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21일 원로회의 하루 앞두고 기자회견
‘불신임 결의 인준’ 불명예 피한 결정 해석
대웅전 참배·종무원들과 인사 후 수덕사行
수개월간 친자의혹 등이 제기돼온 조계종 총무원장 설정 스님이 원로회의를 하루 앞둔 8월 21일 사퇴했다. 원로회의의 총무원장 불신임 결의 인준이라는 최악의 불명예를 피하기 위한 고육지책으로 해석된다. 설정 스님은 결국 총무원장 취임 10개월 만에 수덕사로 돌아갔다.
설정 스님은 이날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4층 로비에 마련된 단상 앞에 굳은 표정으로 섰다. 지난해 10월 총무원장 당선 후 올해 신년기자회견을 통해 “공동체 화합을 이루겠다”고 밝힌 그 자리다. 기자회견장 양 옆은 총무원 부실장을 비롯한 집행부 스님들과 수덕사 주지 정묵 스님 등 덕숭총림 스님들이 가득 메웠다.
“후학들이 불교개혁 이루길”
설정 스님은 사퇴의 변을 통해 현재 한국불교가 처한 위기상황을 진단한 뒤 앞으로 후학들이 사사로운 감정을 내려놓고 불교개혁에 매진해줄 것을 당부했다. 자신이 여론의 뭇매로 인해 물러나지만 종단이 변해야 한다는 의지는 강하게 드러냈다.
설정 스님은 “소납은 오로지 부처님 제자로서, 부처님 은혜를 입고 산 사람으로서 한국불교 개혁을 위해 마지막 여생을 보내겠다는 생각으로 총무원에 왔다. 1994년 종단개혁을 통해 이루지 못한 것들을 이루기 싶었기 때문”이라며 “주변 만류에도 불구하고 청정승가를 구현해달라는 많은 사람들의 요청에 의해 총무원장직을 수락했다”고 총무원장 취임 배경을 설명했다.
그러면서 “오늘날 종단은 국가체제를 모방한 선거제도로 인해 위계질서와 장로정신이 무너지고 화합이 깨졌다. 삼보정재가 탕진되는 악순환이 종단을 철저하게 붕괴시키고 있다”며 “1700년 역사 속에서 국민과 고락을 함께해온 호국불교의 도도한 흐름을 지켜내고자 했지만 금권화, 정치화, 세속화 된 종단 현실은 너무도 비참하고 혼탁하다”고 현재 조계종의 위기상황을 진단했다.
준비해온 짧은 원고를 읽은 설정 스님은 이후 안경을 벗고 자신이 그간 총무원장직을 수행하며 느낀 한국불교의 병폐, 앞으로 나아가야할 길을 역설했다. 또한 의혹으로 인해 대중으로부터 내몰린 자신의 처지에 대한 아쉬움도 드러냈다.
설정 스님은 “서울시내 밤거리를 밝힌 십자가들을 보면서 우리 종단은 지금 무얼 하고 있는가 생각해봤다. 그래서 나를 비판하는 사람이든, 그렇지 않은 사람이든 사부대중이 한국불교에 원하는 게 무엇인지 의견을 종합해 들으려 했다”면서 “그럼에도 우리는 서로 반목하고 갈등하면서 언론을 통해 자기 식구 헐기에 전념했다. 여론몰이를 당할 때 염려해준 사람이 많았지만, 나를 이 자리에 있게 해준 당사자들은 그렇게 열정적이지 않았다”고 밝혔다.
설정 스님은 이어 스님들이 생활인으로 전락하지 않고 수행자로 있을 때 종단개혁이 가능하다는 뜻도 내비쳤다.
스님은 “스님들은 생활인이 아니라 수행자다. 늘 말씀드리지만 결코 생활인으로 전락해선 안 된다”며 “부처님이 가르친 대로 참선이든 염불이든 봉사든 실천하며 살아야 한다. 이를 하지 않는 데서 오는 병폐는 이루 말할 수 없다. 실천하지 않는 자는 수행자가 아니다”고 목소리 높였다.
“무너진 원융살림 되새기길”
설정 스님은 또 불교개혁을 위해 원융살림을 되새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스님은 “원융살림은 불교가 지금까지 지탱해온 사상이요, 철학이자 지침이다. 그런데 근자에 와서 원융살림이 다 무너졌다. 주지나 기타 소임자들이 사중의 돈을 자기 마음대로 쓴다”며 “종회의원, 본사주지선거 하는데 몇 억씩 쓰는데 그 돈이 어디서 나오겠느냐”고 금권선거의 병폐를 지적했다.
스님은 “소임자라고 하더라도 언젠간 객으로 돌아갈 수 있고, 객이라고 하더라도 언젠가는 소임자로 돌아갈 수 있다는 마음이 바로 원융정신이다. 원융의 기초가 안 된 사람은 어떤 소임도 가져선 안 된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설정 스님은 종단 내에서 사찰 재정투명화가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스님은 “삼보정재는 불사에, 대중을 위해, 중생을 위해 써야 한다. 그 외는 삼보정재의 오용이자 탕진”이라며 “삼보정재는 예로부터 불자들이 콩나물 10원, 20원어치를 아껴 모은 것이다. 시주자의 피 같은 돈을 마구잡이로 쓰는 사람들이 과연 양심이 있다고 할 수 있겠느냐”고 일침을 놓았다.
많은 시간을 할애해 현 종단 상황을 진단하고 방향을 제언한 설정 스님은 자신이 총무원장직을 내려놓고 수덕사로 돌아간다는 뜻을 밝혔다. 이는 앞서 덕숭총림 대중이 잇달아 설정 스님을 예방, 원로회의 불신임안 결의로 인한 불명예 퇴진이 아닌 자진사퇴로 끝맺음을 해야 한다는 설득이 받아들여진 것으로 보인다.
설정 스님은 “94년 개혁회의 법제위원장으로서, 종법을 만든 장본인으로서 종단을 변화시키기 위해 나왔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산중으로 되돌아가야 하지 않나 생각한다”며 “특권층을 위한 종단이 아니라 온 종도가 부처님 품안에서 자유롭게 정진하고 봉사하는 종단이 되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약 20분간 법문에 가까운 기자회견을 마친 설정 스님은 기자들의 질문을 받지 않은 채 집행부 스님들과 조계사 대웅전으로 향했다. 설정 스님은 대웅전과 극락전에서 부처님전에 3배의 예를 올렸으며, 총무원청사 앞으로 이동해 자신을 배웅하러 나온 종무원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눴다. 몇몇 종무원들은 눈물을 보이기도 했으며, 설정 스님은 악수를 마친 뒤 자신의 차에 올라타 덕숭총림 대중과 함께 수덕사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