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일단 말을 전했다. 나가세나님은 아마 지금도 잠부에 있으실 것이다. 크리슈나님께 전하든가 말든가, 그건 네가 결정할 일, 이제부터는 내 알 바 아니다.”
테드모는 다친 어깨를 부여잡은 채 뒤돌아섰다. 안개 속으로 흩어져 가듯 그의 모습이 천천히 희미해졌다. 그의 형체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그 모습을 지켜보던 반두는 어딘가로 급하게 걸어가기 시작했다. 안개는 점점 더 짙어지고 있었다.
난다는 창밖을 바라봤다. 조금 약해지긴 했지만, 여전히 쏟아지는 비 때문에 외출이 어려운 형편이었다. 그는 시선을 돌려 집안을 둘러봤다. 수아나의 집은 아늑했고, 수아나의 가족들이 난다를 향해 짓는 미소는 순박하고 친근했다.
차크라발라 사람들의 집에는 대체로 방이 많지 않았다. 대체로 부부의 침실만 개별적으로 마련되어 있을 뿐, 가족 구성원의 독립적인 공간이 따로 있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나마 그 침실도 환자가 생길 경우에나 드물게 사용되는 듯, 대체로 비워두었다. 그들은 커다란 마루 같은 방에 모두 모여 함께 식사를 하고 차를 마시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잠들었다. 그리고 그 방의 한 가운데에 있는 화덕을 난방과 조리 용도로 사용했는데, 지붕에 작은 구멍을 뚫어 그 연기를 빠져나가게 했다. 난다가 이 집에 처음 왔을 때도 수아나의 엄마는 그 화덕 위에 올려져있던 주전자를 내려 뜨거운 차를 끓여주었다. 그렇게 난다가 이 집에서 머문 지도 벌써 닷새째였다.
“지루하다는 표정이군.”
나크였다. 난다는 깜짝 놀라 자기 옆에 서 있는, 아니 떠 있는 나크를 쳐다봤다. 안 그래도 오늘 아침부터 그가 보이지 않아, 누구하고도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누지 못하고 있던 참이었다.
“어디 다녀오셨나요?”
“정령이 가고 오는 것을 인간에게 설명해준들 알아들을 수 있겠나?”
나크는 자신의 귀를 만지작거리며 대답했다. 그러다가는 당나귀처럼 귀가 늘어날 것만 같았다. 정말 처음 봤을 때보다 확실히 커진 느낌이었다. 기분 탓이겠지.
“무니에게 가보려고 하는데, 아무래도 가족들이 제가 이곳을 나가는 걸 좋아하지 않는 거 같아서요.”
“흠. 이곳 사람들은 어둠의 시간을 악령의 시간이라고 하지. 그래서 문을 열 생각조차 않 아. 어쩌면 살인이 있었기 때문에 더 그럴 런지도 모르고. 특히 그 살해당한 남자가 수아 나의 오빠하고도 매우 친한 자였다고 하거든. 살인이라니 말이야! 말세야, 말세.”
나크는 자신의 형체를 드러냈다 감췄다하면서 속삭이듯 말했다. ‘살인’, 이제 난다에게도 완전히 낯선 단어는 아니었다. 하지만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꿈에도 없었다.
나크가 그때 통역해 줬던 수아나의 오빠 수아킴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았다.
차크라발라라는 거대한 산의 봉우리는 모두 여덟 개였다. 그러나 너무 척박하고 험준하여 사람이 거주할 수 있는 곳은 지금 그들이 머물고 있는 마을, 파덤 뿐. 이들 원주민의 조상은 위대한 일곱 현자 중 한 명으로 짐작되었다. 차크라발라는 원래 바다 아래 잠겨있던 산으로 그 현자가 거대하고 강력한 자석을 이용해 지상으로 끌어올렸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살 만큼의 땅을 개간했는데, 그곳이 바로 이 마을이었다. 차크라발라 사람들의 관계는 거대한 가족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서로를 형이나 누나, 혹은 동생으로 부르며 친밀하게 지냈다. 각각인 듯, 하나인 주거 형태가 이를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자급자족의 생활을 했다. 다른 대륙과 교류가 있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몇몇 탐험가들이 남긴 기록도 이를 뒷받침한다. 하지만 최근에 잠부에서 자신을 귀족이라고 칭한 남자의 무리가 그들의 마을을 찾아온 일이 있었다. 그것은 매우 충격적인 경험이었다. 그는 차크라발라의 고유어를 능숙하게 구사했으며, 낯설고 신기한 물품들을 많이 가지고 와서 그들에게 구경시켜 주었다. 그 중에서도 사람들의 마음을 가장 끌었던 것은 설탕이라는 음식이었다. 그들에게 ‘단 맛’은 완전히 새로운 종류의 맛이었다. 보리와 조에서 나온 젖만이 주식이었던 사람들이 모두 그 맛에 빠져들었음은 물론이다. 처음에 그 남자는 원주민들의 그런 반응에 진심으로 기뻐하는 거 같았다. 그는 더 많은 설탕을 제공하고 싶다는 말까지 했다. 차크라발라 사람들에겐 ‘거래’라는 개념이 없었다. 그들은 그 말을 그저 남자의 순수한 호의로만 여겼다. 하지만 이내 그 남자는 그들에게 설탕 대신 차크라발라 산들의 철을 조금 캐 갈 수 있겠냐고 제의했다. 사람들은 철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기에, 모두들 선뜻 동의했다. 잠부에서 온 사람들이 철로 무엇을 할 것인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철을 싣고 떠나는 귀족과 동행했던 것은 수아킴의 친구인 데첸이었다. 그리고 그는 잠부에 도착해서야 철이 무엇에 쓰이게 될 런지 알게 되었다. 바로 무기였다. 