략
법흥왕(元宗)은 키가 7척이나 됐다. 성품이 너그럽고 덕이 있어 사람들을 사랑했고, 행동은 신령스럽고 거룩하여 만백성들이 밝게 믿었다 한다. 태자시절부터 고구려와 백제가 불교를 공인하여 나라가 크게 발전하고 있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다.
왕위에 오른 그는 부왕 지증마립간이 벌였던 일련의 개혁정치를 계승하여 중앙집권화하고 고대국가로서의 통치체제를 정비해 나갔다. 재위 4년(517) 째 되던 해에 눌지왕 이래 신설되어 왕의 직속으로서 군사권을 장악하고 있던 장군(將軍)과 같은 직책을 중앙관부로 흡수하여 병부(兵部)를 설치했다. 재위 7년(520) 째 되던 해에 율령을 선포하고 백관의 공복(公服)에 붉은 빛, 자줏 빛 등의 차등을 정했다. 17관등과 골품제도 등에 관한 규정이 포함됐을 율령의 제정은 신라 내부로 통합된 이질적 요소들을 해소하는데 크게 이바지했다.
법흥왕은 자신을 정점으로 하는 체제의 정비와 왕권의 강화를 통해 고구려와 백제에 대응할 통치체제를 공고히 했다. 이어 금관가야 등 작은 소국들을 합병해 가면서 영역확장을 도모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시점에 가장 절실히 요구됐던 것은 평소 지니고 있던 불법(佛法)을 일으킬 신략(神略)을 모색하는 것이었다. 법흥왕은 날이면 날마다 깊이 고뇌했다. 일연의 『삼국유사』는 김부식의 <삼국사기> 기록과 달리 이때의 상황에 대해 자세히 싣고 있다.
당시 신하들은 불교를 일으키기 위해 천경림에 절을 지으려는 법흥왕의 정책을 거스르며 따지지 않았다. 법흥왕은 누군가가 나타나 ‘묘한 법의 방편’으로써 어리석은 사람들을 깨우쳐주기를 바랐다. 한동안 대답하는 이가 없었다. 어느 날 스물 두 살(혹은 26세)의 청년이자 내사(內史)의 사인(舍人) 박염촉(異次頓, 居次頓)이 찾아왔다. 그는 정직하고 성실하며 의리와 용기를 지닌 인물이었다. 염촉은 왕의 큰 소원을 돕고자 하여 가만히 아뢰었다.
“왕께서 불교를 일으키시고자 하신다면, 신이 거짓으로 왕명이라 전하여[僞傳王命)이라 하여 유사에게 전하기를 ‘왕께서 불사를 창건하려 하신다’ 하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신하들은 반드시 간할 것입니다. 이때 왕께서는 바로 칙령을 내려 ‘나는 그런 영을 내린 일이 없는데 누가 거짓으로 왕명이라 꾸며대었는가?’ 하십시오, 그러면 그들은 반드시 신의 죄를 추궁할 것입니다. 그때에 만일 왕께서 그 신하들의 아룀이 옳다고 하신다면 그들은 복종할 것입니다.”
왕이 말했다. “그들은 이미 완고하고 오만하니 비록 그대를 죽인다 한들 어찌 복종하겠는가?” 염촉이 아뢰었다. “대성(大聖)의 가르침은 천신(天神)이 받드는 것이옵니다. 만일 소신을 베시면 마땅히 천지의 이변이 있을 것입니다. 과연 이변이 있다면 누가 감히 오만스럽게 거역하겠습니까?” 왕은 말했다. “본래 이로운 것을 일으키고 해로운 것을 없애야 하거늘 도리어 충신을 해한다면 어찌 슬픈 일이 아니겠는가?” 염촉은 대답했다. “몸을 희생하여 인(仁)을 이룸은 신하된 자의 큰 절개이옵니다. 하물며 불법이 영원히 빛나고 왕조의 영원한 결속을 위해서라면 신이 죽는 날이 바로 다시 태어나는 해가 될 것이옵니다.” 왕은 크게 감탄하고 칭찬하여 말했다. “그대는 베옷을 입었지만 뜻은 비단을 품었구나.” 왕은 염촉과 함께 깊이 큰 서원을 맺었다. 꽃다운 나이의 염촉은 인과 의를 위해 죽은 것인가? 과연 종질을 죽인 원종은 마음 편히 왕의 자리에 머무를 수 있었을까?
