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진 불영사 주지 일운 스님 (조계종 종회의원)

그 계곡길을 굽이굽이 따라가면 고즈넉한 불영사의 풍경이 길손을 반갑게 맞이한다. 불영사는 조계종 제11교구 본사 불국사 말사로 진덕여왕 5년(651년) 의상(義湘) 대사가 창건했다. 금강송 군락지의 숲길을 뒤로 그림 같은 연못 속엔 천축산과 전각들의 그림자가 비친다. 불영사의 연못은 창건 당시 아홉 마리 용을 주문으로 쫒아냈다는 설화가 있을 만큼 깊고 넓다. 이 연못에 서쪽의 부처 모습을 한 바위가 항상 비쳐 불영사(佛影寺)로 불리는 것이다. 산으로 둘러싸인 자그마한 평지에 오밀조밀 많은 전각이 자리한 모습은 한 폭의 그림이다.
하지만 불영사가 현재의 이런 모습을 갖게 된 것이 불과 10여년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아는 이는 몇이나 될까?
불영사 입구에서부터 펼쳐진 15km에 달하는 계곡은 맑고 장엄한 명승지이다. 1985년 계곡에 난 36번 국도가 포장되면서 불영사 계곡은 휴양지로 각광받았다. 기암절벽의 천축산을 배경으로 한 아름다운 경관에 한여름 야영객은 수천 명에 달했다.
그러던 어느 날 당시 세납 39세인 젊은 주지 스님이 부임하며 상황이 달라졌다. 절 입구에 일주문을 세우고 일주문 내 야영장을 철거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한결같은 마음으로 밭을 간다’는 뜻을 지닌, 심전(心田) 일운(一耘) 스님이다.
스님은 수행과 청정가풍을 통해 신라고찰인 불영사를 정법수행으로 새롭게 바꾸길 원했다. 스님은 계곡의 야영장을 모두 철거하고 경내를 깨끗하게 정비해 절 면모를 일신했다.
무엇보다 자신이 대중살이에 철저했다. 새벽 3시부터 밤 10시까지 대중들과 일체를 함께 했다. 매일 500배를 하고 오후에는 불식하는 것으로 스스로의 삶을 통해 보이고자 했다. 현재도 스님은 출타 중일 때나 절에서 소임을 볼 때나 항상 스님들과 함께 대중생활을 한다.
스님의 철저한 대중살이는 불영사 공양간을 보면 딱 드러난다. 불영사는 사찰의 모든 살림을 비구니 스님들이 담당한다. 스님들이 직접 채소를 다듬고 음식을 만들고 설거지를 한다. 흔히 말하는 공양주 보살이 없다.
스님의 솔선하는 모습에 하나둘씩 먼 곳에서 온 여성들이 발심 출가했다. 이탈리아에서 생물 교사를 하다 한국 불영사에서 한 달을 지낸 뒤 출가한 여웅 스님을 비롯해 대만 여성 6명, 러시아 여성 1명이 불영사에서 출가했다. 스스로에게 만큼이나 제자들에게 엄격한 일운 스님 밑에서 출가한 비구니는 53여 명에 달한다.
불영사를 우연히 찾은 이들은 불영사의 이런 모습을 보고 물심양면의 후원을 자청하고 나섰다. 이는 비구니선방으로 유명한 천축선원 중건의 원동력으로 이어졌다.
1978년 천축선원으로 출범한 불영사 비구니 선원은 1996년 일운 스님이 대웅전 동편에 54평 규모의 선원과 30여평의 지대방을 신축하며 총림에 버금가는 수행ㆍ참선 도량으로 거듭났다.
불영사 중흥에 앞장 서 온 일운 스님은 조계종 제14대, 제15대 비구니 중앙종회의원이기도 하다. 선원분야 직능대표인 스님은 비구니계를 넘어 사부대중들에게 수행가풍을 널리 알려왔다. 옥복연 젠더연구소장과 김영란 나무여성인권상담소장 등 여성불자들이 11월 20일 불영사를 찾아 일운 스님과 만나 대담을 나눴다.
