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에서 달이뜨네

상주 남장사 행자시절 별명은 ‘대근기’
대선사들과 나눈 법거량은 귀한 자료
​​​​​​​마음과 세상을 밝히는 깨우침 강조해

학산 대원 스님 지음불광 펴냄/2만 9천원
학산 대원 스님 지음불광 펴냄/2만 9천원

한국불교의 간화선을 얘기하면서 불자들이라면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한 말이 있다.

“남진제 중(앙)대원 북송담”. 부산 해운정사이자 조계종 종정인 진제 큰스님과 인천 용화사의

송담 큰스님, 그리고 공주 학림사 오등선원 조실 대원 큰스님을 존경하는 마음으로 칭송해서 부르는 말이다. 이중 대원 스님은 말 그대로 현대 한국불교의 살아 있는 큰 스승이다.

대원 스님은 속세 나이로 80세이다. 적지 않은 나이에도 요즘도 공주 학림사 오등선원서 여름과 겨울, 여섯 달의 안거 때마다 방부(房付:선방에 들어가 정진하겠다는 신청서)를 들인 후학들과 똑같이 용맹정진을 한다. 노구에도 아랑곳 없이 구도역정의 길을 걷고 있는 대원 스님이 치열하고 올곧은 수행 여정과 지혜의 가르침을 모아 한권의 책으로 펴냈다. 〈진흙속에서 달이 뜨네〉이다. 출재가자에 대한 경계를 두지 않고 수행 지도하며 가르침을 펼치는 대원 스님의 이번 책에는 책 구절마다 스스로 마음과 세상을 밝히라는 깨우침의 길이 펼쳐져 있다.

대원 스님은 출가 후 제방 선원을 돌며 효봉 동산 고암 경봉 전강 향곡 성철 구산 월산 스님 등 당대의 내로라하는 선지식을 모시고 수행하며 공부를 점검받았다. 이 책에 담긴 대선사들과 대원 스님이 나눈 법거량(法擧揚:스승이 제자의 수행 상태를 점검키 위해 주고받는 문답)은 요즈음 쉽게 접할 수 없는 귀한 자료이다. 책에서 소개된 스승과 제자의 불꽃 튀는 선담(禪談)은 마음의 어둠을 단박에 끊어내는 선(禪)의 정수, 바로 그것이다. 이 밖에도 스님의 수행기, 법어, 법문, 대담을 통해 대원 큰스님의 사상과 법향을 조금이나마 느껴볼 수 있다.

대원 스님은 말 그대로 현대 한국불교의 살아 있는 큰 스승이다. 80세의 노구에도 학림사 오등선원서 안거 때마다 방부를 들인 후학들과 똑같이 용맹정진을 한다.
대원 스님은 말 그대로 현대 한국불교의 살아 있는 큰 스승이다. 80세의 노구에도 학림사 오등선원서 안거 때마다 방부를 들인 후학들과 똑같이 용맹정진을 한다.

대원 스님은 1956년 만 14세 어린 나이에 출가를 결심하고 스스로 경북 상주 남장사로 들어간다. 절에 사는 것은 참으로 힘들고 어렵다며 당시 주지 스님이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지만, 열네 살 소년은 이렇게 말했다. “어려워도 살아 보겠습니다. 가라고 해도 안 갑니다”

그 다짐처럼 스님은 근현대 격랑 속에서 꿋꿋이 공부를 완성해 나갔다. 그렇게 참선 정진한 이 시대의 진정한 대선사는 그동안 걸어온 세월의 흔적이 무색하게 세납 팔순의 나이에도 출재가자의 경계를 두지 않고 나란히 앉아 용맹정진 하고 있다. 그래서일까? 저자인 대원 스님의 형형한 눈빛은 마주 앉은 이의 마음을 꿰뚫는 힘이 있다.

치열한 구도의 길에 대원 스님은 막힘이 없었다. 구박과 일갈, 불친절함으로 일관한 스승의 방편에도 결코 지치지 않았다. 오죽했으면 상주 남장사에서의 행자시절, 고통과 시련을 이겨내며 얻은 별명이 ‘대근기(大根機)’였을까? 그만큼 어려운 수행을 끝낸 큰 수행자라는 의미이다.

