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들키지 말고!”
무니의 말에 고개를 끄덕하며 일어서던 남카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두 사람 쪽을 향해 말했다.
“저기 말이야.”
무니와 난다가 ‘응?’이라는 표정을 지으며 남카를 바라봤다.
“너희들을 가둔 건 마을 사람들을 대신해 정말 미안하다. 그리고……, 고마워. 정말 너희 계획대로 용을 물리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마을을 돕겠다고 나서줘서.”
잠시 말을 멈춘 남카가 계속 말했다.
“물론 말 그대로 마을이 원래대로 돌아올 거라고는 생각 안 해. 사람들이 이런 서로의 모 습을 기억하는 한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 하지만 그냥 모두 전처럼 집에서 나와 함께 놀 수 있으면 좋겠어. 전과 똑같지는 않아도 말이야. 그렇게는 되겠지?”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무니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남카는 쑥스럽다는 듯 뒷머리를 긁적이더니 사뭇 비장한 표정을 지으며 일어섰다. 하지만 일어나자마자 그대로 멈춰서고 말았다. 뒤따라 일어났던 난다와 무니 역시 마찬가지였다. 마을 사람들 모두가 등불로 옥수수 밭을 비추고 있었던 것이다.
세 소년과 마을 사람들은 마치 시간이 정지한 것처럼 맞서고 있는 듯한 상태로 그렇게 잠시 멈춰 서 있었다.
“내가 움직이면 너희들은 아까 우리가 빠져나왔던 지하로 쪽으로 다시 가서 기다리고 있 어. 일단 마을 사람들을 막은 다음에, 아까 이야기했던 말을 너희에게 보낼게.”
남카가 여전히 마을 사람들에게서 시선을 거두지 않고 두 사람에게 말했다.
“그리고 방법이 있다고 하면 마을 사람들이 달라질 수도 있으니까.”
“저 사람들 표정 보니까, 그럴 거 같지는 않은데?”
무니가 냉소적으로 말했다. 남카는 마을 사람들을 하나하나 쳐다보기 시작했다. 냉정하고 차가운 시선이 그들을 위협하고 있었다. ‘저런 표정은 한 번도 본 적 없어.’ 남카는 무서웠다. 저 중에 남카 자신의 부모도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더욱 그랬다. 그 순간, 등 뒤에서 다시 희미한 열기가 느껴졌다.
“아무튼 그럼 거기서 보자.”
남카는 뒤돌아보지 않고 걸어가기 시작했다. 난다는 그런 남카에게 무슨 말인가를 하려다 관두고 무니를 바라봤다. 그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두 사람은 서서히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남카가 뛰기 시작하자, 이윽고 그들도 몸을 뒤돌려 뛰기 시작했다. 마을 주민 쪽의 등불도 순식간에 흩어졌다. 그리고 몸을 낮추고 옥수수 사이를 빠르게 헤쳐 가는 소년들을 뒤쫓았다.
잠시 후, 밭을 빠져나온 무니와 난다는 일단 숲 쪽에서 몸을 숨기고 있는 상태였다. 지하통로 입구 바로 앞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기 때문이다. 이미 남카를 붙잡은 사람들은 정작 중요한 다른 두 소년을 시야에서 놓쳐버려 눈을 부릅뜬 채로 마을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들이 든 등불에 그들 자신의 얼굴이 비칠 때마다 드러나는 표정은 섬뜩했다. 이기심이, 살고자 하는 욕망이 그들을 저렇게 만든 것일까. 무니는 마히샤들이 떠올랐다. 그들에게서는 욕구나 감정을 찾을 수 없었다. 무엇이 더 무서운 걸까. 사람들은 점점 숲 쪽으로, 그들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희미하게 느껴졌던 열기는 이 순간에도 점점 현실화되어가고 있었다. 불길은 잠시 멈춘 거 같았지만, 용은 확실히 마을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 급하게 뛰어오는 거 같더니 주민들에게 소리쳤다.
“모두 마을 광장으로 모여요!”
여기저기서 흥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마도 왜냐고 물어보는 거 같았는데 대답은 잘 들리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 모두 숲을 떠났다. 위기를 벗어나긴 했지만 무니와 난다는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남카가 보내준다고 했던 말은 올 거 같지 않았다.
“설마, 저 사람들 남카를……. 그런 일은 없겠지?
무니가 말했다. 난다는 아무 말이 없었다.
“아무래도 어쩔 수 없겠어. 기왕 이렇게 된 거, 그냥 우리가 사람들 앞에 나서자.”
무니가 비장하게 말했다.
“무슨 소리하는 거야?”
“어차피 용하고 부딪쳐야 하는 건 같잖아.”
난다는 “그렇지만,”이라고 말하다 그냥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그래, 뭐. 이래도, 저래도. 후후. 너 아까 옥수수 밭에서 남카가 마지막에 했던 이야기 때 문에 생각이 바뀐 거지? 모두 집 밖으로 나와 함께 놀고 싶다는 말.”
“그런 거 아니야!”
무니는 당황해서 얼굴을 붉혔다.
“아무튼 그럼 나 혼자 남카에게 갈게. 넌 그냥 이대로 칸타카 있는 대로 가. 그 잠 오는 약초나 이리 줘.”
