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일: 2025-11-26 11:37 (수)

구산선문 종갓집 법통 한 줄기 바람이 전해주네

▲ 석남사 4부도 중 사료에 의한 확증은 없지만 도의국사 부도로 알려져 있다. 침잠된 4부도는 수많은 승도의 수행을 지켜보았음을 짐작케 한다.

영남제일 수선도량
석남사

도의 국사 창건, 부도의 주인도 도의로 추정
조사전에 선사 11분 모시고 매년 재 올려
 

인홍 스님 20년 불사로 일신, 특별선원 설치 
단아한 부도와 탑비 생전 수행 이미지 담아

가지산(迦智山) 석남사(石南寺)는 비구니 스님들의 참선도량입니다. 조계종 비구니 종립특별선원이 설치된 중요한 도량입니다. 가지산 동쪽 기슭에 자리한 이 도량이 처음 열린 것은 서기 824년(신라 헌덕왕 16년) 도의(道義, ?~?) 국사에 의해서였다고 합니다.  

도의 국사는 우리나라 선종의 초조(初祖)입니다. 중국 선종의 초조가 달마 대사라면 우리나라는 도의 국사인 것입니다. 520년경 중국으로 들어 온 달마 스님이 양무제를 만나 ‘무공덕’의 법문을 한 뒤 소림굴에 들어가 9년 간 면벽했음은 잘 알려진 일입니다. 시절인연을 기다렸던 것인데, 마침내 혜가를 만났고 승찬, 도신, 홍인, 혜능으로 이어지는 선맥을 형성했습니다.

그 달마의 선맥이 우리나라로 넘어 온 것이 도의국사에 의해서였습니다. 784년에 당나라에 들어가서 서당지장(西堂智藏, 735~814)의 법을 계승하여 821년에 귀국했습니다. 6조 혜능으로부터 남악회양, 마조도일을 거쳐 서당지장에 이른 달마의 법이 37년 동안 입당구법(入堂求法) 한 도의 국사에 의해 처음 우리나라로 온 것입니다.

전해지는 대로라면 석남사의 초창은 도의 국사가 귀국한 한 뒤 3년 후에 이뤄진 셈입니다. 이 대목에서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당시 신라 사회에서 선불교는 매우 생소한 새로운 불교였습니다. 그래서 도의 국사는 선종의 뿌리를 바로 내리지 못하고 설악산 진전사로 들어가 은둔했습니다. 달마의 소림굴 9년 면벽과 흡사합니다. 이 때문에 도의 국사를 한국의 달마라 부르기도 합니다.

아무튼, 석남사의 초창에 대해서는 도의 국사가 직접 절터를 잡고 도량을 열었다는 설과 그의 제자 진공(眞空, 855~937)에 의해 창건되었다는 설 등이 있습니다. 분명한 기록이 전하지 않으니 추정이 전부이지만, 석남사와 도의국사의 인연이 천년의 세월을 넘어 면면한 것 자체가 중요하다 하겠습니다.

도의 국사와 거의 같은 시기에 대륙에서 구법수행을 하고 돌아온 선사들이 잇따라 선수행 도량을 열게 되어 구산선문이 형성되었습니다. 가장 먼저 문을 연 도량은 실상산문 실상사이지만, 선불교의 법을 가장 먼저 들여 온 것은 도의 국사에 의한 것이므로 구산선문의 원조는 도의 국사입니다. 도의 국사의 제자는 염거(廉居, ?~844) 화상이고 그의 제자인 체징(體澄, 804~880)이 장흥 보림사를 창건해 도의 국사를 조사로 모시는 산문이 형성됩니다. 이를 가지산문이라고 합니다. 구산선문의 종갓집인 셈입니다.

