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의 중심 주처를 세워야 한다

만물만생의 주처가 서로
연결돼 있지만 내가 생각을
내지 않으면 불을 켤 수 없어

경전을 보는 것도
자기 마음 다스림과
결부가 돼야 참뜻을 헤아려​​​​​

만물만생이 함께 통하는 곳이 마음

여러분! 여러분께서는 일체제불과 저와 여러 스님들과 더불어 같이 본래 한자리로 돌아갑니다. 제가 항상 말씀드리듯이 과거 현재 미래를 같이 싸가지고 돌아가는 우주 전체의 그 중심 주처가 우리들의 중심 주처이기도 합니다. 좀 작고 크고 이럴 뿐입니다. 그런데 작은 자기 중심 주처에 그 큰 중심 주처가 둘이 아니게 직결이 돼 있다는 얘깁니다. 항상 얘기해 드리지만, 이것을 잘 아시고 우리가 생활을 한다면 생활하는 그 곳에 바로 도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직결이 돼 있구요. 만물만생의 마음 그 중심 주처, 곤충에 이르기까지 모든 마음들의 주처가 바로 우리의 마음 주처에 같이 가설이 됐다는 얘깁니다. 가설이 돼 있기 때문에 일체 만물만생은 보이는 데서나 안 보이는 데서나 서로 뜻으로 통하고 마음과 마음으로 통하고, 이렇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새삼스럽게 왜 또 이런 얘기가 나오느냐고 하시겠지만 근본으로 말미암아 일체가 다 거론되기 때문입니다.

화엄경에도 있듯이 부처님께서는 바다의 소임자를 주해신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산의 관리인을 주산신이라고 했고요, 풀과 나무들의 관리인을 주림신이라고 했고요. 마음의 중심 주처라는 그 주(主)가 모든 관리를 합니다. 갖가지 천차만별의 이름들이 다 주어져서 하나도 버릴 게 없이 그 소임을 맡아서 해 나가는 것이 바로 주신입니다. 천체가 이렇게 해서 같이 그 중심 주처에 직결이 돼 있고 가설이 돼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주처에 주인을, 이 몸뚱이가 집이라면 집 안에 주인을 하나 세워 놓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가 이 도리를 공부하지 않고 내 집이 빈집이라면, 영계성이라든가 세균성이라든가 업보성이라든가 인과성이라든가 윤회성이라든가 이 다섯 가지가 자유롭게 들어왔다 나갔다 들어왔다 나갔다 하면서 집 안을 모두 엉망으로 만들어 놓는 거죠. 그런데 내가 주인을 딱 세워 놓는다면, 중심에 주처를 세워 놓는다면 절대 바깥에서의 세균성이나 또는 안에서 일어나는 각종의 업식이나 윤회성 업보성 영계성, 모두가 다 감히 그 자리에 나설 수가 없습니다.