일연은 신라 불교 공인의 과정에서 목숨을 버린 이차돈(염촉)을 기리는 찬(讚)시 한편을 남겼다. “의로움에 몸 바치고 삶을 가벼히 여김도 놀라운 일인데/ 하늘 꽃잎과 젖빛 피는 더욱 다정하구나/ 홀연히 한 칼에 몸은 죽었으나/ 절마다 울리는 종소리는 제국의 서울을 뒤흔드는구나.” 그의 순교는 제국의 서울을 뒤흔든 진리의 종소리가 되어 절들은 별처럼 벌려서고[寺寺星張] 탑들은 기러기처럼 연이어 서게[塔塔雁行] 됐다.
신라 최초의 절 대왕흥륜사
“하늘 땅이 여섯 갈래로 흔들렸으라/ 목 잘린 곳에서는 한 길 젖빛 피 솟았으라/ 내 다섯 눈 환해지고 여섯 감각 열리자/ 사람들의 머리에 내린 꽃비들 보였으라.” <진동 - 이차돈 순교에 부쳐 - 고영섭> 이차돈의 죽음은 각기 보는 이의 육안(肉眼)-천안(天眼)-혜안(慧眼)-법안(法眼)-불안(佛眼)에 따라 달리 느껴질 것이다.
신라의 불교공인 사건을 두고 “이차돈의 순교는 순교가 아니다. 그것은 왕권이 귀족세력을 진압하기 위한 친위 쿠데타였고, 그러한 종교쿠데타를 통하여 왕권이 비약적 강화의 계기를 획득하는 호전기를 맞이하게 된다”며 호국(興國)불교와 기복(興福)의 허구성을 폭로한 학자가 있다. 불교인은 이 사건을 정치적으로만 해석하려는 그의 주장을 수긍하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 정부가 취하는 불교정책을 보면 귀담아 들을 내용은 있다. 왕위에 오른 지 14년(527)에 법흥왕은 신라 최초의 절인 (대왕)흥륜사(조카 진흥왕이 붙인 이름)의 터를 닦고 절을 짓기 시작했다. 천경림의 나무들을 크게 베어내고 불사를 시작했다(535).
법흥대왕은 염촉(厭?)의 멸신을 통해 불교 공인한 다음 해(528)에 살생을 금하라는 영을 내렸다. 절이 어느 정도 낙성되자 왕은 임금의 관[冕旒]을 벗어던지고 가사를 입고 이름을 법공(法空)이라 고쳤다. 궁에 있는 왕의 친척을 내놓아 절의 종[寺隸, 왕손과 逆臣의 후손]으로 삼았다. 그리고는 세 벌 옷[三衣]과 흙발우[瓦鉢]만을 생각했다. 법공의 뜻과 행은 원대하고 고매했으며 모든 중생에 대해 자비를 가졌다. 왕비(妙法, 巴?夫人) 또한 부처님을 받들어 비구니가 되어 영흥사를 짓고 그 절에 머물렀다. 법흥대왕이 재위 27년(540) 째 되던 해 가을에 입적하자 나라에서는 애공사(哀公寺) 북쪽 봉우리에 장사를 지냈다. 지금의 경주시 충효동 선도산 기슭에 있는 능으로 알려져 있다. (사적 176호)
진흥왕은 원종(元宗)이 큰 불사를 열어 일으켰으므로 그 시호를 법흥왕이라 했다. 후대에 완공된(544) 그 절 이름을 조카인 진흥은 ‘대왕흥륜사’라고 했다. 이것은 법공(法空, 법흥대왕)이 머물러 있던 곳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었다. 최근 경주공고 자리에서는 ‘대왕흥륜사’가 적힌 기와 조각이 발견되어 이곳이 나라의 성황당이었던 천경림이었으며 대왕흥륜사터였음이 확인됐다.
