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그친 후의 하늘은 눈이 시릴 정도로 파래서 차크라발라 산의 어둠이 오히려 더 부각되는 느낌이었다. 사람들은 이제 막 수아나를 강물에 띄우고 있었다. 발견됐을 때 입고 있던 옷도 강에 던져졌다. 그녀의 몸이 서서히 강물을 따라 흘러가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장례 행렬을 따라온 몇몇 아이들이 울음을 터뜨렸다. 어른들 역시 먹먹한 표정으로 그런 아이들을 달랬다.
“수아나와는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될 거란다.”
난다는 부모님과 할아버지, 그리고 쎄라를 떠올렸다. 정말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되는 걸까. 그렇다고 해도 서로를 알아볼 수조차 없을 텐데, 그것을 재회라고 할 수 있는 걸까. 그런 말을 위로로 삼는다는 건 그 아이들에게도, 난다 자신에게도 어려운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난다는 강물에 비치는 자신의 얼굴을 멍하니 쳐다보다 수아킴이 부르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수아킴은 집에서 싸 가지고 온 보리빵과 역시 보리로 빚은 술인 창을 마을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있었다.
“여기 사람들의 풍습이지. 하지만 이렇게 금방 또 저 창을 마시게 되리라고는 생각지 않 았을 거야.”
몸을 드러낸 나크였다.
“사람들이 아무도 살인자를 찾으려 하지 않는 게 놀라워요.”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살인자를 찾아낸다고 해도 이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어. 누 가 누구의 죄를 묻고 벌준다는 건 상상조차 하지 못할 일이거든.”
“그가 저지른 죄가 곧 그를 벌한다, 또 그 말을 하시려구요?”
“맘에 안 드나? 대신 이들은 그 죄에 대해 용서하지도 않을 거야. 벌을 주는 것도, 용서 하는 것도 다른 누군가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니까.”
난다는 보리빵을 조금 떼서 입에 넣었다. 아무런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수아킴이 자기 쪽으로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나크의 몸이 다시 투명해졌다.
“잃어버렸다는 그 여자 아이는 찾았니?”
수아킴이 난다 옆에 털썩 주저앉으며 말했다. 난다는 그제야 데비 생각이 났다.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거지?’ 이상하리만치 데비에 대해서는 별 걱정이 되지 않아 놀랍기까지 했다.
“아니, 아직 찾지 못했어요.”
“흠. 도대체 어떤 아이인 걸까.”
난다는 수아킴의 의도를 알 수 없어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아니, 이제 비도 그쳤으니 좀 찾아봐야 하지 않을까 싶어서 말이야. 네 친구를 계속 창 고에 내버려둘 수도 없잖아?”
수아킴은 진심으로 걱정이 된다는 말투로 이야기했다. 난다는 그런 수아킴의 태도가 어쩐지 이상했다. ‘지금이 나와 무니 걱정을 할 때인가.’ 고개를 갸웃하는데, 사람들이 갑자기 우르르 언덕으로 올라가는 모습이 보였다.
“무슨 일이지요?”
“아마 잠부에서 온 배가 보이기 때문일 거야.”
수아킴은 난다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부에서 배가 왔다구?’ 난다는 놀라서 사람들이 올라간 언덕을 쳐다봤다.
수아나의 장례 때문에 마을은 아직 텅 빈 상태였다.
“생각보다 오래 걸리는데, 그렇지?”
무니가 칸타카를 보며 말했다. 그때 막 잠에서 깬 데비가 무니를 향해 쪼르르 달려와 매달렸다. 무니는 좀처럼 자신에게 먼저 다가오는 법이 없는 데비였기에 조금 당황스러워하며 그런 그녀를 쳐다봤다.
“배고파.”
“그래. 네가 그럼 그렇지.”
무니는 그녀에게 아침에 수아킴이 주고 간 보리빵을 건넸다.
“이렇게 매끼를 꼬박 챙겨 먹어야하는 녀석이 도대체 며칠 동안 어디서 어떻게 살았냐?”
그러나 눈 깜짝할 사이에 빵을 다 먹어버린 데비의 귀에는 이미 무니의 말은 들어오지 않았다. 칸타카의 꼬리를 세 갈래로 땋는 일에 몰두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자기 필요할 때만 말을 거는군.”
무니는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비가 휩쓸고 간 마을은 휑한 느낌을 주었다.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푸른 하늘 역시 따뜻해 보이기보다는 차가워 보였다.
무니는 사라졌던 데비가 돌아온 그 밤을 떠올렸다. 그날 밤, 무니는 세 번째 검 조각의 힘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었다. 검 조각을 손에 쥐고 집중하자 조각을 들고 있던 손이 투명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온 몸이 자신이 속한 공간에서 완전히 지워졌던 순간의 놀라움은 아직도 생생했다.
“기다릴 것 없이 그냥 한 번 나가볼까…….”
무니는 혼잣말을 하며 가방에 들어있던 아루나검을 꺼냈다. 이 마을에는 애초에 문을 걸어 잠그기 위한 자물쇠 같은 게 없었다. 바람에 문이 열리지 못하도록 헐거운 걸쇠만이 달려있을 뿐이었다. 그러니 사실상 무니가 마음만 먹는다면 안에서도 충분히 열 수 있었다. 문을 열 이유가 없었을 뿐이다. 무니는 검을 문 틈 사이에 집어넣어 걸쇠를 풀어냈다. 칸타카와 데비가 동시에 무니 쪽을 쳐다봤다.