주인은 본래 있으나 내가 생각을 해서 세워야

그런데 주인을 안 세워 놓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주인이 본래 있으나 자기가 생각을 해서 세워 놔야 세워집니다. 우리가 생명은 있지만 생각을 하지 않으면 몸이 움죽거려지지 않듯이, 생각이 있어야만이 몸이 움죽거리고 작용을 할 수 있듯이 우리는 생각이 없다면 무효입니다. 모두가 생각이 있어야 작용을 할 수가 있는 거지 생각이 없다면 아무리 전력이 태산 같아도 끌어 쓸 수가 없는 것과 같습니다. 일체 만물만생이 중심에 주처가 다 같이 직결이 돼 있고 연결이 돼서 가설이 돼 있다고 하지만 내가 생각을 내지 않는다면 불을 켤 수가 없습니다. 에너지를 끌어다 쓸 수가 없습니다. 작용을 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기정사실이며 심성과학이며 철학이며 천체물리학이며, 모두가 종합해서 들어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활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다면 상대도 없고 세상도 없습니다. 내가 없는데 뭐가 있겠습니까? 내가 없는데 무슨 상대가 있고 무슨 부처가 있고 무슨 세상이 있겠습니까? 잘하고 못하고도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났기 때문에, 바로 내가 있기 때문에 모두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한테 ‘내 집부터 중심에 주처를 세워 놔라’ 하는 겁니다. 누구나가 중심은 다 가지고 있지만 그 중심을 모두 세워 놓지 않고 그냥 허랑방탕하게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런 말을 하느냐 하면 인간이, 아니 인간뿐만 아니라 생명체들이 살아나가는 데는 상대성이 있습니다. 높고 낮고, 길고 짧고, 넓고 좁고, 크고 작고, 못하고 잘하고 이런 게 그냥 상대성으로 돼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마음의 주처, 주인, 주장자가 있습니다. 크고 작은 주장자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하늘을 꿴 주장자와 내 주처의 주장자가 둘이 아닌 까닭에 직결이 돼 있고 가설이 돼 있는 겁니다. 돌아가는 거는 가설이 돼 있고, 위아래를 받치고 꿴 거는 같이 직결이 돼 있기 때문에 삼세가 일심으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주인을 안 세워 놓고 그냥 가는 사람 다르고, 주인을 딱 집에다가 세워 놓고 가는 사람이 다른 겁니다. 항상 걸림 없이 집을 보도록 주인을 세워 놓는다면, 자기 주처를 세워 놓는다면 그게 바로 보현신이며 법신입니다. 자기가 세워 놓은 그 마음 자체가 부처라면 법신을 세워 놓고 화신, 즉 보현신을 세워 놓는다 이겁니다.

마음속에 그렇게 세워 놓음으로써 바깥에서 악행, 즉 말하자면 인과성이나 윤회성이나 세균성이나 업보성이나 영계성, 이러한 잡다한 모든 영계들이나 유전에 의한 것들이나 어떠한 거를 막론하고 거기를 범하지 못합니다.

여러분이 마음공부를 한다고 주인공에 뿌리를 세워 놓은 거는, 세워져 있는데 내가 생각으로 찾아서 거기 세워 놓은 것은 바로 자기 마음을 거기다가 포함해서 돌리는 작업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기에 어떤 것도 붙을 수가 없죠. 그대로 돌아가기 때문에 붙을 리가 없어요. 먼지 하나도 거기 붙을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런 공부를 하는 분에게는 번뇌도 붙을 자리가 없고 업보도 붙을 자리가 없고, 유전성이나 인과성 윤회성 업보성 영계성까지도 전부 붙을 자리가 없다는 결론입니다.

내가 세상에 태어난 자체가 화두

그리고 주인을 세워 놓지 않고 이 공부를 안 하는 분들에 한해서는, 아까도 얘기했지만 집이 비었어요! 주인을 세워 놓지 않았어요! 그래서 내가 예전에도 얘기했죠? 과거에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자동적으로 입력되는 숙명통 자체가 포함된 오신통을 지금 현대 말로 하자면 자동적인 컴퓨터라구요.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자동적인 컴퓨터에 그대로 입력이 되거든요. 입력이 된다면 그 입력된 대로 가차없이 나오는 것입니다. 악행이 저질러지거나, 윤회성이 저질러지거나, 영계성이라든가 모든 것이 그냥 자동적으로 나오게 돼 있습니다. 그거는 독 안에 들어도 못 면하게 말입니다. 그와 같이 지금 몸뚱이 속에 과거는 지나갔으니까 없도록 돼 있고 미래는 오지 않았으니까 없도록 돼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 집 안에 모든 게 들어 있습니다. 들어 있는 것이 가차없이 자꾸자꾸 나오는 것을 어떻게 면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이 주인을 세워 놓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우주의 근본과 직결돼 있는 그 자체가 바로 우리 마음과 더불어 같이 하고 돌아가기 때문에 그러한 일이 안 생기고 그러한 일이 없는 것이고 어떠한 일이 생긴다 하더라도 빨리 대치를 할 수 있는 거지 그렇지 않으면 대치를 못하죠. 그러니까 망하고 흥하는 것은 여러분의 마음에 달려 있는데 이 공부를 안 하시면 막고 대치할 수 있는 도리를 도무지 모르기 때문에 도저히 해결할 수가 없는 겁니다. 보이지 않는 데서 생긴 문제는 보이지 않는 데서 해결을 해야 하고, 마음과 마음이 인과성으로 벌어진 것은 마음과 마음으로 해결을 해야 하고, 영계로서 벌어진 거는 영계끼리 해결해야 되는 겁니다. 이 모두가,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말입니다.

