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을 오르다 보면 온갖 시름이 떨구어 진다. 마치 조락(凋落)의 나뭇잎과 흡사하다. 발 아래 낙엽은 절로 나고 진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이 세상에 자신의 힘으로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 모든 것은 원인과 조건의 상호작용을 통해 나타나기 마련이다.
우뚝 솟은 저 바위는 원자들로 구성돼 있다. 그리스어로 원자는 ‘분할 할 수 없는 것’을 의미한다. 그 작은 입자가 에너지인 것이다. 바위에 초목이 뿌리를 내리고 삶을 영위하는 것도 에너지인 원자의 이동이 있기 때문이다. 이쪽의 원자가 저쪽으로 이동하는 찰나를 틈타 뿌리는 삶을 지탱하는 공간을 찾아가는 것이다. 서울 하늘에 무지개가 뜨면 뉴스에 나올 정도이다. 그 무지개는 비구름 위로 떨어지는 태양 광선의 작용으로 형성되는데 우리가 만질 수는 없어도 가시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러한 요인들 가운데 어느 한 가지라도 모자라게 되면 그러한 현상들은 사라지게 된다. 하나는 완성이요, 모두를 있게 하는 기본이다. 하나가 얼마나 중요한지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이다.
이별은 영원한 떠남이 아니다. 이별의 속성은 만남이요 재회이다. 다만 그 형태와 모양을 달리하여 다시 만나는 것이다. 생각해 보자. 나뭇잎의 이별이 없이 새봄의 새싹의 재회가 있을 수는 없다. 이별의 슬픔을 감내하기 어렵다고 붙들고만 있다면 나무는 추운 겨울을 견디지 못하고 동사(凍死) 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작은 잎새의 이별은 재회를 언약하며 떠난다.
<남전대장경> 가운데 ‘사유경(蛇兪經)’에는 유명한 비유가 나온다. 석존이 기원정사에 있을 때의 가르침이다.
제자 가운데 독수리 잡기를 좋아하는 비구가 있었다. 그는 나쁜 소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의 이름은 아니타였다. 대중들이 그의 그릇된 소견을 고쳐 주려고 타일렀지만 아무런 보람이 없었다. 이 말은 전해들은 석존은 조용히 아나타를 불러 타이른 후 대중에게 말했다.
“비구들이여, 나는 너희들에게 집착을 버리도록 하기 위해서 뗏목의 비유를 들어 말해주겠다. 어떤 나그네가 긴 여행 끝에 강가에 이르게 되었다. 그는 생각하기를 ‘바다 건너 저 쪽은 평화로운 땅이다. 그러나 배가 없으니 어떻게 갈까. 갈대나 나무로 뗏목을 엮어 건너가야 겠군.’하고 뗏목을 만들어 무사히 건너가 평화로운 땅에 이르렀다.
나그네는 다시 생각하였다.
‘이 뗏목이 아니었더라면 나는 이 강을 건너올 수 없었을 것이다. 이 뗏목은 내게 큰 은혜가 있으니 메고 가야겠다.’
‘너희들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나그네가 그렇게 함으로써 그 고마운 뗏목에 대해 자기가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하느냐.’
석존의 질문에 제자들은 하나 같이 그렇지 않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스승은 다시 말했다.
그렇다면 나그네가 어떻게 해야 자기 할 일을 다 하게 되겠느냐. 그는 강을 건너고 나서 이렇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이 뗏목으로 인해 나는 강을 무사히 건너왔다. 다른 사람들도 이 뗏목을 이용할 수 있도록 물에 띄어 놓고 이제 내 갈 길을 가자.’ 이와 같이 하는 것이 그 뗏목에 대해 할 일을 다 하게 되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나는 이 뗏목의 비유로써 교법(敎法)을 배워 그 뜻을 안 후에는 버려야 할 것이지, 결코 거기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했다. 너희들은 내가 말한 교법까지도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하물며 법 아닌 것이야 말 할 것 있겠느냐.”
그렇다. 강을 건너게 해준 은혜가 뗏목에 있다 하여 그 뗏목을 메고 가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 뗏목을 메고 가면 무거운 뗏목의 무게로 애써 평화로운 땅에 도달 했지만 마침내 힘이 들어 몇 발짝도 나아가지 못하고 생명을 잃게 될 것이다.
집착을 범어로 ‘arati’ 라고 한다. 집착은 ‘화’이고 ‘번뇌’이다. 집착을 놓아버리면 화 날 일도 없을 것이고 번뇌에 속박되는 일도 없을 것이다. 자연은 우리를 아이로 만든다. 자연은 우리 귓전에 속삭인다. 왜 그런 일로 집착하느냐. 무엇 때문에 그런 일로 고민 하느냐고.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한다. 죽음의 실체를 모르면 두려움은 더 커지기 마련이다. 죽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여래(tathāgata)는 육신이 아니라 깨달음의 지혜다. 깨달음의 지혜는 영원한 것이다.
나뭇잎은 일찍이 집착을 터득한 모양이다. 누군가가 아쉬워한다 해도 미련 없이 이별을 선언한다. 이 선언은 비련의 선언이 아니라 인간이 감내하기 어려운 위대한 선언이다. 산새도 이별을 습득하였다는 듯이 가납사니 마냥 지저귀는 석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