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크는 세상의 모든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정령이었다. 아주 오래 전 인간이었을 때부터 ‘말’에 푹 빠져 세상의 모든 것들을 다 잊고 오로지 언어에만 몰두하다 결국 정령이 되었던 것이다. 그는 우주의 언어까지 다 익혀서 하지 못하는 언어가 하나도 없다고 했다. 바로 이 취미가 난다가 그를 불러낸 이유였던 것이다.
“그럼 저희를 도와주실 건가요?”
난다는 공손한 말투로 물었다. 나크는 난다의 말을 들었는지 어땠는지 다시 “흠.” 하는 소리를 내고는 귀를 만지작거렸다. 아마 버릇인 듯 했다.
“어찌되었든 기왕에 날 불러냈으니, 도와주기로 하지. 나도 차크라발라는 정말 오랜만이 거든.”
난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사람들 눈에 띄는 걸 좋아하지 않는 나크는 통역을 부탁받을 경우, 보통 몸을 완전히 투명하게 만든 다음 부탁한 사람의 목소리를 흉내 내는 방법으로 사람들과 소통한다. 이번에도 나크는 마찬가지의 방법으로 사람들을 큰 소리로 불러 무니와 난다의 사정을 설명하고, 그들이 어디에 왜 갇혀 있는 지도 대신 물어봐 주었다. 대답하는 사람의 목소리는 방 밖에 있어서인지 잘 들리지 않았지만, 그들의 대화는 꽤 길게 이어졌다.
“저 밖에 있는 사람은 무슨 말이 저 영감보다 더 많아?”
무니가 말했다. 난나도 그렇게 느꼈지만, 대화에 계속 귀를 기울였다. 간간이 들려오는 사람의 목소리는 꽤 친절한 거 같았다. 딱딱하게 설명하기 보다는 천천히 사정을 설명해주고 있는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도 한참이 지나서야 차크라발라 사람이 뒤돌아 걸어가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고, 이내 점점 희미해져갔다. 나크는 무니와 난다를 흘깃 쳐다보더니, 또 다시 “흠.”하는 소리와 함께 귀를 만지작거리며 입을 열었다.
“거, 참. 차크라발라에 그런 일이.”
“무슨 말이 그렇게 많았던 거야?”
무니가 참지 못하고 영감한테 대뜸 질문을 던졌다. 눈을 감고 있던 나크가 번뜩 눈을 뜨더니 무니를 노려봤다. 그러자 투명한 몸이 조금 일그러지는 느낌이 들었다.
“저, 저 버릇없는 녀석!”
난다가 무니의 등을 찰싹하고 내려치며 나크를 향해 겸연쩍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나크의 기분을 상하게 해서 좋을 게 없다.
“죄송해요. 그런데 여기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무니와 난다를 번갈아 쳐다보던 나크가 다시 입을 열었다.
“살인 사건이 있었다는구만! 살인 사건이 말이야.”
무니와 난다는 깜짝 놀라 서로의 얼굴을 쳐다봤다. 칸타카 역시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꼬리를 불안하게 흔들기 시작했다.
한편, 혼돈의 대양 위에서는 거대한 뱀 아난타의 머리들이 또 다시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하고 있었다. 세로로 길게 모여 있던 천 쌍의 눈동자들은 뭔가를 경계하듯 한치의 어긋남도 없이 보다 날카롭게 번뜩였다. 크리슈나의 머리맡에 있던 금색의 수레바퀴는 이미 멈춘 상태였고, 가루다는 언제나처럼 멀찍이서 하늘을 배회하고 있었다. 아난타를 움직이게 한 건 크리슈나의 변화였다. 그의 속눈썹이 가볍게 떨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어 무슨 말이라도 나올 것처럼 입술도 달싹거렸다. 아난타는 자신의 주인이 수면기에서 깨어나는 순간임을 직감했다. 그들을 감싸듯 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역시 그가 눈을 뜨려나보구나. 아무래도 뭔가 변화가 느껴졌겠지.”
눈의 산에서 내려온 노인이 하늘을 쳐다보며 말했다. 금방이라도 비를 뿌릴 듯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아샹티는 귀를 쫑긋했다.
“그나저나 우선 비 피할 곳을 찾아야할 텐데.”
노인은 걱정스럽다는 듯 아샹티를 쳐다보다 자신이 걷던 거리를 둘러봤다. 캄포가 다스리는 잠부의 중심지였다. 이곳은 그가 마지막으로 방문했던 때와는 완전히 다른 도시 같았다. ‘왕이라니.’ 그가 예전에 이곳에 머무를 당시엔 그런 단어가 있지도 않았었다. 이때, 그의 옆으로 한 무리의 남자들이 발을 맞춰 걸으며 지나쳐갔다. 복장까지 모두 똑같은 걸로 맞춘 모습이 눈에 띄었다. 여기저기서 수군거림이 들려왔다. “도대체 칼키가 사라진 지가 언젠데 아직도 저렇게 찾아다니는 거야?” “이상한 소문이 떠도니 겁을 주려는 게지.” “하긴 죽었다 살아난 거나 마찬가지니, 인간에겐 있어선 안 되는 일이지.” “듣자하니 캄포왕이 루드라의 신탁을 더 이상 받지 못하는 것도 칼키 때문이라더군.” “그럼 그 소문이 진짜였던 말인가?”노인은 그들의 대화가 재미있다는 듯 점점 그들에게 다가가다 그만 그 중 한 명의 발을 밟고 말았다.
“어이쿠. 미안하게 됐네.”