진흥왕 역시 숙부의 영향을 받아 전륜성왕의 꿈을 실현하고 말년에는 왕비(妙住, 思刀夫人)와 함께 출가했다. 일연은 “진흥와 법흥 두 왕이 왕위를 버리고 출가한 것을 사관이 쓰지 아니한 것은 출가한 일이 세상을 다스리는 교훈이 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 때문일까? 『조선선교사』를 지은 누카리야 카이텐은 각훈이 『해동고승전』에서 법흥왕이 왕위를 양보하고 티끌을 벗어나 흥륜사에 있으면서 법공이라고 일컬었고 그 비 또한 비구니가 되어서 영흥사에 머물렀다고 한 것은 잘못된 것이며, 따라서 법흥왕은 출가한 적이 없다고 했다. 그는 이 책에서 다섯 가지 이유를 들어 법흥왕과 그 비의 출가사실은 진흥왕의 출가사실을 혼동한 오류라고 적고 있다.
1) 법흥왕 때는 흥륜사가 아직 완성되지 않았으며, 2) <삼국사기>에는 왕이 양이한 사실을 기록하지 않았으며, 3) 법흥왕이 죽은 뒤 왕위를 이은 진흥은 겨우 7세여서 왕태후가 섭정했으니 양위가 불가능했을 것이며, 4) 「아도비」에사 법흥의 출가명을 법운이라하고 자(字)를 법공이라 했으니 진흥왕과 법흥왕을 혼동한 것이며, 5) 법흥도 진흥도 다 법운이라 칭하고 그 두 왕비가 모두 영흥사에 있었다는 것이 바로 혼동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누카리야가 오해하고 있는 것은 대왕흥륜사의 착공과 완공 시점이다.
<해동고승전> 기록에 왕은 절이 완공되자 왕위를 벗어던지고 절로 들어갔다고 했지만, 절이 모두 완공되지 않아도 왕이 거주할 요사채는 먼저 지을 수도 있으며, 영흥사는 “아도기라”조에 나타난 일연의 할주에 근거하면 이 절도 흥륜사와 같은 시대에 착공되어진 절임이 분명하다. 때문에 법흥왕비였던 묘법비구니 뿐만 아니라 후일 진흥왕비였던 묘주비구니도 이 영흥사에 머물렀기 때문에 사가들이 혼동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다만 법흥왕은 입적 때까지 왕의 신분을 유지한 채 절에서 머물렀을 수는 있다. 대왕흥륜사에는 후일 선덕여왕 때의 승상 김양도가 조성한 미타삼존상이 있었다고 한다. 그 동쪽 벽에는 서향으로 앉은 아도·염촉·혜숙·안함·의상과 그 서쪽벽에는 동향으로 앉은 표훈·사파·원효·혜공·자장 등의 신라 십성을 신라의 흙과 물로 빚은 소상으로 만들어 모셨다. 54대 경명왕 때 조성한 보현보살벽화가 특히 유명했다.
일연은 찬시를 덧붙이고 있다. “성스러운 지혜는 예로부터 만세를 도모하는 것이니/ 구구한 여론에 어이 추호라도 마음을 쓸손가?/ 진리의 바퀴가 이 구산팔해의 사바세계를 따라 구르니/ 순임금의 해가 드디어 부처님의 해를 드높였도다.” 법흥대왕은 태평성대의 하늘을 엶으로써 불교의 하늘을 열었다. “저렇게 낮아져 모두를 섬기며 사는 이가 있으랴/ 그렇게 넓어져 모두를 이해하며 사는 이가 있으랴/ 이렇게 깊어져 모두를 사랑하며 사는 이가 있으랴/ 나는 또 얼마를 비워내야 허공처럼 살 수 있으랴.” <바다 - 법흥대왕의 출가에 부쳐 - 고영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