귀족의 설명을 듣기 전까지, 데첸은 도대체 무기라는 것이 무엇인 지도 몰랐다고 한다. 설명을 들은 데첸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고, 그 용도 자체에서 공포를 느꼈다. 오로지 사람을 위협하고 해치기 위한 물건을 만들다니. 데첸은 그 길로 귀족에게 다시 배를 청해 차크라발라로 돌아와, 그 사실을 사람들에게 알렸다. 그 결과, 주민 모두 잠부로 철을 가져가는 것에 대해 반대의 의견을 모았다. 사람들은 돌아가는 배편에 마을 사람들의 뜻을 전했고, 그것으로 소동은 끝났다. 아니, 끝났다고 여겼다. 바로 그 데첸이 누군가에게 살해당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난다는 수아나의 오빠를 쳐다봤다. 그는 동생과 함께 실뜨기를 하고 있었다. 그지없이 다정한 남매의 모습이었다. 수아나가 뭐가 잘 안 되는지 미간을 찌푸리며 입술을 삐쭉거렸다. 난다는 순간 가슴이 찌릿하며 아파왔다. 쎄라가 자주 짓던 표정이었기 때문이다. 처음에 수아나를 봤을 때, 자신이 얼마나 놀랐는지 떠올랐다. 두 사람은 이목구비가 닮기도 했지만 묘하게 겹쳐지는 표정이 많은 얼굴이었다. 난다는 쎄라가 선물한 목도리를 아직도 가지고 다녔다. 수아나는 꼬여버린 실들을 가지고 안간힘을 쓰다 손을 탁 놓더니 난다에게 쪼르르 달려왔다. 그녀가 쎄라와 다른 점이 있다면, 이렇게 난다에게 다정하게 군다는 점이었다. 그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수아나가 내민 손을 붙잡고 화덕 결에 가서 앉았다. 내내 불 곁에 있던 까닭인지 수아나의 작은 손은 따뜻했다. 살인이라니, 이곳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다.
비는 약해졌다가 강해졌다가 하면서 줄기차게 내렸다. 이런 날, 무니는 엄마와 함께 창밖을 보며 따뜻하고 달콤한 벌꿀차를 마시곤 했었다. 어떤 위험도 없는 평화로운 나날이었다.
“살인이라니…….”
무니는 보리 짚단을 쌓아놓은 창고에 배를 깔고 누워 수리아의 검 조각을 살펴보고 있던 중이었다. 용케 벌써 세 개의 조각을 모은 상태였다. 그리고 이제 그 조각이 원래 자리하고 있던 아루나검도 가졌다. 바로 이것이 무니가 지금 갇혀있는 이유였다. 검을 사람들에게 맡겨둘 수 없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검은 무니가 목에 걸고 있는 검 조각들과 마찬가지로 서로 떨어지지 않으려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아무튼 그 나크라는 영감의 말을 들어보니, 마을 사람들 모두 지금 이 상황을 안타깝게 생각하긴 하는 모양이었다.
몇 달 전에 살인 사건이 있었고, 마을 사람들이게 무니는 무기를 들고 찾아온 외부인이었다. 물론 당장 떠나면 될 일이었지만, 데비가 또 사라지고 말았다. 무니는 ‘살인’이라는 단어만으로도 공포를 느꼈다. 칼키가 생각났다. 그 아이는 사람을 죽이려다 얼음의 성에 갇혔었다고 했다. 그때 자신이 얼마나 놀랐던가. 화재로 평화로운 일상을 모두 잃어버린 후, 많은 걸 보고 겪은 무니였지만 사람이 다른 사람을 죽인다는 건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래서 처음에 나크가 그 말을 전해주었을 때 무니는 난다보다 정확히 열 배 정도 더 놀랐다. 아마 난다가 무니보다 덜 놀랐던 건 많은 책을 읽었기 때문이리라. 그런데 이상한 건, 그들이 아무도 그 살인자를 찾아내려 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죄인을 벌하는 것은 사람도 그 무엇도 아닌 그 스스로가 저지른 죄라고 했던가. 그렇기 때문에 누가 죄를 사하여주는 것도, 대신 받아주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이다. 마을 사람들은 살인자를 찾아 굳이 벌하지 않아도, 그 스스로 그 대가를 치를 것이라 생각한다고 했다. 하지만 또 살인이 일어난다면? 게다가 도대체 데비는 도대체 어딜 헤매고 다니는 것인지,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무니는 옆을 돌아봤다. 칸타카가 선 채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그런 칸타카를 보고 있으니 마음이 조금 안정 되는 기분이었다. 무니는 다시 수리아의 검 조각을 들어 살펴보기 시작했다. 모양은 물론이고 각각의 성격도 분명히 달랐다. 문제는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있느냐’하는 것이었다. 일단 유리 영감이 그에게 주었던 작은 공깃돌 모양의 검 조각은 빛과 뜨거운 성질을 가지고 있는 듯 했다. 다음으로 칼키가 괴로움이 없는 연못에서 건져준 조각은 원래 가지고 있던 조각보다는 좀 더 작은 크기로 빛을 받으면 수정처럼 영롱한 빛을 냈다. 사막에서 있었던 일로 짐작해 보건데, 어둡고 차가운 성질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용이 사라진 자리에서 주운 검 조각은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이제까지처럼 위급한 상황이 닥칠 때까지 기다려봐야 하는 걸까. 가만, 지금 이 시점에서 위급한 상황이라니! 살인 사건이라도 또 일어난단 말인가. ‘데비만 나타나면 떠나자.’ 무니는 다시 한 번 다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