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고 눕고 싶은 이놈?박살내는게 바로 수행”

대원 스님은? 1942년 경북 상주서 출생했다. 1956년 상주 남장사로 출가했으며, 1958년 고암 스님을 은사로 사미계를, 1962년 동산 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수지했다. 1966~1986년 당대 선지식인 효봉, 금오, 고암, 전강, 경봉, 성철 스님 등을 참방 했으며, 40여년 간 정진 수행을 했다. 이어 대원 스님은 일제시대 한국 불교 중흥에 평생을 바친 용성(1864~1940) 스님과 조계종 3·4·6대 종정을 지낸 고암(1899~1988) 스님의 법맥을 전수받았다. 1986년에는 옛 제석사 터에 학림사를 창건했으며, 1995년에는 오등선원을 개원하고 조실로 추대됐다. 2001년엔 오등시민선원을 개원해 선(禪)의 대중화에 진력했다. 2010년 조계종 전국선원수좌회 수석대표를 맡기도 했다. 2014년에는 종단의 최고 지위인 대종사 법계를 품서했으며, 현재는 조계종 원로의원과 학림사 오등선원 조실로 주석 중이다.

대한민국은 총체적 난국이다. 올 2월부터 본격 기승을 부린 코로나19로 전국민이 고통스러워 하고 있다. 학생들 등교가 연기되는가 하면 직장인들은 정상적 회사 생활에 제약이 많아졌다.  또한 가족들중 확진 의심자만 생겨도 격리가 불가피 해졌다. 이런 상황서 기업들도 비상 경영체제에 들어갔고, 경제는 꽁꽁 묶였다.

가라 앉을만 하면 수면 위로 불거져 확산되는 코로나19. 아직도 완전히 잡힐 기미가 안보인다. 그래서 우리  뭇 중생들은 더욱 혼란스럽다. 이런 어려움을 선지식들은 어떻게 받아 들이고 계실까? 혹시 그 해법도 알고 계실까?

1956년 15세 출가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참선 수행으로 일관한 공주 학림사 오등선원 조실 대원 스님을 5월 19일 봉축을 맞아 알현 했다. 그리고 국가적 재난으로 상실된 국민들의 마음을 어루만질 수 있는 지혜를 구했다. 

▲오등선원 하면 ‘용맹정진’ 전문 선원이라고 부를 만큼 ‘3년 용맹정진 1천일 결사’로 유명한데요. 한시도 눈을 붙이지 않는 정진이 가능한 일일까요? 

-이번 결사에도 24명이 입실했지만, 절반인 12명이 중도 포기한 만큼 말 그대로 고행인 것은 사실입니다. 수좌들은 선방서 마주보고 앉는데, 눈을 뜨면 상대방이 앉아 있기에 졸고 싶어도 분위기상 많이 못 좁니다. 수마를 극복하는 그 비결은 바로 화두 삼매에 있죠. 하루 온종일 화두가 성성한 경지에 이르면 앉으나 서나 화두에 빠져 시간 개념이 사라집니다. 
화두에 빠졌다 깨면 수일이 그대로 지나가기도 하죠. 무엇이든지 목숨 걸고 하면 안되는 일이 없듯이, 정진도 목숨 걸면 가능합니다. 이건 직접 해보지 않으면 말로 설명이 안됩니다. 끊임없이 눕고 싶고 남보다 먼저 자고 싶어 하는 ‘나’라는 이 놈을 박살내는 게 바로 용맹 정진 수행입니다.

▲1천일 동안 폐문하며 수행했던 오등선원 ‘용맹 정진’의 하루 일과와 당시 상황들이 궁금해 지는데요. 소개좀 해주세요.
 
-오등선원의 선방은 24시간 불이 꺼지지 않습니다. 또한 잠을 자지 않으니 모든 시간이 수행을 위해 쓰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하루 평균 보통 18~19시간 화두 참구를 합니다. 공양하거나 머리 깎거나 목욕 하는 때를 제외하면, 앉아서도 서서도 걸으면서도 울력 하면서도 화두를 들죠. 고행의 극한까지 한번 가보자는 용맹심으로 달려드니, 당연히 몸에 이상이 생길 수 밖에 없습니다. 

