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기 때문일까. 아니다. 절기 때문이라고만 할 수 없는 일이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다 보면 시선을 머물만한 곳을 찾기가 만만치 않다. 한 때는 미니스커트의 길이를 무릎 위 몇 센티미터까지 허용한다고 규정하기도 했지만 그 규정은 유야무야 사라지고 말았다. 젊은이들 사이에 흔히 쓰는 말로 ‘하체가 부실하다’라는 말을 쓴다고 한다. 생소한 말이라서 무슨 말 뜻이냐고 물은 적이 있다. 바지의 길이가 초미니로 짧아진 것을 표현하는 말이라는 설명을 들었다.
이러한 현실을 기성세대가 꼭 탓할 일 만은 아닌 듯하다. 어쨌든 세상은 젊은이들이 주도적으로 이끌고 가기 마련이다. 의상문화의 트렌드 쯤으로 표현한다면 적적할 듯하다.
부처님의 상수 제자인 마하가섭(摩訶迦葉)은 두타행(頭陀行)에 전념 하였다. 바라문 출신인 그는 아난(阿難)과 나눈 대화가 있다.
<상응부경전> 권2에 마하가섭이 아난을 ‘젊은이’라고 부른 것에 대하여 “마하가섭이여! 나의 두발(頭髮)도 회색이 되었으니 다시는 나를 젊은이라고 부르지 마세요.”라고 아난이 말했다. 한 비구니는 ‘가섭은 예전부터 지금까지 이교도였는데 정통의 제자 아난을 젊은이 라고 부르는 것은 지나치지 않는가’라고 비난하기도 하였다. 이 말을 들은 가섭은 ‘부처님이 본인이 입었던 옷을 나에게 주었으므로 부처님의 옷을 받은 나야말로 스승의 가르침을 계승한 정통(正統)이다’라고 말했다.
옷을 범어로 cīvara라고 한다. 이 말은 일반적으로 옷이라고 하나 불교와 자이나교의 수행자들이 입는 분소의(糞掃衣)를 이르는 말이다. 위 경전의 내용에서 이심전심의 유형(有形)의 징표가 되었던 것이다. 스승으로부터 옷을 받는 것이 곧 법을 계승하는 것이 되었다. 이와 같은 전거에 의하여 선종에서는 가섭이 부처님으로부터 옷을 받았다는 것을 소중히 여겨 부처님의 정법은 마하가섭에게 전해졌다고 여기게 되었다.
선종에서는 일반적으로 세 벌의 옷을 말한다. 울다라승ㆍ승가리ㆍ안타회이다. 울다라승은 정장용이고, 승가리는 외출용이며 안타회는 작업용의 옷이다. 선종에서 최초에는 옷 만이었으나 후대에 가면서 발우를 더하여 징표로 삼았다. 발우는 범어로 pātra 라고 한다. 동사로는 ‘마시다’ㆍ‘들이키다’ㆍ‘삼키다’의 뜻이고 명사는 ‘마시는 그릇’이라는 말이다. 동의어로 Bāra 가 있다. ‘아가리’ㆍ‘종지’란 말이다. 발우는 원래 철로 만든 발우[鐵鉢]와 기와로 만든 발우[瓦鉢]가 주종을 이루었으나 우리나라에서는 나무로 만든 발우[木鉢]를 쓰고 있다.
발우야 말로 수행자가 탁발할 때 없어서는 안 될 필수품 일 뿐 아니라 일용품인 것이다. 중국에서 의발이란 불법(佛法)이요 불도(佛道)의 의미로 이해되었다. 스승이 제자에게 의발을 전한다고 하는 것은 불법을 전한다는 의미가 되었다. 이심전심의 징표는 의발로 표시되었다.
언제부터인가 그 의발의 전승은 본래 의미가 상당히 탈색되기 시작하였다. 서릿발 같은 전법의 세계가 물질이란 이끼가 덕지 덕지 끼이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지근거리에서 조석으로 보고 따르는 제자가 있으면 의발을 전하는 사례를 주변에서 쉬 볼 수 있다. 그러한 의발의 전승이 불조의 혜명을 밝히는 등불이 되기에는 미미할 뿐이다. 부처님의 본래 마음에 부합하는 일이 아닐 터이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열반시에 자리를 지켜보지 못했던 마하가섭에게 법을 부촉하였다. 당시 그는 스승 곁에 있지 않고 의ㆍ식ㆍ주에 관한 탐욕을 없애는 두타행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체가 부실한 젊은이여! 그대가 입은 짧아진 옷 길이 못지않게 주시할게 있다. 어느 늪에 빠져 잔주가 심한 자신의 영혼을 구출하는 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