이러니 이 공부를 안 하고서야 어떻게 하겠느냐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부터 알아라. 너부터 알고 너부터 믿고 너부터 그 본래 있는 거를 찾는다면 이 세상 우주 만물이 돌아가는 그 섭류를 네 자신이 잘 알 수 있으리라. 그럼으로써 자유스럽게 살 수 있느니라. 그렇게 자유인이 된다면 네가 바로 부처고 네 한생각에 법신이 되느니라. 네 한생각에 법신이 된다면 바로 그 법에 의해 자유로운 작용이 스스로 되느니라.” 하셨습니다. 이 문제를 놓고 볼 때에 ‘우리가 부처님이 가르쳐 주신 그 뜻을 어떻게 헤아리느냐.’ 하면서 물러서는 사람이 없었으면 합니다.

여러분이 이 세상에 출현한 자체가 바로 화두인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출현했으면 ‘내가 어디서 왔는가? 내가 지금 무엇을 어떻게 하고 있고 어디로 가는가?’ 이거부터 알아야죠! 나는 쑥 빼고 ‘부처님, 날 좀 잘되게 해 주십시오. 내 병고 좀 낫게 해 주십시오.’ 하고 아무리 외쳐 봐도, 아무리 이름을 불러 봐도 그거는 끄덕도 하지 않고 통하질 않습니다. 통하는 길은 여기밖에 없어요. 부처님과 통하는 길은 바로 내 마음속의, 내면의 털구멍 한 구멍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니 이 마음공부를 안 하고 주인공 주장자를 세워 놓지 않으면 안 되는 겁니다. 주장자를 세워 놓고 거기다가 모든 걸 놓고 굴려서 대치를 해 나갈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돼야 좋지 않은가 이겁니다.

무한 에너지가 배출되는 불기둥이 나의 주처

나는 부처님한테 가서 빌고 기도하란 말은 안 합니다. 집에서도 빌고 기도하란 말은 안 합니다. 단, 바로 자기 내면의 뿌리 털구멍, 한 구멍밖에 없으니까 거기다 놓으세요. 마음이 나오는 것도 그 구멍에서 나오는 거니까 그냥 내 앞에 닥치는 대로 용도에 따라서 다 거기다가 ‘아, 당신이 다 하는 거니까 당신이 해결해!’ 하고 ‘당신이 대치를 하고 당신이 화목하게 할 수 있어. 지혜롭고 물리가 터지게 할 수 있는 것도 당신이야.’ 하고 놓는 겁니다. 그러니까 다 거기다 놓고 꺼낼 때는, 내가 주인공에다 탁 놓고서 그냥 자기 마음 내키는 대로…, 즉 자기 마음이 잘되고 못되고 나쁜 일이고 좋은 일이고, 이럭하면 안 된다 된다를 잘 알기 때문에 나쁜 일을 하게 하지는 않아요. 그러니까 한생각이 그냥 법이 되는 거죠. 그러니까 하늘과 땅과 인간을 삼위일체로 꿰어서 한생각을 내던진다면 법이 되는 겁니다. 한데 떨어지지 않는 법! 그대로 실천되는 법! 이 법을 그대로 행해야 세상천지의 갖가지 악행, 갖가지 부조리, 갖가지 병고…, 어떻게 일일이 말로 그 이름을 다 대리까마는, 그렇게 일어나는 모든 것을 우리가 지금 다 대치할 수 있습니다. 대치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마음공부 하는 길밖에는 없습니다.

요거 한마디를 더 해야 되겠습니다. 하늘과 땅을 꿰고 뚫어서 인간 주처 자체하고 결부된 이 자체를 바로 전력이라 해도 좋고 에너지라고 해도 좋습니다. ‘요걸 어떻게 해야 여러분이 잘 알아들을 수가 있을까?’ 하는 생각에서 이렇게 하는 겁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에너지가 불타고 있듯이 있는데, 그것을 움죽거리지 않으면서도 능력을 배출시킬 수 있는 그 무한의 기둥, 불기둥이라고 합시다.

