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 기분 좋게 말을 쓰다듬던 연금술사의 손길이 멈췄다. ‘설마?’ 이상한 예감이 그의 뇌리를 스쳐갔다. 급히 지하실로 내려가 봤을 때는 이미 모든 상황이 끝난 뒤였다. 무니 일행의 가방은 물론 그 자신의 책장까지 드문드문 비어있었던 것이다. 연금술사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으며 돌아서는데 무엇인가 발에 채였다. 마을에서 휴대용으로 쓰는 등이었다. 이는 마을 사람들 중 누군가가 그 두 소년을 도왔다는 뜻이었다.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잠시 후, 다시 올라온 연금술사는 한참동안 무엇인가를 찾는 듯 집안 여기저기를 뒤졌다. 샅샅이 살폈지만 중요한 물건 하나가 보이지 않았다.
“허! 재밌는 녀석들이로군.”
그는 옆에 있던 술병을 집어 들었다. 열린 문 밖으로 칸타카도 이제 보이지 않았다. 술을 들이키는 연금술사의 표정이 조금씩 변해갔다.
한편, 소년들은 덜 익은 옥수수 밭에 쭈그려 앉아 숨을 고르고 있었다. 방금 칸타카에게 모든 책을 실어 보낸 다음이었다. 그들은 조용히, 신속하게 움직이기 위해서 발소리는 물론 숨소리마저 낮추고 뛰어다녀야 했다. 게다가 난다가 연금술사네 집에서 가지고 나온 책들까지 합쳐서 짐이 너무 많았다.
무니는 자신에 비해서 늘 지나치리만큼 바른 난다가 책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다는 걸 ‘쿠샹의 도서관’ 사건을 통해 짐작은 하고 있었다. 그러나 막상 이번에 직접 보고 나니 대단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래도 그런 책 욕심 때문에 연금술사의 지하실에서 빠져나왔다고 볼 수 있으므로, 일단은 그냥 넘어가자고 생각하고 있었다. 조금 전엔 정말 ‘이제 들킬 일만 남았구나.’ 싶은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책장에서 책 몇 권을 급하게 뽑아 가방에 챙기는 난다를 보면서, 무니는 ‘한 대 때려줘야 정신을 차리려나.’라는 생각마저 했었다. 그러나 난다는 무니와 남카에게 가방과 짐들을 들려주고 난 다음 또 다시 책장에서 책을 빼기 시작했다. 태양과 달이 겹쳐지는 문양이 새겨져있는 가장 큰 책장이었다. 이번엔 뭐라도 한 마디 해야겠다 싶어서 무니가 입을 여는 순간 가방 때문에 낑낑거리던 남카가 말했다.
“가만히 있어봐. 책을 꺼내는 게 아니라 살짝 빼내기만 하는 거 같은데?”
남카의 말 대로였다. 얼핏 두서없이 보였지만 난다는 책을 한 권, 한 권 빼낼 때마다 신중하게 고민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때 위에서 뭔가가 확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무니와 남카는 움찔했고, 난다의 손놀림은 더욱 빨라졌다. 그때 커다란 책장이 마치 문처럼 활짝 열렸다. 비밀 통로였다. 애초에 난다는 그 문양이 연금술사를 상징하는 것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것이 지혜의 ‘문’을 뜻하기도 한다는 것을 말이다. 단지 그 문을 어떻게 열어야 하는지 몰랐기 때문에 사전에서 그와 유사한 상징들을 찾아 책을 뒤적였고, 마침내 그 방법을 알아냈던 것이다. 열쇠는 바로 책 제목의 순서였다.
여전히 컴컴한 밭, 옥수수 잎이 바람에 흔들리자 차가운 달빛이 세 소년의 얼굴을 스쳐지나갔다. 난다가 남카에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넌 이제 집에 가 있는 게 좋을 거 같은데.”
“우리도 이제 떠나는 게 좋을 거 같은데? 아까도 말했지만.”
남카가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무니가 말했다.
“그 이야긴 아까 둘이서 끝냈잖아? 연금술사 문제도 있고 무엇보다 사르나트의 바퀴도 찾 아야 해. 그거 없이 이 마을을 떠날 순 없어.”
무니는 인상을 구겼지만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신이 괜히 우기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무니는 그저 어서 마을을 떠나고 싶었다. 이 마을이 맘에 들지 않았다. 마을을 감도는 기분 나쁠 정도로 조용한 어둠이 특히 그랬다. 남카의 말에 의하면 낮에도 밭을 가꾸기 위한 몇 시간을 제외하고는 밖을 돌아다니는 사람이 없다고 했다. 용이 여자 아이를 먹었다는 소문이 돈 이후로는 친구들과 놀아본 적도 없다고 말이다. 어른들이 아이들을 집 밖으로 내놓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은 촌장에게 무언의 압박을 가하고 있었다. 만약 그런 일이 발생한다면 당연히 촌장의 아들이 나서야 한다는 것이었다. 남카는 그 말을 하면서 아주 잠깐이지만 눈시울을 붉혔다. 남카에게 그저 다정한 이웃의 아저씨, 아줌마들이었던 그들의 변화는 혼란스러운 것이었다. 그건 결코 옳은 일이 아니었다. 물론 공포는 많은 것들을 변하게 한다. 그러나 무니가 싫다고 느낀 것은 그게 다가 아니었다. 마을사람들 모두에게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운 건 단순히 공포가 아니었다. 그들은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야겠다는 의지를 잃었고, 의지가 사라진 자리에다 이기심을 키웠다. ‘자신들의 아이만 아니라면 누구라도 상관없고, 다른 아이를 희생시키더라도 살 수만 있다면’이라니 최악이었다. 얼마 전부터 무니는 여행을 하면서 이런 식의 낯선 경험들을 할 때마다 놀라고 당황하는 대신, 세상은 원래 이런 것이었으며 자신이 다만 몰랐을 뿐이라고 생각하기로 했었다. 그러나 그 낯선 경험의 종류도 질도 점점 더 나빠지고 있다는 느낌이었고, 그것이 어떤 커다란 변화로 인해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그것이 이제까지 몰랐던 진실이라면 더 이상 알고 싶지도 않다는 생각을 했다. 무니는 난다와 함께 뛰놀던 마을을 떠올렸다. 남카도 불과 얼마 전까지는 그렇게 지냈을 것이다.
