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가 일상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사람에게 아주 작은 도움도 주지 못할 정도로 쓸모없는 책은 세상에 한 권도 없다’는 말이 있다. 이 소중한 책을 읽다 보면 중요한 부분이 그냥 묻히고 마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기에 기를 쓰고 적바림을 해 둔다. 나중에 참고하기 위함이다. 여기에 못 미치면 행간에 밑줄이 그어지고 여러 형태의 표식도 한다. 재벌질의 경우엔 옆잡이가 첨가돼야 후일에 큰 도움이 되기도 한다.
고전 중에 이런 말이 있다. ‘일생 하늘을 이고 다니면서도 하늘의 높이를 모르고, 땅을 밟고 다니면서도 땅의 깊이를 모른다’고 가르친다. 이러한 말을 무색하게 한 자연과학자가 있다. “하늘은 얼마나 높을까”라고 천문학자 이석영은 명제를 던지고 있다. 하늘의 높이는 생각하기 나름이라고 한다. 구름이 동동 떠다니는 곳까지만 하늘이라고 생각하면 그 높이는 고작 10킬로미터에 지나지 않는다. 햇빛이 산란돼 파랗게 보이는 곳이 하늘이라면 높이는 100킬로미터에 이른다. 별이 반짝이는 곳까지를 하늘이라고 하면 9500킬로미터까지이고, 별과 별 사이의 까맣게 보이는 허공까지가 하늘이라면 그 높이는 자그마치 137억 광년이나 된다고 한다. 불교에서 광대한 허공을 ākāṡa라고 한다. 그리고 하늘의 높이는 지금도 매일매일 높아지고 있다고 한다.
<벽암록> 제55칙의 내용이다.
도오(道悟) 선사가 점원(漸源)을 데리고 상가에 문상을 갔다. 점원이 상가에 들어가더니 관을 두들기며 “살아 있습니까, 죽었습니까?”라고 물었다. 도오 선사는 “죽었다고도 못하고 살았다고도 못한다”고 대답했다. 돌아오는 길에 점원이 말했다. “스님 빨리 말씀해 주십시오. 만약 말씀해 주지 않으면 스님을 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도오 선사가 “치고 싶으면 쳐도 좋지만 살았느냐 죽었느냐 하는 문제는 말할 거라곤 없다”고 대답하니 점원이 한 대 쳤다. 도오 선사가 열반한 후 점원은 석상(石霜) 선사를 찾아갔다. 그리고는 이전 이야기를 꺼냈다. 그랬더니 석상 선사도 “살았다고도 못하고 죽었다고도 못한다”고 답했다. 점원이 “어째서 못합니까?”라고 물으니 석상 선사는 “‘못하지, 못해”라고 대답했다. 그 말 끝에 점원은 당장 깨우침을 얻었다.
상가(喪家)에 문상을 갔다고 했는데 시다림을 간 것이다. 시다림의 어원을 보자. Ṡīta-vana를 음역해 시타림(屍陁林)이 됐다. ṡīta는 ‘추운’, ‘쌀쌀한’의 뜻이 있고 ‘찬물’이란 뜻도 있다. vana 는 ‘숲’, ‘덤불’을 뜻한다. 한역(漢譯)으로는 한림(寒林)이라고 표기한다. 인도인의 평생 소원 가운데 하나는 갠지스강에서 임종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강의 찬물에 육신을 부려 놓는 것이다. 그렇지 못한 경우 덤불이나 숲속에 영면하는 것이다. 불교의식에서의 시다림과 시다림의 어원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신삭(新削) 시절에 품었던 의구심 가운데 인도의 말이 중국에서 번역할 때 정확도가 얼마나 될까 퍽이나 궁금했었다.
<벽암록>을 더 살펴보자. 어느 날 점원이 가래를 들고 법당 위에 올라가 이리 저리 왔다 갔다 했다. 석상 선사가 “뭐하는 짓이야?”라고 물으니까 “돌아가신 스님의 사리를 찾고 있습니다”라고 점원이 대답했다. 석상 선사가 “온 천지가 스님의 사리로 가득 찼는데 어떤 사리를 또 찾는단 말이냐?”라고 반문했다.
필자의 신간 <한국을 빛낸 선사들>을 읽고 한 언론사에서 찾아 왔다. “요사이 선수행자는 많은데 활안종사는 없다고 하는데…”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선사는 지천(至賤)인데 알아보지 못할 뿐이다”라고 답했다. 마치 돼지의 눈에는 돼지 같이 보이고 부처의 눈으로 보면 부처만 보인다고 농(弄)을 나눈 무학 스님과 이태조의 얘기를 곁들이기도 했다.
꽃은 아름답다. 근심과 수심이 가득한 사람에게 꽃이라고 아름답게 보일 리 없다. 감미로운 선율도 소음에 지나지 않는다. 나의 마음을 옥양목(玉洋木)을 펼쳐 놓듯이 확 펴 놓았을 때 세상의 모든 것이 제대로 보이고 들리는 것이다.
학문의 세계는 항상 구분을 짓는다. 가령 그 피부색에 따라 백인·흑인·황색인의 셋으로 나눌 때에는 피부색이 구분원리이다. 그러나 선의 세계는 구분짓기를 꺼린다. 이것이기도 하고 저것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혹자는 그러한 애매모호한 말이 어디 있느냐고 반문할 수 있다. 똑같은 사물도 보는 사람의 용량에 따라 천차만별이듯이 진리의 세계는 뭐라고 단정 지을 수 없다. 단정하는 순간 언어의 노예가 되고 그 울을 벗어나지 못해 구속이 된다.
아마 지금도 천문학자는 망원경을 보며 하늘의 높이를 계산하고 있을 것이다. 그 끝없는 여정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