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은 눈을 부릅뜨더니 숨을 한 번 내쉬었다. 그러자 순식간에 큰 불길이 피어올랐다가 사라졌다.
“진실과 거짓, 둘 중 하나를 택하라고 말하였다.”
“이게 내 답이라고 말했잖아. 둘 다 진실도 거짓도 아니라는 것.”
무니는 용이 내뿜는 불길의 위협에도 자신의 대답을 번복하지 않았다.
발걸음을 멈춘 난다는 조심스럽게 용의 눈을 쳐다봤다. 이제 겨우 그들의 근처까지 다다른 참이었다.
‘무니 말이 맞아.’
난다는 생각했다. ‘질문을 한 우리’와 ‘답을 듣는 우리’는 같지 않다. ‘질문을 한 우리’에게 ‘답을 듣는 우리’는 미래가 되기 때문이다. 그 반대로 ‘답을 듣는 우리’에게 ‘질문을 한 우리’는 이미 과거인 것이다. 그러니 만약 '우리는 우리다'라는 명제를 진실로 선택하게 되면 과거, 현재, 미래가 모두 같다고 말하는 게 된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우리가 아니다’가 진실이겠지만 질문이 없으면 답도 없는 것처럼 과거와 분리된 현재는 없다. 물론 미래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이 대답은 용이 원하는 답이 아니잖아. 그럼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난다는 초조해졌다. 그때였다. 난다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무니가 용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이런 이상하고 바보 같은 말장난으로 불장난을 한 거란 말이야!”
그러자 화를 꾹 참은 듯, 목소리를 낮춘 용이 단호한 말투로 말했다.
“너는 우리 질문에 대한 답을 하지 않았다. 이제 사라져라!”
무니와 난다가 어떻게 해볼 사이도 없었다.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이미 세 머리 용이 뿜어대는 불길이 그들의 코끝까지 다가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순간 기이한 현상이 일어났다.
세상에 암흑이 찾아왔던 것이다. 난다는 깜짝 놀라 주변을 둘러봤다. 어둠이 온통 자신을 감싸고 있었고, 피부에 닿는 공기는 차가웠다. 몸은 붕 떠서 사지 어느 한 군데에도 힘을 줄 수 없었다. 그 어둠 속에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눈동자가 보였다.
“괜찮아?”
무니였다.
“어떻게 된 거야?”
서서히 몸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한 난다가 물었다. 눈도 어둠에 익숙해져서 희미하게나마 사물을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다만, 몸만은 여전히 공중에 뜬 느낌이었다.
“이번에는 이것 때문인 거 같아.”
무니가 뭔가를 꺼내 보였다. 어둠 속에서 반짝거리는 그 물건은 수리아의 검 조각을 모은 목걸이였다.
“그때 칼키라는 아이가 준 바로 그 검 조각이야.”
무니가 난다가 몸을 일으키도록 거들어주며 말했다.
“도대체 이 부러진 검 조각에서 어떻게 갑자기 이런 힘이 나오는 걸까? 날 따라와 봐.”
무니는 난다의 손을 끌고 암흑 속을 유영하듯 어딘가로 향했다. 그리고는 잘 보라고 말하며 쓱쓱 손으로 문질러 어둠을 지워냈다. 청회색의 투명한 유리막 같은 것이 나타났다. 그 막 밖으로 여전히 불을 뿜어내고 있는 용이 보였다. 난다는 문득 한기를 느낀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용이 그들 눈앞에서 불을 내뿜을 때마다, 뜨거워졌던 막은 금방 다시 차가운 암흑으로 감싸졌다.
“분명히 하나의 검이었을 텐데 말이야. 다른 하나는 분명 아주 뜨겁고 거대한 빛이었다 구. 그런데 지금은 이렇게 차가운 어둠이야.”
여전히 용을 바라보면서 무니가 말했다. 분명 괴로움이 없는 연못에서 검 조각이 내뿜었던 것은 눈이 멀어버릴 정도의 빛이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의 문제는 이런 게 아니야. 저 녀석들은 애초에 어디든 불태울 생각인 게 분명해. 이제 어쩌지?”
“아까 고대어를 쓰던 용들이 자신들을 죽일 수 있는 건 수리아의 검뿐이라고 했어. 하지 만 지금은 이런 조각 밖에는 없잖아. 그것도 8개 중에 2개라구.”
“하지만 분명 여기에 수리아의 검이 가지고 있던 힘이 어느 정도는 남아있는 거 같지 않 아?”
“그렇다고 해도 그걸로 어떻게 용을 죽일 수 있겠어? 찌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우리가 용의 입으로 가지고 들어가면 되잖아?”
난다는 깜짝 놀라 무니를 쳐다봤다. 그는 목걸이에서 칼키가 줬던 검 조각을 빼내고 있었다. 그것은 차가운 빛을 뿜어내는 원래의 불투명한 색에서 투명한 느낌의 회색이 되어있었다. 무니는 그 검 조각을 손에 쥐었다. 빛을 멈춘 것이다. 그러자 암흑의 크기가 줄어들더니 아까 그들이 보았던 청회색 막으로 변해갔다. 무니는 한 손에는 조각을, 다른 한 손으로는 난다의 손을 이끌고 조금 전에 했던 것처럼 수영하듯 불길 쪽으로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막이 사라지면서 몸이 점점 뜨거워졌고 옷자락 끝에는 불꽃이 일었다.
