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일: 2025-11-26 11:15 (수)

세 가지 병

속살을 드러낸 목화송이 마냥 새하얀 뭉게구름을 본다. 교정의 유리벽에 반사되는 구름을 관찰하는 여유로움은 사색의 세계를 풍요롭게 한다. 높은 벽에 앉아 낮잠을 즐기고 있는 고양이를 보고 있노라면 휴식이란 저런걸까 생각하게도 한다. 몹시 더운 삼복에 시원한 산들바람이 초록의 잎을 나부낄 때 형체 없는 것의 위대함을 느끼곤 한다. 쉼 없이 솟아나는 옹달샘에서 갈증을 해소 했을 때의 물맛이란 어느 산해진미에 비할 수 있겠는가. 이렇게 육신의 눈과 귀와 입으로 느끼는 경험은 삶을 풍부하게 해주는 원천이 되기 마련이다.

에머슨(R. W. Emerson)은 말했다. “건강한 하루를 달라. 그러면 어떤 제왕의 영광도 일소(一笑)에 부치리라.” 아마 그는 건강의 소중함을 절실하게 느꼈던 것 같다. 언젠가 병(病)이란 무엇일까 스스로에게 자문(自問) 해 본 적이 있다. 병은 dis와 ease의 결합어이다. 안심(ease)에서 동떨어 짐(dis)이 병이 된다. 사람이 숨을 쉴 때 안심하고 편히 쉬어야 하는데, 여의치 않아 산소마스크를 쓰고 숨쉬는 환자를 병원에서 흔히 볼 수 있다. 범어로 병은 vyādhi 라고 한다. 동사는 vyādh 이다. ‘떨다, 떨리다’ 혹은 ‘흔들리다, 동요하다’의 뜻이다. 즉 육신이든 숨결이든 정상의 상태를 벗어났을 때 병이라고 말하고 있다. roga 는 동의어 이다.

현사(玄沙) 스님은 둔근기(鈍根機)의 수행자를 세 가지의 신체장애에 비유하여 말한 적이 있다. 스님은 설봉(雪峰)의 법을 받았으며 휘(諱)는 사비(師備)이고, 속성은 사(謝)씨이다. 현사스님은 스승의 권고에 따라 제방을 다니고자 짐을 꾸려 나섰다. 마침 고갯마루를 지나다가 돌부리에 발가락이 치이고 말았다. 순간적으로 ‘아야-’ 하는 자신의 소리에 기연을 만나게 된다.

어느 날 현사스님이 수행자들에게 말했다. “요즘 이곳저곳에서 수행자들이 모두 포교다 전도다 하고 남을 돕는다고 하는데, 세 가지 병을 앓는 자가 불쑥 찾아오면 어떻게 교화시키겠느냐, 시각장애인에겐 쇠몽치를 쥐고 총채를 세운들 보일 리가 없고, 청각장애인에겐 입이 아프게 말해 봤자 들릴 리 없으며, 벙어리에겐 아무리 말을 하라고 한들 말할 리 없으니 대체 어떻게 교화시키겠느냐? 그런 사람들을 교화시킬 수 없다면 불법의 영험 따위란 없지 않느냐.” 한 납자(衲子)가 현사스님의 말뜻을 알 수 없어 운문스님에게 가서 그 문제를 물었다. 그러자 운문이 말했다. “네가 그걸 알고 싶다면 먼저 절을 하거라!” 납자는 그러면 가르쳐줄 줄 알고 절을 하고 일어나니까 운문이 주장자로 치려 했다. 납자는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너 장님은 아니구나” 하고 말하면서 다시 앞으로 다가오라고 불렀다. 다가오자 운문은 “너 귀머거리도 아닌 모양이구나” 하고는 이어 “어때 알겠느냐” 하고 물었다. 납자는 “모르겠는데요.” 하자 “허, 벙어리도 아닌데!”라고 운문이 뇌까렸을 때 수행자는 비로소 조금은 눈앞이 트였다. 위 내용은 <유마경> 제자품을 인용하고 있다.

우리는 흔히 눈이 멀고, 귀가 먹고, 말 못한다고 하면 혀를 차며 안쓰러워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실로 눈이 멀었을 때 비로소 참된 빛깔이 보이고 귀가 멀었을 때 비로소 참된 소리가 들리는 것이다. 오히려 눈이 터져있으므로 보이는 것에 사로잡히고 귀가 뚫려 있으므로 들은 것에 집착하기 쉬운 것이다. 보려는 마음, 들으려는 마음, 말하려는 마음이 없는 사람은 가히 도인이라 할 만하다.

테니스 라켓을 잡아 본 적이 없는 필자는 체육 원서 가운데 테니스 부분을 번역한 적이 있다. 그 흔한 love란 단어에 막히고 말았다. 테니스에서는 영점을 말하는 줄 몰랐기 때문에 사전을 들었다. 테니스 경기를 보면 이상한 생각이 든다. 사람들은 모두 소유하려고 하면서도 이 경기에서만은 자신에게 넘어 온 공을 상대 선수 쪽으로 부지런히 쳐 넘겨 댄다. 소유하려고 하지 않는단 말이다. 그것도 서브하는 법과 백핸드, 포어핸드 사용법을 배우고 지구력과 반사 능력을 키워서 능숙하게 넘겨야 한다.

공을 소유하지 않으려는 테니스 경기와 수행은 일맥상통 하는 점이 신기하기도 하다. 수행은 덜어내기의 닦음이기도 하다.

듣는 자 보다 듣지 못하는 자, 보는 자 보다 보지 못하는 자, 말 잘하는 자 보다 말 못하는 자야 말로 세 가지 병에서 완치된 탈속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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