정리=노덕현 기자

일주문을 세울 때의 일입니다. 당시 마을 주민들은 일주문을 세우면 안 된다고 반대했습니다. 울진군에서도 불영사 주변에 야영장이 필요하다는 입장이었습니다. 하지만 스님은 겨울에 천막을 치고 일주문 세울 준비를 하였습니다. 마을 주민들을 설득하는 한편 주변 정화에 나섰습니다. 일주문이 세워지면서 불영사의 면모가 일신하기 시작되면서 천축선원을 짓고 불사를 하나씩 해나가다보니 25여동에 이르게 됐습니다.
불교가 시대에 어떤 메시지를 줘야 할까요. 어떤 시대여야지 세계가 평화롭고 행복하겠습니까. 우리는 밥을 먹으면서도 망상을 하기 때문에 밥을 먹는지 모르고 있습니다. 내 자신의 진정한 인생을 위해 살아야 하는데 자본주의 물질주의 세상에서 재물, 명예 등 다른 것의 획득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만 합니다. 그로 인해 경쟁이 심화되며 경쟁을 위한 경쟁을 하고 있습니다. 진정한 평화는 자기로부터 모든 것을 내려놓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불교는 다섯 가지 계율을 통해 생명을 존중하고 내 생명과 남의 생명을 중시 여기라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많은 죄를 짓고 있습니다. 그중에서 모르고 짓는 죄가 너무나 큽니다. 그래서 알아야 합니다. 내 곳간의 쌀은 다 썩어 가는데 남의 곳간 쌀만 보는 상황입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자기자신을 돌아보는 수행이 필요합니다.
만일결사를 하게 된 이유는 부처님께서는 모든 생명있는 존재들은 다 부처가 될수 있고, 불성(佛性)을 지니고 있다고 하셨으며 그 불성인 마음은 중생의 본래 청정한 마음이며, 마음을 매순간 염불에 집중하여 우리의 어리석음에서 비롯한 탁한 마음을 정화하여 본래의 청정한 마음으로 돌아가 모든 고통으로부터 해탈하고 매순간 영원한 자유인(부처님)이 되기 위함이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사는 지구촌이 어떠한 고통도 없는 행복하고 깨끗한 세계로 이끌기 위해서입니다.
누구나 본질을 위해 사는 삶을 갖자는 것입니다. 내 주변부터 정화하고 그와 함께 내 가족부터 불교의 가르침이 무엇인지 어떻게 사는 것이 바람직한건지 얘기 할 수 있어야 한다는 데서 출발합니다.
번뇌 망상이 일어날 때마다 화두에 집중해야 내 자신을 다스릴 수 있습니다. 계속 집중해서 하려면 끊임없는 자비심(보리심을 바탕으로 한 자비로운 마음)을 내야 합니다.
그 자비심의 에너지는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지만 발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행주좌와 어묵동정(行住坐臥 語默動靜)에 늘 자신을 살피는 철저한 자기 수행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그렇게 하면 자신의 본래 마음에 돌아갈 수 있습니다.
비구ㆍ비구니를 떠나 이 시대가 요구하는 불교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화두가 될 것입니다. 이 화두를 타파하는 과정에서 비구 비구니의 화합은 자연스럽게 이뤄지리라 봅니다.
현재 종회의원은 직능대표를 제외하고 각 지역 교구에서 비구 스님들이 2명씩 뽑히고 있습니다. 이에 비구니 스님 1명씩도 대표로 뽑아 각 교구에서 3명씩 늘리는 안이 적합하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출가자의 수는 비구와 비구니 수가 비등합니다. 또 시대가 변해 포교일선 등에서 비구니 스님들이 많은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불교 발전을 위해, 현실에 맞는 종단 운영을 위해서는 비구니 종회의원 증대는 꼭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너와 나는 동일체(同一體)이기 때문입니다.
불영사는 조선 태조 6년(1397년) 화재로 소실된 것을 중건했으나 다시 소실돼 연산군 6년(1500년) 양성 법사(養性法師)가 중건했다. 다시 임진왜란 때 모두 소실됐으나 응진전은 화마를 피했다. 그 이후 광해군 1년(1609년) 진성법사의 중건을 시작으로 여러 스님들의 손으로 중수됐다. 현재 당우는 대웅보전, 명부전, 극락전, 응진전, 의상전, 칠성각, 산신각, 천축선원, 황화실, 설법전, 응향각, 설선당, 청운당, 청풍당, 희운당, 향운당, 법운당, 단하당, 청납당, 법종루 등이 있고, 창건 당시 유적인 무영탑(無影搭)과 돌거북 등 국가지정문화재와 도지정문화재가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