“아닙니다. 어르신.”
화를 내려던 남자가 노인의 얼굴을 보고는 오히려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그런데 칼키라는 아이가 바로 얼음의 성에서 살아나온 그 아이를 말하는 겐가?”
“얼음의 성이요?“
남자는 되물었다.
“아. 아닐세, 아니야. 아무튼 그 아이가 행방불명이라도 된 모양이로구먼.”
“네. 그렇습니다. 어르신.”
“캄포왕이 루드라의 신탁을 더 듣지 못한다는 소문은 이미 많이 퍼진 상태인가?”
“아마, 그럴 겁니다. 어르신.”
노인은 “그렇구만. 잘 알겠네.”라고 고개를 끄덕여보이고는 가던 길로 뒤돌아 걸어갔다. 노인과 그 남자의 대화 모습을 지켜보던 다른 남자가 말했다.
“자네 저 영감하고 아는 사이라도 되는가?”
“아니.”
남자는 고개를 저였다.
“그런데 뭘 그리 공손하게 구는 거지? 발을 밟히지 않았나?”
“글쎄, 저절로 그렇게 되던걸. 워낙에 키가 크고 근엄해 보이는 얼굴이지 않았나. 아마도 귀족네 노인일 지도 모르고 말이야.”
“자네, 지금 무슨 소리하는 거야? 눈이 어떻게 된 거 아닌가! 저렇게 작고 볼품없는 노인 네를 보고, 귀족 같다고?”
그 말에 남자는 ‘응?’하며 다시 노인이 걸어간 방향 쪽을 쳐다봤다. 그러나 역시 그는 크고 위엄 있어 보이는 모습이었다.. 그는 다시 고개를 돌려 옆에 있던 친구를 쳐다보고는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순간, 빗방울이 그의 얼굴 위로 똑하고 떨어졌다.
비가 금방 억수같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거리는 순식간에 한산해졌고 주위는 저녁시간이라도 된 듯 어둑해졌다. 그러다 갑자기 번쩍하더니 백색 섬광이 하늘을 가르며 번쩍했다. 그러나 뒤이어 들려야 할 천둥소리는 한참이 있어도 들리지 않았다. 아이들은 천둥소리에 대비해 막고 있던 귀에서 손을 떼며 창밖을 바라봤다. 천둥소리 대신 또다시 번개가 번쩍했다. 아이들은 깜짝 놀란 듯 다시 귀를 막았다.
그리고 이 순간 하늘의 가장 높은 부분, 정확히 비데하의 중심지 위에 위치한 크리슈나의 신전에선 결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테드모와 크리슈나 신전을 지키고 있던 반두의 대결이었다. 테드모의 검과 반두의 창이 부딪힐 때마다 크고 작은 섬광이 그들 사이를 갈랐다. 지상에서 마치 번개처럼 보이던 바로 그것이었다. 비 대신 안개로 가득한 신전에는 두 사람의 무기가 쏟아내는 빛만이 번쩍번쩍하고 있었다. 두 사람의 실력은 막상막하였다. 공격은 힘차고 신속하게 이어졌고, 그에 따른 방어도 마찬가지였다.
“싸우려 온 게 아니다.”
테드모가 아까부터 반복했던 말이었다. 세 번의 방어와 공격이 끝난 다음이었다.
그러나 반두는 “흥!” 하고 콧방귀를 끼더니, 방어가 끝나자마자 공격을 감행했다. 창에서 뻗어 나온 반원형의 섬광이 테드모의 어깨 쪽으로 뻗어갔다. 테드모는 재빨리 공격을 피한 후, 공중으로 번쩍 뛰어오르며 말했다.
“나가세나가 눈의 산에 나타났다는 말을 하러 온 것이란 말이다.”
반두 역시 테드모를 따라 공중으로 몸을 날리다 깜짝 놀라 멈췄다.
“뭐라고? 나가세나님이?”
“그렇다.”
테드모는 대답과 동시에 어깨 부분의 통증을 느꼈다. 공격을 제대로 피하지 못한 것이다.
“그럼 지금도 눈의 산에 계신다는 말인가. 아니, 도대체 왜?
테드모는 서서히 심해지는 고통에 어깨를 부여잡고는 바닥으로 내려왔다.
“대답해라. 나가세나가 왜 루드라님의 영역에 가신 계지? 무슨 음모라도 꾸미는 것 아닌 가?”
“무슨 말을! 루드라님이 신전을 비우고 계시다는 걸 뻔히 알면서 모른 척 하지 마라.”
“만약 그게 아니라면, 하필이면 크리슈나님이 수면기에서 눈을 뜨시는 이런 중요하고도 위험한 순간에 나가세나님이 루드라님의 성지에 가 계시다는 걸 어떻게 해석하란 말이 지?”
“그건 내 알 바 아니다. 난 두 분 중에 누구든 일단 그 분을 찾아야 한다는 것만 알고 있 을 뿐이다. 그래서 이렇게 친히 알려주러 온 것이지. 그런데 지금 이게 그런 나에게 할 짓인가. 평화와 유지 어쩌구 하는 게 죄다 헛소리라는 걸 직접 보여 주는구나!”
테드모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반두는 그런 테드모를 어찌해야할 지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너와 내가 다시 만나면 둘 중의 하나가 끝을 봐야한다고 말한 건 너였다. 내가 변명할 이유는 없지만. 네가 가장 좋아하는 방법 아닌가. 끝을 보는 것!”
테드모가 냉소를 띄며 대답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