“근데 말이야. 아까부터 말했던 사르나트의 바퀴라는 거, 어떻게 생긴 거야.”
침묵을 깨고 남카가 입을 열었다. 난다는 의미나 기능은 말하지 않고, 생김새만 그에게 설명해 주었다.
“혹시…….”
무니와 난다는 남카를 쳐다봤다. 그는 자신의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어 그들에게 내밀었다.
“이거 아니야? 아까 연금술사네 집에서 주웠는데.”
난다는 깜짝 놀라며 남카가 건네는 바퀴를 받아 들었다.
“아, 아. 훔친 건 아니야! 그냥 특이해 보여서 주웠는데, 갑자기 그 아궁이 안으로 들어가 버리는 바람에 결국 가지고 나오게 됐을 뿐이라구.”
“상관없어. 어차피 우리 꺼니까.”
흐뭇해하는 난다를 보며 무니가 툭 내뱉듯 말했다.
“이제 수레바퀴도 찾았으니까 마을을 떠나면 되겠네. 어차피 그 연금술사라는 녀석도 가 짜 같다며?”
“확인해 본 건 아니잖아.”
난다가 그럴 수는 없다는 듯 말했다.
“무니야. 지금 이 상태로 이 마을을 떠날 수는 없어. 너도 사실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잖 아. 방법이 전혀 떠오르지 않은 것도 아닌데, 외면하고 떠날 수 없어. 여기 사람들, 지금 정상이 아니야.”
“원래 정상이 아닌가 보지.”
무니는 억지를 부렸다.
“세상에 원래라는 건 없어! 너도 알잖아. 어쩐지 화가 난다구. 우리가 떠나면 남카는 또 어떻게 하냐?”
“몰라. 알고 싶지도 않아. 그리고 이 마을이 용한테서 무사히 살아남는다고 해도, 예전 처 럼 돌아갈 수는 없을걸. 무엇보다 우리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어. 정말 죽을 각오라도 했다는 거야, 뭐야?”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이다. 목적은 ‘검 조각을 모두 찾아 검을 완성하는 일’, 그것뿐이었다. 무니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때 난다가 결정적인 말을 던졌다. 유리 영감 이야길 꺼낸 것이다.
“할아버진 수리아의 검을 완성하기 위한 여정이 그 검을 찾아야 하는 이유가 될 거라고 하셨어. 모든 일들이 우리에게 의미가 있을 거라고 말이야. 그런데 지금 그냥 우리가 이 대로 여기서 도망쳐 버리면,”
그러나 난다가 말을 끝맺기도 전에 그들이 기다렸지만, 지금 당장은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지 못했던 상황이 발생하고 말았다. 어둡던 마을이 갑작스럽게 주황색 빛으로 환하게 밝아졌는데, 거기에서 희미한 열기가 느껴지기 시작한 것이다. 빛은 그 순간 굳어버린 세 소년의 얼굴 위에서 일렁거렸다.
“용은 보통 오후에 나타난다고 하지 않았어?”
여전히 굳어있는 얼굴로 무니가 남카에게 물었다.
“나도 실제로 본 적은 없어.”
“이렇게 되면 아까 이야기했던 계획은 안 되겠고, 차선책으로 해야겠는데.”
난다가 말했다.
“차선책이 뭔데?”
“그건, 나도 잘 몰라.”
난다의 말에 무니와 남카 둘 다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난다는 “흠.”하며 옥수수 밭에서 벌떡 일어나서 남카에게 말했다.
“너네 집은 바로 저기잖아. 일단 들어가 있어. 우리가 지금 창고 쪽으로 가기엔 너무 늦 었고. 혹시라도 용이 다가오면 연금술사네로 마을 사람들을 모두 피신시키는 계획은 변함 이 없으니까, 알았지? 거기라고 안전하리라는 보장은 없지만, 그게 최선의 방법이니까. 그 런데 지금 불이 나고 있는 곳이 어디지?”
“이번에도 사하라 지역인 인 거 같아.”
남카의 대답에 난다는 생각을 좀 해봐야겠다는 듯이 다시 쪼그려 앉으며 말했다.
“일단 현재는 불길이 일어난 곳이 다행히 한 군데인 거 같으니까, 저쪽으로 최대한 우리 가 빨리 다가가는 수밖에 없는데…….”
그때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무니가 말했다.
“칸타카가 없는데 어떻게 이동하지?”
무니와 난다는 다시 고민에 빠졌다. 그때 남카가 먼저 방법을 제시했다.
“아! 우리 마을에 굉장히 빠른 말이 있어. 아마 마을 공동 마구간에 있을 거야. 원래는 너 희가 갇혔던 곳에 있었지만. 아무튼! 내가 그 말을 이리로 가지고 올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