무니의 말에 난다가 깜짝 놀라며 말했다.
“혼자 간다고! 너 왜 그래?”
“용 같은 거 본 적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말이야. 그 약초를 들고 용의 뱃속으로 들어가 기도 전에 죽을 수도 있는 거잖아. 그러니까 너 말고 내가 들어가는 게 맞아. 난 죽지 않 을 테니까.”
무니는 잠시 말을 멈췄다.
“지금 내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표정 짓지 마.”
난다가 멍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걸 언제 알았어?”
“지금 그게 중요해?”
“아무튼 그 계획엔 두 사람이 필요해. 누가 용 뱃속에 들어가든 밖에서 용에 맞설 수 있는 사람도 있어야 하잖아. 너만 그리로 보낼 수는 없어.”
난다가 단호하게 말했다.
“나 혼자서도 충분히 할 수 있다니까!”
난다는 그래도 “안 돼!”하며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용을 잠재우기만 하면 되는 거야. 그럼 안전하다구. 틀림없이 성공할 거야. 내가 어제 먹 어 봐서 알잖아.”
무니의 계속되는 설득에도 난다는 계속해서 고개를 젓고 있었다. 결국 무니는 한숨을 크게 내쉬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난다의 어깨를 툭 쳤다. 두 소년은 함께 마을 쪽으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무니와 난다가 마을 광장에 도착했을 때, 촌장과 남카는 마을 사람들에 의해 둘러싸여 있었다. 그들은 당연히 촌장이 이 일에 나서야 한다고 한 목소리를 냈다. 게다가 잡아놓은 아이들을 놔준 것도 남카라는 것이다. 기세등등한 그들의 위협에도 촌장은 남카의 어깨를 꽉 쥔 채, 사람들과 대치하는 상황이었다. 이제까지 촌장의 역할은 밭이나 경작물에 관해 드물게 생기는 갈등을 조정하거나, 정기적인 마을 회의를 주최하는 정도였다. 그는 자신이 이런 경우에도 대표자가 되어야 한다고는 생각지 못했다. 아니 그런 생각을 해볼 이유가 없었다. ‘어차피 이 사람들은 아들을 빼앗아갈 것이다.’라는 생각이 갑자기 스쳐지나갔다. 아들의 떨린 어깨를 감싼 촌장의 손도 떨리기 시작했다. 그때 마을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다른 쪽을 향했다. 도망쳤던 소년들이 제 발로 걸어오고 있었다. 촌장의 손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아버린 남카는 무니와 난다를 쳐다보며 참았던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마을 사람들은 두 소년을 보자마자 달려들어 그들을 커다란 말에 매달았다. 촌장과 남카는 돌아보지도 않았다. 마치 미리 준비되어있었다는 듯 모든 일들이 빠르게 진행되었다. 신속하게 준비를 마친 말은 사하라 쪽으로 가라는 명령을 듣고 달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소년들을 태운 말은 숨 한번 내쉬지 않는 듯 달렸다. 멀리 잠시 잠잠해진 듯한 불길 위로 조금씩 태양이 솟아오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이 녀석이 아까 남카가 말했던 그 빠른 말인가 봐.”
난다가 힘들게 말을 꺼냈다.
“우리 칸타카보다 빠를까?”
“글쎄. 하지만 앞으론 칸타카가 세상에서 제일 빠른 말이 될 걸.”
“무슨 말이야?”
무니와 난다는 말에서 떨어지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면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하지만 마지막 질문에 난다는 대답할 수 없었다. 말이 한층 더 더 빨리 달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무니와 난다는 묶인 두 손으로 말고삐를 더욱 세게 붙잡았다. 점점 그들 시야에서 숲이 사라지더니 잿더미가 날리는 황량한 평야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사막이었다. 아무 것도 없는 회색의 사막. 이곳도 아마 나무가 많은 평화로운 마을이었을 것이다. 이틀 전 그들을 위협했던 바로 그 불의 결과는 그렇게 처참했다. 무니와 난다의 콧속으로는 말이 달리면서 일으킨 먼지가 마구 들어오고 있었다.
“지금 여기까지 얼마나 빨리 왔는지 알아? 아직 해도 다 안 떴어.”
이윽고 사막을 빠져나오게 되자 무니가 다시 입을 열었다. 말은 잠시 속도를 늦춰서 천천히 달리고 있었다.
“응. 지금 우리 칸타카보다 확실히 빠른 거 같아. 도대체 무슨 종이지?
“나중에 책 찾아봐.”
두 사람은 말의 속도가 다시 빨라지기 시작하자 또 입을 닫았다. 무니는 이젠 어떻게 되어도 좋으니 빨리 용과 마주하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때였다. ‘휙! 휙!’하는 소리를 내며 귀를 스쳐지나가던 바람 소리가 그치는가 싶더니 말이 멈춰 섰다. 정신없이 실려 오던 무니와 난다는 한참이 지나서야 매달려 있던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곳은 또 사막이었다. ‘되돌아온 건가?’ 싶어서 주위를 둘러보던 두 소년의 눈에 작은 붙티들이 땅 위에서 춤추듯 흩날리는 게 보였다. 후끈한 열기가 느껴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