가지산문의 가지산이 바로 석남사가 위치한 바로 이 가지산입니다. 그러므로 초창도량은 장흥 보림사이고 선문의 명칭은 가지산문입니다. 가지산과 도의국사의 연관성이 분명히 있을 것이지만 드러난 자료는 없습니다. 고려초기의 원응(圓應, 1052~1144) 국사가 만년에 가지산 인근의 운문사에 머물렀는데, 이때부터 가지산문의 중심이 전라도에서 경상도로 옮겨 온 것이라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원 국사의 행장은 운문사 기행에서 살필 수 있을 것입니다.

날카로운 산바람이 옷깃을 파고드는 아침, 허연 입김을 토해내며 석남사 경내에 들어섭니다. 대웅전을 참배하고 ‘울주 석남사 승탑’이란 팻말의 꼬부라진 화살표를 따라 청화당 뒤 석축위에 모셔진 ‘석남사부도’ 앞에 섭니다. 보물 제369호인 이 부도는 도의 국사의 부도라고 전합니다. 설악산 진전사에서 만난 도의국사 부도가 그렇듯 사료에 의한 확증은 없습니다.

▲ 도의국사 진영
팔각원당형의 이 부도는 높이가 353Cm인데, 학계에서는 통일신라말기나 고려 초기에 조성 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팔각형의 2중 기단 위에 상 중 하대가 놓였습니다. 예리한 각을 피해 둥글게 다듬어 진 하대석에는 뭉글뭉글 구름 문양이 새겨져 있습니다. 위로 놓인 중대석과 상대석도 연잎 문양을 차분하게 넣었고 탑신에는 문비와 사천왕상이 아주 차분하게 돋을새김 되어 있습니다. 옥개석은 기왓골이 고르고 처마의 치솟음도 차분합니다. 일부 모서리가 깨져 나간 것이 안타깝지만 보주들이 온전히 잘 얹어져 있어 전체적인 균형미를 받쳐주고 있습니다.

찬 겨울바람에 댓잎 서걱대는 소리가 하염없는데 절에서는 사시예불이 시작되는지 목탁소리가 맑게 들니다. 이 부도의 주인이 누구인가를 따지기 보다는 이 자리에서 수많은 승도(僧徒)들의 수행을 지켜보았을 천년 세월의 깊이에 더 침잠되고 싶어집니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천천히 돌며 부도를 바라보고, 이 부도를 스치고 지나갔을 바람과 구름의 시간들을 생각해 보는 상념이 아득하기만 합니다.

석남사 조사전은 대웅전 바로 뒤에 있는데 안이 말끔합니다. 가운데 도의 국사의 진영이 모셔져 있고 좌우로 석남사를 거쳐 간 고승들의 진영이 걸려 있습니다. 모두 11분의 조사들이 조사전을 지키고 있습니다. 석남사는 매년 5월에 선대 조사 스님들을 기리는 재를 지내고 있습니다.

쇄락했던 석남사를 오늘의 거찰로 가꾼 스님은 근현대 한국불교 비구니계의 큰 별이었던 인홍(仁弘, 1908~1997) 스님이었습니다. ‘가지산 호랑이’로 통했던 스님은 ‘가야산 호랑이’ 성철 스님의 법문을 즐겨들었고, 1951년에 창원 성주사에서 봉암사 결사에 견줄 결사를 맺어 비구니 스님들의 수행가풍을 진작하기도 했습니다. 1957년 석남사 주지로 부임하여 20여 년 동안 대웅전, 극락전을 비롯한 많은 당우를 지었고 토지를 매입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인홍 스님의 덕화는 소임을 충실히 한 사판(事判)이 아니라 부단한 정진으로 일관된 수행의 면모에서 빛나고 있습니다. 제대로 공부하는 사람은 사판도 이판도 다 초월합니다. 언제나 한결같은 모습으로 일거수일투족을 조신(操身)해 보이며 이사(理事)가 무애(無碍)임을 내증하고 시현했던 것입니다.

