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형태는 다양하다. 사람의 손이 가지 않으면 그 다양함은 한 형태의 모습일 뿐 우리에게 의미를 전하지는 못한다. 책은 마침내 독자가 펼치는 순간 정형(定形)에서 부정형(不定形)으로 탈바꿈 하게 된다. 정형 보다 부정형 하면 불안정한 상태를 떠올리기 쉽다. 그러나 정형 보다 훨씬 값진 모양이 부정형이다. 생각을 깊이 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고정된 것은 부패하기 쉽고 곧 퇴보해버리거나 망가지기 일 수 이다. 그러나 살아 있는 것의 속성은 아주 다르다. 움직이고 있다는 말이다. 이 모습인가 하면 어느새 변하여 저 모습이 되기도 한다. 책 또한 독자의 손길이 미치지 않으면 한낱 물질에 지나지 않지만 책장을 펼치는 순간 독자의 뇌와 눈의 작용은 활발해지고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기도 하고 환희가 넘쳐나기도 하며 깊은 상념에 빠져들기도 하는 마력을 지니고 있다. 책이야말로 인류의 역사를 확 바꾸어 놓은 대역사(大力士)가 아닌가 한다.
당송 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인 왕안석(王安石)은 권학문(勸學文)에서 다음과 같이 읊고있다.
가난한 사람은 책 때문에 부유해지고 貧者因書富
부유한 사람은 책 때문에 귀해진다 富者因書貴
책을 읽어 영화 누리는 것은 보았지만 只見讀書榮
책을 읽어 실패하는 것은 보지 못했다네 不見讀書墜
독서야 말로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는 묘약임을 강조하고 있다. 이렇게 소중한 글을 선에서는 무용지물로 만들고 만다.
불립문자라는 말이 그렇다. 불립문자 교외별전 직지인심 견성성불(不立文字 敎外別傳 直指人心 見性成佛)이란 사구(四句)는 달마대사가 한 말이라고 한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정확하지는 않지만 이 말은 아마 8세기 후반에서 9세기 전반에 걸쳐 쓰이게 되었다고 보는 편이 합당하다고 본다. 규봉종밀(圭峰宗密, 780~841)의 <선원제전집도서> 권상에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불립문자란 ‘문자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말이지 ‘문자를 세우지 않는다’는 말은 전혀 아니다. 간간이 주변에서 문자를 세우지 않는다고 말 하는 이를 보면 왠지 뜨악한 사이가 되고 만다. 여기서 문자란 말이나 음절이란 의미가 있으나 실은 경전이나 논서를 가리키는 말이다.
<능가경>의 한역본(漢譯本)에 문자라는 말이 있는데 범어 akshara 를 번역한 말이다. akshara 는 ‘문자’라는 말 뿐만 아니라 ‘소리’, ‘단어’, ‘종교적 고행’, ‘희생’ 등 다양한 뜻을 지니고 있다. 대정장 16권 <능가아발타라보경> 권4(p.506中) 가운데 불립문자에 해당하는 말이 있다. ‘문자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불타문자(不墮文字)가 있고 혹은 ‘문자를 여읜다’는 이문자(離文字)가 있다. 중국 초기 선종사에서 <능가경>은 중요한 몫을 차지하게 된다. 달마는 혜가에게 4권 <능가경>을 전수하면서 “내가 중국에 들어온 후 이 경전만큼 불설(佛說)다운 것을 보지 못했다. 어진 사람은 이것으로 만족할 수 가 있을 것이다. 혜가여! 그대에게 그 진리의 더욱 심오한 것을 내려주려한다”고 하였다.
진리를 전달함에 문자라는 수단으로 전달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보는 것이 선의 입장이다. 이는 비단 선종에서만 표방하고 있지는 않다. 노자 또한 도를 언어로써 표현한다거나 서술할 수 없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이런 결론을 내리고 있다. 도를 아는 사람은 도가 이렇다 저렇다 말 하지 않고(知者不言), 도가 이렇다 저렇다고 말 하는 사람은 도를 모른다(言者不知)고 말하지 않았던가. 성리학에서도 칠분도설(七分度說)을 들어 언어나 문자의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진리나 실재물을 표현함에 7할은 언어나 혹은 그림으로 표현이 가능하지만 나머지 3할은 불가능 하다는 것이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도 말이나 글로 어찌 다 표현할 수 있을까. 현관을 나서는 자식을 보는 눈길과 손길에 부모의 사랑이 넘쳐나고 있는 것이다. 굳이 수량으로 사랑의 척도를 드러내지 않아도 된다. 말이 어눌해도 무방하다. 손길이 등이나 어깨에 미치지 않아도 하등 문제될 일이 아니다. 그 아들은 오늘도 책을 펼쳐 부정형의 세계에 빠져들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