배고픔과 추위는 말할 것도 없고, 참기름 한 방울까지 간섭하는 스승의 훈계와 다그침은 그런대로 참을만 했다. 스승의 행동 하나, 무심코 던지는 말의 행간에서 스님은 고심을 거듭하며 그 깊은 뜻을 헤아리려 했다. 스님은 모두 세 번의 오도(悟道·깨우침)에 이른다. 깨우침에 대한 간절한 염원, 반드시 이루겠다는 절차탁마의 태도, 그리고 스승에 대한 믿음이 그 과정에 녹아 있다.

대원 스님의 근기를 증명해주는 재밌는 일화 한토막 소개한다.

5년여 공양주 생활을 군말 없이 해낸 이야기이다. 50명 분의 밥을 가마솥에 앉히면 늘 밥이 눌었다. 밥이 눌면 스님이 먹을 밥은 없었다. 배가 고파 눌은밥을 주걱으로 긁어 먹으려고 하면 어느새 나타난 스승이 호통을 치며 몽둥이 세례를 퍼부었다. 밥을 태워 절집 재산을 없앴다는 명목이었다. 스님은 밥이 눌지 않게 해달라고 관세음보살님에게 정성을 다해 기도했다. 그 기도 소리를 노스님이 듣고는 밥이 눌지 않는 법을 알려주곤 이렇게 말했다. “다른 놈은 다 도망갔는데 너는 가지 않았구나.” 노스님은 스님을 내내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노스님이 일러준 대로 했더니 밥은 더이상 눌지 않았다. 이 이야기 속에는 바로 일념(一念)과 스승에 대한 믿음이 담겨 있다책 전반부에 서술된 대원 스님과 선지식의 법거량(法擧揚) 일화를 통해 우린 저자의 구도에 대한 수행자의 간절함을 느낄 수 있다. 이는 한국 선종사서 빼놓을 수 없는 귀한 사료이기도 하다. 이 책이 더욱 빛을 발하는 이유는 스승과 제자의 문답으로 단박에 드러나는 깨침의 과정이 생생히 담겨 있기 때문이다.

1980년 통도사 극락암서 경봉 큰스님과.
1980년 통도사 극락암서 경봉 큰스님과.

 

성철 스님께서 물으시길, “그럼 너는 오매일여를 어떻게 정의 내리겠는가?” 대원 스님이 답했다. “오매일여는 만들어서 이루는 것이 아니라, 본래 스스로 오매일여가 되어 있는 것을 깨달음만이 영원한 오매일여라 말할 수 있습니다”라고.

다시 성철 스님이 “그럼 네가 오매일여에 대해 한마디 일러 보아라”라고 하자, “푸른 하늘은 예나 지금이나 항상 푸르른데, 진흙 속에서 해와 달은 항상 뜨고 있습니다”라고 답했다.

이렇게 답하니 성철 스님께서 흔쾌히 손을 잡으면서 기뻐하셨다고 한다. 그리고 “그나마 오매일여와 씨름하고 자기 목소리로 그런 말을 할 줄 아는 놈은 너뿐이다”라고 칭찬했다고 한다.

젊은 날 이런 대원 스님의 모습에서 우린 수행자의 용맹함을 발견할 수 있다.

대원 스님은 1986년 학림사를 창건하고 1995년 후학 양성을 위한 오등선원, 2001년에는 일반 시민들을 대상으로 한 오등시민선원을 열었다. 스님이 평생 보여준 치열한 구도의 길이 많은 이들의 감화를 불러와 이뤄진 일이다. 수좌들의 공부 점검은 물론 일반 대중에게도 가르침을 열어 준 스님은 일상에서 할 수 있는 생활선(生活禪)을 통해 오늘날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다양한 고(苦)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진력한다.

깨달음 이후의 삶은 어떻게 펼쳐져야 하는가.