코피는 물론 전신마비가 와서 병원에 실려 간 스님도 있었죠. 하지만 가장 큰 적은 성취감이죠. 그게 오히려 독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렇듯 아상(我相)이 조금이라도 일어나면 빨리 본래 자리로 되돌아가야 하는데, 그것이 더 힘들죠. 

▲오등선원은 다른 선원보다 고강도 수행을 요하는데도 방부를 들이는 인원이 꾸준히 늘어나는 것은 아무래도 진짜배기 공부를 하고 싶은 수행자들의 열망이 아닌가 싶습니다. 진짜배기 공부는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바로 보고 바로 알아차려서 확철대오하여 계합하는데 있습니다. 그렇지 못한 분은 철벽처럼 잡념이 스며들지 않게 큰 의심으로 철저하게 화두를 참구해야 되죠. 순일무잡(純一無雜)한 의심이 독로해야 되는 것입니다. 간화선은 닦는 것을 전제하지 않습니다. 이는 바로 보고 바로 알아차리는데 의미가 있지요. 결국 선의 요체는 말하기 전에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간화선은 말로 함축된 일구를 던지는 것인데, 이는 말 속의 의미를 올바로 직시하는데 있죠. 내가 누구인가를 바라보면 지혜가 높아져 모든 것이 해결됩니다. 이것이 진짜배기 공부입니다. 

▲언젠가 법문하시면서 “수행자에겐 아무리 짧은 잠이라도 허송세월이며, 수마를 조복 받고 나면 오히려 공부가 쉬워지고 자신감도 생긴다”는 말씀을 강조하신 게 기억이 납니다. 수좌로서의 선기가 묻어나는 가르침이신데, 이에 덧붙여 평소 후학들에게 강조하시는 말씀이 있으신지요?

-수마도 눈을 부릅뜨고 끊으려 노력한다면 결코 장애가 될 수 없습니다. 마음가짐이 가장 중요하죠. 알아차리겠다는 그리고 깨닫겠다는 용맹스런 마음 말입니다. 백척간두의 천길 벼랑서도 한 걸음 나아갈 수 있는 기백과 하늘 땅을 밟고 홀로 뛰어 오르려는 굳은 의지가 있어야 합니다. 또한 수행과 용심처를 둘로 보지 마시고 행해야 합니다. 이것도 제가 강조하는 말입니다.

공주 학림사 오등선원 조실 대원 스님이 수행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오등선원에서는 수행자들을 수시로 점검하며 공부 상태도 일러주며, 많은 선원서 사라진 법거량 전통을 활성화시킨다고 들었는데, 그 이유는 무엇인지요?

-법거량은 번거롭고 어렵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지만, 저희가 당대의 선지식들에게서 가르침을 배울 때는 반드시 법거량을 통해 그동안의 공부를 점검 받았습니다. 법거량은 큰 의심과 분심을 촉발하게 되고, 큰 깨달음에 이르게 되는 좋은 기회가 되기 때문에 오등선원에서는 활성화 시키고 있습니다. 쇠퇴일로에 있는 간화선 중흥과 승풍진작을 위해 시작했는데, 매일 경책을 통해 용맹정진하는 이 납자들을 마주대하며 한국불교의 큰 희망을 보았습니다.

▲조계종 전통 수행법인 〈간화선〉은 수행 효과가 단시일 내에 직접 나타나지 않아 일반인들에게 어렵다는 편견과 고정 관념이 많습니다. 그래도 간화선을 해야 하는 이유와 장점은 무엇입니까?

-간화선은 관법과 달리 일구(一句)로 번뇌망상을 단박에 잘라서 본래 진면목을 바로 가르쳐 언하에 깨닫게 해서 마치게 하는데 의의가 있습니다. 조주 스님이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없습니까?”라는 물음에 “無”라고 대답했습니다. 여기에 중생은 언어도단(言語道斷), 앞뒤 생각이 끊어지고 중생의 분별 의식이 통하지 않는 데까지 도달하게 해서 조주 스님의 ‘無字’ 의지를 바로 깨닫는 동시에 자신의 진면목을 요달(了達)하게 되는 것입니다. 