그러면 거기에 빈손들이 얼마나, 헤아릴 수 없이 많겠습니까? 빈손이 말입니다. 우리가 거기에다가 ‘명이 짧으니 명 좀 길게 해 주십시오.’ 한다면 칠성부처의 빈손이 나오게 돼 있거든요. 칠성부처라는 그 이름이 빈손에 쓰여 있어요. 그래서 그 칠성부처의 빈손이 나와서 한 찰나에 결부가 돼서 그 명을 다소나마라도 이어 줄 수 있는 계기가 되죠. 그것뿐이 아니라 지장보살의 빈손도 있고 산신의 빈손도 있고, 뭐 아까도 얘기했듯이 주해신 주림신 뭐, 모두 우리가 연결할 수 있는 대로, 용도에 따라서 내 앞에 닥치는 대로 그 불기둥에 넣으면 자동적으로 빈손의 그 이름이 탁 나오면서 자기와 결부가 되는 거죠. 과학적으로 얘기를 하자면 원자의 그 기둥 안에서 입자가 수만 개가 있는데 그 입자가 나올 때는 바로 입자 하나에 칠성부처니 지장이니 뭐 전부 헤아릴 수가 없이 그렇게 나와서 여러분이 원하는 대로 응신이 돼서 찰나에 이끌어 주신다 이겁니다.

그러니까 그대로 우리에게 지금 생명의 근본, 그 뿌리인 근본이 있고, 생각을 낼 수 있는 것이 바로 법이고 작용하는 것이 바로 지금 여러분이 살고 있는 그대로이기 때문에, 부처님의 법은 딴 데 있는 게 아니라 여러분이 작용하면서 지금 살고 계시는 생활 속에 있는 겁니다. 여러분이 가정에서 생활하는 가운데 부처님도 계시고 도심도 있고 도도 있고 공부할 수 있는 재료도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지금 부처님을 찾고 경전을 보기 이전에 내 마음부터 그렇게 단련을 해 가지고 경전을 한번 본다면 그것이 얼마나 싱그럽고 광대무변한 것인지를 아실 겁니다. 경이라는 것도 교(敎)입니다. 우리가 생활하면서 다스리면서 배우고 나갈 수 있는 교입니다. 그 경을 보고 배우는 것도 자기의 마음 다스림에 의해서 결부돼야지 아무것도 모르고 경만 읽으면 잘되는 줄 알아서는 도저히 부처님의 그 뜻을 헤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헤아릴 수 없기 때문에 여러분의 마음을 마음대로 못하고 대치해 나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람으로 태어났다 하더라도 차원이 천차만별입니다. 그릇으로 비유한다면 종지가 있고 접시가 있고, 조그만 게 있고 큰 게 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마음의 그릇이 바다가 돼라 이 소립니다. ‘그 불기둥에 놔라, 놔라’ 하는 것은 한바다에 물 몇 그릇 붓는다고 두드러지지도 않을 것이고, 물 몇 그릇 퍼낸다고 해서 줄어드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뿐입니까? 맑은 물, 더러운 물, 구정물, 흙물, 핏물, 고름물 할 거 없이 다 들어가도 다 바닷물일뿐만 아니라 깨끗하게 가라앉혀서 그대로 양식이 돼서 만생을 다 먹이고도 남을 수 있게끔 되는 것이 바다의 이치입니다. 우리의 마음도 그렇게 넓고 광대무변한 겁니다. 마음은 체가 없어서 이 마음 하나가 지금도 여러분의 집을 점프해서 갔다가 올 수도 있는 겁니다. 그러니 단 하나만 쥐고 모든 거를 잘 기억하셔서 재료로 삼으십시오. 그리고 그렇게 흉내를 내다가 보면 진실이 돼 버립니다. 진짜 부처가 됩니다. 그러니까 그런 줄 아시구요, 될 수 있으면 열심히 하십시오.

〈1994년 10월 16일 광명선원 법회 중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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