“잠깐 나갔다 올 테니까. 데비 너, 여기 꼼짝 말고 있어. 칸타카, 쟤 잘 지켜야 된다!”
칸타카는 꼬리를 흔들어 보였다. 무니 역시 고개를 다시 한 번 끄덕여 보이고는 손가락으로 문을 툭하고 밀어냈다. 끼익하는 소리와 함께 창고 안으로 햇빛이 들어왔다. 무니는 주머니에서 진주 모양의 검 조각을 꺼내 손에 꼭 쥐었다. 그러자 몸의 형체가 희미해지기 시작하더니 투명하게 변해갔다.
무니는 일단 수아나의 집에 가보기로 했다. 마을에 남아있는 사람이라고는 그 아이의 부모들 밖에 없어 찾기는 쉬웠다. 이윽고 어두운 집 안에 혼자 앉아 눈물을 닦아내는 여자를 발견한 무니는 그 안으로 조용히 들어갔다. 마루처럼 보이는 곳에는 여기저기 옷들이 흩어져 있었고, 화덕에는 방금 불을 지핀 듯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뭔가를 태우고 있는 모양이었다. 무니는 수아나의 엄마로 짐작되는 그 여자의 뒤편에 조용히 서서 무엇을 태우는 것인지 지켜봤다. 죽은 여자애의 물건이겠거니 했던 짐작과는 달리 타고 있는 건 남자용으로 보이는 옷이었다. ‘왜 남자 옷을 태우는 거지?’ 그때 구석에 있던 방에서 한 남자가 나오더니 여자에게 뭐라고 말을 걸었다. 수아나의 아빠일 것이다. 무니는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여자는 남자의 말에 입을 막으며 울음을 삼켰다. 그 상태로 여자가 뭐라고 대꾸하자, 남자 역시 힘겨운 말투로 뭔가를 길게 설명했다. ‘답답해!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야?' 무니가 그렇게 답답해하는 사이 남자는 여자 바로 옆, 그러니까 무니가 서 있는 곳까지 다가와 있었다. 그제야 남자가 바로 자기 옆까지 와있다는 걸 알게 된 무니는 깜짝 놀라 문 쪽으로 걸어갔다. 발소리를 최대한 줄인다고 줄였지만, 남자가 이상한 기분을 느꼈는지 그가 움직이고 있는 쪽을 쳐다봤다. 무니는 발걸음도, 숨소리도 멈추고 그대로 정지한 채 남자가 주의를 돌리기만을 기다렸다. 남자는 입구 쪽을 쳐다보며 고개를 갸웃하더니,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자 다시 아내 쪽으로 몸을 돌렸다. 무니는 그 모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다가 얼른 다시 들이켰다. 아무리 투명인간이 되었다고 해도 숨소리까지 투명해지는 것은 아니니까 말이다. 무니는 손 안에 든 진주 모양의 검 조각에 온 정신을 집중하기 위해 노력했다.
나크는 정신이 없었다. 조용했던 사람들이 저마다 목소리를 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말을 좋아하긴 했지만, 시끄러운 건 딱 질색이었다. 난다 역시 사람들의 그런 모습에 어리둥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수아킴도 그렇고, 지금 이 상황도 몹시 부자연스러워서 낯설게 느껴졌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들을 하는 거죠?”
“잠깐만 기다려봐. 요약이 필요하니까. 아무튼 설탕과 철에 관한 이야기야.”
답답하지만 별 수 없는 일이었다. 사람들은 쉽사리 입을 다물 거 같지 않았다. 알 수 없는 건 사람들 모두가 한 사람과 대화를 나눈다는 것이었는데 그 대상이 바로 수아킴이라는 사실이었다. 난다는 문득 아까 수아킴이 말을 걸었을 때 떠올랐던 이상한 느낌과 나크가 말한 ‘설탕’이라는 단어가 어쩐지 연관이 있는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설탕과 철을 교환하기로 했다는 이야긴가요?”
난다가 참지 못하고 나크에게 물었다. 그들의 말에 집중해 완전히 그 형체를 드러냈던 나크는 순식간에 다시 투명해졌다.
“뭐야! 네가 지금 차크라발라 말을 알아듣기라도 했다는 거냐?”
기분이 나쁘다는 말투였다.
“아니에요. 그게 아니라, 전에 살해당한 그 남자 이야기가 생각나서요.”
“아. 그래?”
거의 투명해졌던 나크가 조금씩 다시 형체를 드러내며 말했다. 여지없이 귀를 만지작거리는 모습이었다.
“흠. 아무래도 저 수아킴이라는 자가 죽은 데첸이라는 친구 대신 잠부의 귀족과 통신하는 역할을 맡았던 모양이야. 철을 차크라발라 밖으로 가져가는 일이 불가하다는 것을 알리긴 했지만, 그 외에도 여러 차례 연락이 왔던 모양이거든. 철의 쓰임에 대해 데첸이 오해를 하고 떠났다고 말이지. 아무튼 저 수아킴은 잠부에서 보내온 연락을 충실히 마을 사람들 에게 전한 모양이지? 그러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