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정에 제일 먼저 가을 소식을 알리는 전령이 있다. 운동장 축대를 타고 절지동물(節肢動物) 마냥 오르는 담쟁이 덩굴이다. 그들은 만유인력에 저항하며 위로 위로 올라간다. 이제 성장을 멈추고 붉게 물들어 가는 모습에서 고요를 발견하게 된다.
발견이라는 단순한 단어는 형이하학적인 목표를 충족시킬 뿐만 아니라 형이상학적인 세계까지 추구할 수 있는 힘을 내재하고 있다. 마치 어둠이 공포로만 다가오는 것쯤으로 알았던 사람이 어둠의 미덕이 안식과 평화라는 것을 알았을 때의 희열 같은 신비로움이 아닐까. 어둠을 아랑곳 하지 않고 밤을 지키는 귀뚜라미는 진정 안식과 평화를 누리는 주인공일 것이다. 이따금 그들과 벗을 하노라면 일에 능률이 배가 되고 밝음의 번잡함에 비해 더할 나위 없는 한가함을 느끼게 된다. 여기에 무슨 긴 사설을 늘어놓을 필요를 전혀 느끼지 않는다. 고요는 고요와 경쟁을 벌이지 않고 아름다움 또한 아름다움과 경쟁을 하려 하지 않는다. 절대 고요와 절대 아름다움은 그들의 극치만이 있을 뿐이다. 이렇게 자연이 주는 메시지는 천태만상이다.
선어 가운데 ‘일기일경’이란 말이 있다. <벽암록> 제3, 11, 57칙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일기(一機)란 선사가 선을 배우는 학인을 대할 때 자기의 사상을 동작으로 표현하는 것을 말한다. 소위 접득수단(接得手段)이라고 한다. 즉 눈썹을 치켜 올리거나, 눈을 깜박인다거나, 돌아보거나, 살펴보거나, 피식 웃거나, 꽥 소리 지르거나 하는 것이다.
한 두 사례를 들어 보고자 한다. 경허선사의 제자 혜월(慧月, 1862-1937) 스님이 팔공산 파계사(把溪寺)에 머무르고 있을 때 일이다. 하루는 객승이 찾아 왔다.
“그대는 뭣 하러 왔는가.”
그러자 객승이 대답했다.
“참선하려고 찾아 왔습니다. 그리고 큰스님의 시절인연을 보려고 왔습니다.”
객승의 대답에 혜월스님이 대뜸 물었다.
“참선해서 무엇 하려고”
“그거야 부처가 되려고 그러지요.”
“참선은 앉아서 하는 건가, 서서 하는 건가.”
“물론 앉아서 하지요”
그러자 혜월스님은 깔깔 웃으면서 말했다.
“그 놈의 부처는 다리 병신인 모양이지. 앉아서만 있으니.”
어리둥절해진 객승은 혜월스님에게 물었습니다.
“좌선은 앉아서 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것은 앉아만 있는 것이지 부처되는 작업은 아닐세.”
<유마경> 제자품에서 ‘몸과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것을 좌선이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전등록> 제 14권에 조주대전(趙州大顚) 선사가 나온다. 대전선사는
“어느 것이 그대의 마음인가.”
“이야기 하는 것이 그입니다.”
이에 할(喝)을 당하고, 자리에서 쫓겨났다. 십 여일을 지나 대전선사가 다시 물었다.
“먼저 대답이 틀렸다면 그 밖에 어떤 것이 마음입니까?”
석두가 대답했다.
“눈썹을 번득이거나 눈을 깜박이는 일(揚眉瞬目)을 제하고서 마음을 가져 오너라.”
“가져올 마음이 없습니다.”
“원래 마음이 있는데 어째서 없다 하는가. 마음이 없다고 하면 모두가 비방하는 말이 된다.” 대전이 이 말에 크게 깨달았다.
일경(一境)은 선사가 자기의 사상을 외계의 사물을 빌어 표현하는 것을 말한다. 곧 꽃을 들어 보이거나, 동그라미를 그리거나, 달을 가리키거나, 지팡이를 세우거나, 물을 가리키거나, 소리를 듣거나 하는 행위이다.
<오등회원> 권9에 향엄지한(香嚴智閑) 선사가 나온다. 지한은 위산영우의 제자로서 스승의 가르침을 받고도 오랫동안 깨칠 수가 없었다. 어느 날 스승은 나지막한 소리로 향엄의 마음에 불을 지폈다.
“향엄아, 부모님으로부터 향엄이라는 이름을 받기 이전의 네 모습은 무엇이냐?” 이 엄청난 질문에 앞뒤가 꽉 막힌 제자 향엄은 평소에 공부하던 책을 모두 불살라 버렸다.
“이 생에 불교를 공부하여 깨치는 것은 이제 그만두고 대중 시봉이나 하며 후원에서 편히 지내야 겠다”고 다짐하고 위산의 곁을 떠났다. 그 후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다가 남양혜충국사의 유적지에 머무르게 되었다. 어느 날 운력을 하다가 돌멩이를 울 너머로 집어던졌는데 그것이 대나무에 부딪치는 소리가 기연이 되어 크게 깨칠 수 있게 된다.
물의 속성은 부드러움이다. 그러나 형태는 고정되어 있지 않다. 어느 그릇에 담느냐에 따라 그 모양이 각양각색으로 나타나듯이 광대무변한 마음은 어떤 기(機)와 경(境)을 만나느냐에 따라 불가사의한 힘이 솟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