대원 스님은 직접 행(行)으로써 보여준다. “모든 사람이 맑고 깨끗하고 밝은 마음의 에너지 기운을 밖으로 드러낼 때 천하 만인이 다 좋아하게 됩니다.” 스님의 말처럼 모든 사람이 깨끗한 본성을 드러내도록 이끄는 것. 이것이 대원 스님의 공부의 시작과 끝이 아닐까.

이 책에는 스님의 구도역정과 함께 지난 1997년부터 2020년까지 충남 공주 학림사 오등선원은 물론 제방의 필요한 곳이면 어디든 찾아가 설한 수많은 법문 중 31꼭지를 선별해 담았다.

올해로 세수 여든, 후학을 가르치는 일은 조금 내려놓아도 될 때이지만 스님이 주장자를 쉽게 내려놓지 못하는 이유는 망념(妄念)에 오염되어 스스로 주인이 되지 못한 채 삶을 사는 대중들 때문이다. 시대의 스승이자 수행자로서 짊어져야 할 운명이다.

선방에서 수마에 빠진 수좌를 경책하는 대원 스님.

 

참으로 어렵고 혼탁한 시절, 그 속에서 고통받는 중생들이 자신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깨우치도록 도와 대자유에 이르도록 하겠다는 큰스님의 원력은 푸른빛이 형형한 칼날 같다. 법석(法席) 위에서의 걸림 없는 법문 가운데 뿜어져 나오는 할은 자성(自性)을 캄캄하게 덮어버린 우리의 마음 앞뒤를 단박에 끊어내기 때문이다.

스님의 원력은 선사의 향기가 밴 법력(法力)으로 여문다. 스님은 이미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고 다 갖추고 있지만 병들고 어리석어 보지 못하고 쓰지 못하는 우리에게 그 칼날을 드리운다. 내 앞에 놓인 화두를 목숨 걸고 참구하여 타파해야 한다는 한 마디 한 마디가 어깨 위로 내리꽂히는 죽비 같다. 대원 큰스님 첫 법어집이 출간된 지 15년이 지난 지금 이 책은 그 자체로 길을 헤매는 대중을 위한 바른 이정표가 된다. 가도 가도 끝이 없어 보이는 고통의 지난한 길 위에 있는 우리들을 일구월심(日久月深) 바른 방향으로 인도하려는 큰스님의 피땀 어린 가르침이 있어 다행이다.

▲학산 대원 대종사는?

1942년 경북 상주 출생. 1956년 만 14세의 나이에 상주 남장사로 출가(은사: 고암 스님, 계사: 동산 스님)하여, 1958년(만 16세)에 사미계를, 1962년(만 20세)에 구족계를 수지했다. 1966년 일대시교를 이수한 뒤 혼해 스님으로부터 전강 받았으며, 21년간 제방선원을 다니며 효봉, 동산, 고암, 경봉, 전강, 향곡, 성철, 구산, 월산 스님 등 여러 선지식들 회상에서 정진했다.

1972년 해인총림서 방장실을 찾아 참문하고 공부를 점검하던 중 홀연히 깨닫고 오도송을 지어 고암 상언 대종사로부터 인가 받았으며, 1986년 전법게와 부촉을 받았다. 같은 해 계룡산 제석골 제석사 옛터에 학림사를 창건하고, 1995년 오등선원을 열어 조실로 추대된 큰스님은 2001년에는 오등시민선원을 개원했으며, 2002년 한일 월드컵 당시 우리나라를 방문한 외국인들을 위해 템플스테이를 최초로 진행했다. 2010년 전국선원수좌회 수석대표를 역임했으며, 2013년에는 해인총림 서당, 고암문도회 회주로 추대, 동년 조계종 원로위원에 위촉되었다. 또한 2014년 조계종 대종사 법계를 품서받았으며, 2017년 조계종 원로회의 수석부의장에 위촉, 고암문도회 문장으로 추대됐다. 법어집으로 〈철벽을 부수고 벽안을 열다〉와 강설집으로 〈무구자 도인 주해 반야심경〉 〈대주선사어록 강설〉 〈금강경오가해 강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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