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일: 2025-11-26 11:15 (수)

자기성찰

제주도를 섬의 특성상 삼다도(三多島)라고도 한다. 돌과 바람 그리고 해녀가 많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도서(島嶼)란 크고 작은 섬을 이르는 말이다. 도는 큰 섬 도이고, 서는 작은 섬 서를 일컫는 말이기 때문이다. 바람이 많은 제주 사람들은 바람의 재해에서 벗어나는 길을 모색하였다. 그 하나가 강담을 쌓는 일이었다. 흙을 쓰지 않고 돌로만 담을 쌓는 것이었다. 그렇게 담을 쌓는다는 것이 얼핏 생각하면 무모하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강담은 견고성에서 부실하기 그지없다고도 생각했다.

구멍이 송송 뚫린 현무암으로 큼지막한 구멍이 난 담을 쌓기 때문이다. 누대의 선조들은 견고하게 쌓겠다고 흙을 넣어 다지며 구멍이 나지 않게 쌓았겠으나 생각과는 달리 정성이 빗나가기 마련이었다. 무너지고 또 무너지기를 거듭한 나머지 터득한 지혜가 바람이 지나 갈 통로를 마련해 두는 작업이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마침내 담장이 무너지는 애석함을 극복할 수 있게 되었다.

어느 수행자의 경우도 아마 그랬을 것이다. 반복 또 반복하여 시행착오를 거듭한 나머지 저 위 없는 깨달음에 도달한 것이다. 이는 부단한 성찰의 결과이다. 성찰(省察)은 범어로 nirīkshaṇa 라고 한다. 동사는 nirīksh 이다. ‘보다’, ‘응시하다’, ‘지각하다’는 말이다. 주변을 눈여겨보면 자신을 반조해 보지 못하고 남의 장단에 놀아나는 사람이 허다하다.

월(越)나라의 미녀 서시(西施)가 음식을 잘못 먹어 위경련이 일어났다. 그 통증이란 가히 견디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서시는 참다못해 눈살을 찌푸리게 되었다. 그때 어떤 추녀가 미인은 찌푸리는 것이라고 여겨 자기도 찌푸리기를 일삼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연유로 함부로 남의 흉내를 내는 것을 이를 때 쓰는 말이 효빈(效顰)이란 고사가 나왔다. 주체의식이 없는 사람의 삶의 단면을 지적하고 있다.

<회남자> 인간훈편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제나라 장공(壯公)이 사냥을 나갔을 때의 일이다. 벌레 한 마리가 장공이 타고 가는 수레바퀴를 들이치려고 하였다. 공은 수레를 모는 마부에게 물었다.

‘저게 무슨 벌레인가’

‘저 놈이 이른바 사마귀란 놈입니다. 저 놈은 원래 앞으로 나아 갈 줄만 알고 뒤로 물러 날 줄은 모르며, 제 힘도 헤아리지 않고 상대를 업신여기는 놈입니다.’

‘그래, 그 놈이 만일 사람이라면 반드시 천하의 용사가 될 것이다.’하며 공은 수레를 돌려 사마귀를 피해 갔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고사를 당랑거철(螳螂拒轍)이라고 알고 있다. 사마귀에서 배울 점이 있다. 아무튼 타고난 성질은 고치기 어렵다는 것을 배울 수 있다. 그리고 빤히 안 될 줄 알면서 인간의 의기를 앞세우는 어리석음을 어쩌지 못하는 것이 인간이 아니던가 하는 점이다.

사향(麝香)노루는 몸길이가 1m이고 어께 높이는 50cm 가량이 된다. 뿔이 없는 동물로 서식지는 숲속이다. 궁노루라고도 하고 사록(麝鹿)이라고도 한다. 이 짐승의 수컷의 배꼽 근처에는 향낭이 있다. 향낭에서 매혹적인 향이 나는 데, 정작 노루는 냄새의 근원이 어딘지를 몰라 온 산을 헤매고 다닌다고 한다. 인간도 사향노루와 유사한 일면을 볼 수 있다.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만족을 얻기 위해 끊임없이 갈증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생각을 쉬고 조용히 자기성찰을 하게 되면 그 만족의 근원은 실은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도심 속에 잘 가꾸어진 저택의 정원을 보게 된다. 몇 평 남짓한 잔디 밭, 그리고 그 가장자리에 심어 놓은 정성이 묻어나는 소나무 몇 그루로 단장이 되어 있는 것이 정형화된 도심의 정원이다. 반면에 저택은 아니지만 아니 궁색해 보이는 주거 공간에 살면서도 광대무변한 숲과 계곡을 정원 삼아 살고 있는 사람의 모습도 보게 된다. 여기서 분명한 두 모습을 보게 된다. 행복이란 얼마나 소유했느냐가 아니라는 것을. 행복은 소유와 비례하지 않는다. 행복의 기준은 소유의 많고 적고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을 때 마음의 평온은 장마 끝에 나들이 나온 달팽이의 촉수마냥 민감하게 느낄 수 있다.

여백이나 공간이란 얼핏 생각하면 손실 부분이라고 간주해 버리기 쉽다. 그러나 여백이 없는 동양화란 상상하기 어렵다. 동양화의 매력은 여백처리에서 그 진면목이 드러나는 것이다. 또 이 세상에 공간 없이 뭔가가 가득 채워져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렇게 되면 설치물들은 조금도 지탱하지 못하고 이내 소멸이나 파멸에 직면하고 말 것이다. 제주의 강담을 보고 있노라면 여백의 활용과 공간의 묘미가 절묘함을 새삼 느끼게 된다.

우리 마음의 순기능과 역기능도 흡사하다. 마음을 비울 때 공간 활용이 원활하게 되는 것이다. 반면에 마음 구석구석에 뭔가 가득 채우려하면 할수록 자신을 감당할 길이 막연해진다. 단 하루만이라도 자신을 살펴보자. 비우는 연습을 했는가 아니면 채우는 연습을 했는가. 정작 인간이 낭비해야 할 것은 소유욕이다. 소유욕은 다른 재앙을 유발하는 원동력이 되기 때문이다.
 

저작권자 © 현대불교 무단전재 및 재배포, AI학습 및 활용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