인홍 스님의 부도와 탑비는 석남사 경내로 접어드는 청운교 오른쪽 양지바른 언덕에 있습니다. 정갈한 자리에 단아하게 서 있는 부도와 탑비는 마치 고운 햇살을 받으며 조용히 좌선에 든 스님의 모습을 연상케 합니다. 입적 2년 후에 조성한 부도는 연한 자줏빛이 감도는 화강암입니다. 팔각의 기단위에 앙련의 하대석과 낮은 중대석 그리고 복련의 상대석이 부도의 하부중심을 견고하게 잡고 있습니다.

우주만물의 집결체인 듯 둥그런 몸돌에는 ‘인홍선사적조탑’이라 음각되어 있습니다. 화려한 장식 없이 매끈하게 다듬어진 옥개석은 끝이 사뿐하게 들려져 무게감을 허공으로 날려버리고 있습니다. 이어 얹어진 보주들은 간소하지만 기품이 있습니다.

탑비는 목주름이 두드러진 귀부와 오석으로 다듬어진 몸돌 그리고 장엄한 운룡문의 이수로 이루어졌습니다. 비문은 석정 스님의 글입니다. 한글과 한자를 혼용한 비문은 인홍 스님의 일대기를 매우 담담하게 풀어내고 있습니다.

부도와 탑비 그리고 비문이 전해주는 단아함과 담담함의 이미지. 인홍 스님의 삶이 그러했을 것입니다. 탑비의 비문과 작가 박원자씨가 지은 인홍 스님의 일대기 <길 찾아 길 떠나다>(김영사, 2007)에는 가지산 호랑이의 생애와 수행 면모가 생생하게 담겨 있습니다. 

 “마조 선사의 증법손인 도의 국사가 신라 선종의 가지산문을 열었는데 일천년이 지난 후에 인홍니가 가지산 석남사에서 다시 선문을 꽃피우니 수십 년의 결재 동안 2천여 명의 운수납자가 이 회상에서 정진하였고 333여 명의 은제자를 길러내니 석존 재세 시 대애도 비구니의 화현이로다.”

<길 찾아 길 떠나다>의 출간에 즈음한 당시 조계종 종정 법전(法傳) 스님의 법어입니다. 실로 부처님 재세시의 대애도 비구니와 한국 선종의 초조 도의 국사와 석남사 중창주 인홍 스님은 시간과 공간을 넘어 진리의 당체로 일체화 되고 있음을 종정이 증명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1997년 음력 4월 14일 세수 90세 법랍 56년의 일기를 마치며 부른 인홍 스님의 열반송은 이렇습니다.

삼세불조(三世佛祖) 가신 길을 나도 가야지.
구순생애(九旬生涯) 사바의 길, 몽환(夢幻) 아님 없도다.
일엽편주(一葉片舟)처럼 두둥실 떠나가는 곳
공중(空中)에 둥근 달 뿐이네.

다시 청운교를 건너 이제 속세로 향한 길을 걸어 내려갑니다. 작은 기념품 가게를 지나 탱자나무 울타리를 뒤로할 무렵 오른쪽으로 눈을 돌리면 부도밭이 보입니다. 4기의 부도가 앞에 표지석을 세워 놓고 서있습니다. 맨 앞의 부도는 팔각원당형을 계승했고 나머지 셋은 석종입니다.

팔각원당형 부도 앞의 표지석에는 ‘선교양종지봉당거기대사탑’이라고 음각 되어 있고 그 옆의 석종은 표지석이 없는데 몸돌에 ‘소암당세위대사’라 새겨져 있습니다. 그 옆으로는 ‘함월당덕휘대선사탑’ ‘재월당화백대선사지탑’이 서 있습니다. 이 네 분의 선사들이 어느 시대를 어떻게 살다 갔는지 전하는 자료가 없어 알 길이 없습니다.

비질한 흔적이 또렷한 부도밭에서 행장을 잃어버린 옛 스님들의 유적을 더듬는 일은 쓸쓸합니다. 칼바람 부는 겨울의 한 낮, 고요한 부도밭은 시간도 공간도 다 잃어버리고 두둥실 일엽편주로 떠 흐르는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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