“얼굴이 타는 거 같아!”
난다가 외쳤다. 그건 무니도 마찬가지였다. 용의 입 속으로 가까이 갈수록 고통은 더욱 심해졌다. 두 사람은 손을 더욱 꼭 쥐었다. 그리고 용이 불을 뿜어내기 위해 숨을 들이키는 순간, 빨려 들어가듯 용의 몸속으로 들어갔다. 무니는 때를 놓치지 않았다. 목걸이에서 나온 차가운 빛은 다시 두 아이들을 감싸기 시작했다. 정신이 아득해져 갔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용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황량한 사막에는 두 소년 그리고 한 여자아이가 누워있을 뿐이었다. 제일 먼저 눈을 뜬 건 여자아이였다. 그 아이는 눈을 비비며 주위를 둘러봤다. 처음 보는 소년들이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 옆에 쭈그려 앉은 여자아이는 소년들을 이리저리 살펴보다 툭툭 몸을 건드려 봤다. 잠시 후, 한 소년이 눈을 떴다. 그러더니 벌떡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다행히 용은 보이지 않았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소년은 그제야 누군가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넌, 넌 뭐야?”
깜짝 놀라 소리친 소년은 바로 무니였다. 여자아이도 그 소리에 놀랐는지 그대로 주저앉아버리고 말았다.
“아마, 용이 삼켰다는 사하라의 그 여자애인가 봐.”
어느새 일어나있던 난다가 말했다. 여자애는 동그란 눈을 하고 두 소년을 번갈아 쳐다봤다. 보통 사람과는 좀 다르게 생긴 꼬마였다. 한 여섯 살쯤 되었을까. 피부는 투명할 정도로 하얬고, 커다란 보라색 눈동자와 오묘한 빛을 내는 황금색 동공은 신비로워보였다.
“용 안에 있었어. 여기서 주웠어.”
두 소년을 빤히 쳐다보던 여자아이가 문득 생각난 듯 손에 쥐고 있던 뭔가를 그들에게 건네며 말했다. 마치 진주 같아 보였다. 그걸 받아든 무니는 한눈에 그게 무엇인지 알아볼 수 있었다. 세 번째 검 조각인 것이다. 여자아이는 뚫어져라 그걸 쳐다보고 있는 무니의 옷깃을 다시 잡아당겼다. 자신을 따라오라는 뜻인 거 같았다. 무니와 난다는 여자아이가 이끄는 대로 따라가 봤지만, 거기엔 아무 것도 없었다.
“어, 아까 여기서 반짝했는데?”
여자아이가 의아하다는 듯 말했다. 그러나 바람이 휭~하고 불어오자 정말 잿더미 사이에서 석양빛에 반짝하는 무언가가 보였다. 그걸 본 난다가 말했다.
“저건 꼭 칼 같은데. 혹시?”
무니가 먼저 가서 칼을 주워들었다. 그 칼의 정체를 확인한 난다는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불에 타 사라졌을 것이라 생각했던 말은 그들을 내려줬던 그 자리에서 소년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난다는 의아하게 생각했지만, 아무튼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렇게 두 소년과 여자아이를 태운 말은 다시 모래 바람을 뚫고 남카네 마을을 향해 단숨에 달려갔다.
그들이 마을 근처에 도착했을 때는 해가 거의 다 졌을 무렵이었다. 생각보다 오래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었던 것이다. 무니는 눈의 산에서 정신을 차렸던 때가 떠올랐다. 수리아의 검이 어떤 작용을 할 때마다 이런 현상이 생기는 걸까. 어쩌면 일종의 부작용일 지도 몰랐다.
마을은 조용했다. 그들이 며칠 전 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적막감만이 감돌았다. 집집마다 문을 걸어 잠그고 있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우릴 용한테 먹여놓고도 문을 잠그고 사는군. 뭐가 무서워서.”
무니가 빈정거리는 말투로 이야기했다.
“이미 두려움이 생활이 되어버렸으니까.”
“그나저나 남카는 어떻게 됐을까?”
무니와 난다는 촌장네 집으로 향했다. 하지만 아무리 두드려도 문은 열리지 않았다.
“야! 남카! 문 열어! 이봐요. 촌장 아저씨, 용은 우리가 해치웠다고. 그러니까 문 열라고 요!”
두 사람은 손이 아플 정도로 문을 두드려댔다. 무니는 점점 화가 나기 시작했다.
“고맙다는 말은 바라지도 않아. 남카 얼굴만 보고 가려는 거라구!”
그러다 결국 이게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문을 발로 걷어차려는데, 덜컥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창백한 얼굴의 남카였다. 그는 당장 쓰러질 것처럼 문에 기댄 채였지만, 환하게 웃으며 손을 들어보였다.
“계획이 성공했구나.”
무니 역시 손을 들고는 웃으며 말했다.
“계획대로는 안 됐지만, 뭐 성공은 했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