관법으로는 단박에 앞뒤 생각이 딱 끊어지게 하고 깨달음의 차원까지 하려면 몇 겁을 수행해도 어렵습니다. 관법은 많은 시간을 요하지만, 간화 화두선은 돈오돈수로 빨리 해결하는데 그 의미가 있습니다. 오늘날 첨단 과학시대, 빨리 이루고자 하는 이 시대에 간화선이 적합한 이유이지요.

▲재가자를 위한 시민선원도 열어 재가자 수행 진작을 위해서도 힘쓰고 계신데, 그동안 성과와 효과는 어떤 것이고, 재가자들의 반응은 어떠한지요?

-분명히 큰 성과와 효과가 있다고 봅니다. 먼저 자신들의 행동이 달라지고 가정 생활의 질이 변화됨을 느꼈다고 합디다. 보다 높은 의식에서 생활하게 되기 때문에 공부하기 전과는 완전히 다른 마음과 행동을 보이게 됩니다. 그 핵심은 수행을 통해 바로 자신의 진면목, 참나를 보면서 마음의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죠. 그래서 수행을 마치고 돌아간 재가자들이 감사의 인사를 많이 전합니다. 큰 보람을 느낍니다. 

▲오는 5월 30일이 제 21대 국회가 개원하는 날입니다. 큰 스님께서는 국회의원 불자회인 정각회서 가끔씩 초청돼 법문 하시는 걸로 아는데요. 새로 임기를 시작하는 국회의원들에게 경책의 말씀을 들려 주신다면요.  

청풍무종적(淸風無?跡)하고
〈맑은 바람은 지나가도 자취가 없고〉
 백운자거래(白雲自去來)한데
〈흰 구름은 스스로 오고 가는데〉
 통신무장애(通身無障碍)하며
〈몸을 통하여 걸림이 없으며〉
 명주자희롱(明珠自戱弄)이로다
〈밝은 구슬을 스스로 희롱함이로다〉

부처가 있는 곳에 가서는 머무르지 말고 지나가고, 부처가 없는 곳을 만나거든 급히 지나가라고 했습니다. 어느 곳에도 머무르지 말란 말입니다. 우리는 두 양변을 벗어나야 합니다. 좀더 자세히 설명하면 여당과 야당을 뛰어 넘고, 남과 북을 뛰어 넘어서 양변에 머물지 말고 벗어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세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양변서 놀아나면 우리 인생은 자유로운 생활을 못합니다. 

그러면 걸림이 없는 세계에서는 어떻게 되느냐? 서로 눈만 마주쳐도 척 알아차리고 다 압니다. 이심전심, 굳이 말하지 않아도 통해버리죠. 서로 상통해 버립니다. 그래서 융합이  되고 만사가 형통해 집니다. 그 세계의 마음을 쓰는 사람은 오늘날 정말 어려운 이 시대에도 책임질 줄 아는 사람이죠. 

▲마지막으로 정부를 비롯해 국민들이 코로나19로  많은 어려움과 상실감에 빠져 있습니다. 정부와 국민들은 혼란스런 작금의 현실에서 어떤 마음 자세로 살아야 이 국가적 재난을 극복할 수 있을지요.    

-우선 정부인 리더 그룹들이 현재 백척간두에 서 있겠지만 용기를 갖고 한 걸음 더 나아간다면 올바른 지혜의 눈이 열려 모든 것이 해결되고 천하가 태평해 질 것입니다. 백성들도 시시비비에 치우치지 말고 어려울 수록 자신의 내면 세계를 잘 살펴보시길 바랍니다. 거기서 해결책이 보이고 새롭게 발돋움 할 수 있는 창조적인 대안이 생겨납니다. 각자의 입장에서 서로를 조금씩 이해하고 자신을 직시합시다. 이런 상황이 되면 세상을 향한 지혜의 눈이 열려 삿된 마음에 속지 않고 화합된 멋진 세상을 이루게 됩니다.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