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 결사운동의 역사는?

통일신라 만일염불결사 시작으로
국가 안녕·개인 수행의 결사 진행
고려 이후 교단 개혁 결사로 확대

올해로 70주년 맞은 봉암사 결사
한국불교의 현재 기틀 만들어내

결사(結社)의 사전적 의미는 ‘여러 사람이 공동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단체를 조직하는 것’을 의미한다. 동북아 불교에서 신앙 공동체 운동 형태로 나타난다.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중국 동진시대 혜원(慧遠. 334~416)이 여산 동림사에서 맺은 백련결사가 최초의 결사 운동이다.

동진 시기 불교계는 승단의 계율 문란과 권승들의 횡포로 불교의 권위는 바닥으로 치달았다. 이 같은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나타난 것이 결사라는 공동체 운동이다.

백련결사는 402년 혜원이 유유민 등 당시 지식인을 포함한 출재가 123명으로 시작한 결사로 이들은 무량수불(無量壽佛) 앞에서 서방정토에 왕생하기 위한 염불 수행을 했다. 염불 수행을 근간으로 하지만 그 배경은 참다운 불교정신의 회복에 있었다.

국가·개인을 위한 결사들
한국불교사 안에서 결사의 시작은 통일신라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왕즉불(王卽佛)’ 사상이 있던 시대였던 만큼 국가를 위하거나 스스로의 수행을 위한 신행결사들이 있었다.

가장 유명한 것은 758년(경덕왕 17년) 발징 화상이 고성 건봉사에서 맺은 염불 만일결사다. 일설에 따르면 발징 화상은 염불 수행 29년만인 786년(원성왕 2년) 31명이 인로왕보살의 인도로 모두 육신등공(肉身騰空)해 왕생했다고 한다. 이 무렵에는 강원도 오대산에서 국가와 관련한 화엄사(華嚴社) 등의 결사가 조직되기도 했다. 9세기 초에는 신라의 불교 공인 과정에서 순교한 이차돈을 추모하기 위한 결사가 이뤄졌다.

고려시대 무인집권 이전에는 교종 계통의 수정사(水精社) 등의 결사가 있었다. 수정사는 1129년(인종 7년)에 법상종의 진억 스님이 주도한 결사로 참법과 아미타 신앙을 표방했다. 고려는 불교국가였던 만큼 수정사는 왕실의 지원으로 이뤄졌다.

교단 개혁적 결사의 시작
개인적 신행에서 개혁적 성격으로 확장되는 결사는 12세기 이후 나타난다. 잘 알려진 것이 바로 보조 지눌 국사(知訥, 1158~1210)의 정혜결사(定慧結社)와 천태종 요세 스님(了世, 1163~1245)의 백련결사(白蓮結社)이다.

지눌 국사의 정혜결사는 1188년 지금의 대구 팔공산 거조사에 머물면서 정혜사를 조직하고 ‘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을 발표했다. 그리고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을 모아 불교 쇄신운동에 들어갔다.

정혜결사의 사상적 근간은 ‘권수정혜결사문’에 담겨 있다. 결사문에는 “마땅히 명리(名利)를 버리고 산림에 은둔하여 함께 결사하여, 언제나 선정을 닦고 지혜를 가지런히 함에 힘쓰고, 예불하고 경을 읽으며 노동하고 운력하는 데 이르기까지 각기 소임을 나눠 일을 하자”고 기술돼 있다. 이는 근본을 지키며 불교를 변화시키겠다는 일성이었다.

요세 스님의 백련결사는 참회행과 미타정토신앙을 강조했고, 농민, 천민층을 포함한 피지배층의 호응은 매우 높았다. 요세는 날마다 염불했고, 입적할 무렵에는 원효의 징성게(澄性偈)를 쉬지 않고 외웠다고 전해진다.

두 결사는 기존의 개경 중심의 불교계의 타락상과 모순에 대한 비판 운동이라는 성격과 지방 지식층을 기반으로 했다는 특징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이는 기존의 중앙 문벌 귀족을 대신해 이들 지방 지식층이 새로운 사회의 지배세력으로 등장하는 하나의 흐름을 보여주고 있어 역사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불교를 숭앙했던 고려 왕조가 무너지고 건립된 조선은 숭유억불의 시대였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결사운동의 동력도 축소됐다. 이후, 근대화의 물결과 일제의 침탈이 시작되면서 다시 한번 결사운동에 불이 붙었다.

한국불교 중흥조 경허 스님은 1889년 해인사에서 수선사를 결성하고 수선결사를 시작했으며, 용성 스님도 1925년부터 1927년까지 망월사와 통도사에서 만일참선결사회를 조직해 수행을 통한 결사를 진행했다.

김호성 동국대 교수는 최근 발간한 저서 〈결사, 근현대 한국불교의 몸부림〉에서 학명 스님이 내장사에서 1923~1929년 이룬 반농반선의 공동체를 결사로 정의했다. 이밖에도 근대 한국불교의 대표적 선승 한암 스님이 1921~1922년 금강산 건봉사에서 선회(禪會)를 주관한 것과 근현대 대강백 탄허 스님의 수도원운동과 역경불사도 보조와 한암으로 이어진 정혜결사의 현대적 변용으로 평가했다.   

現불교 기틀 다진 봉암사 결사
근현대 결사 중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은 올해로 70주년을 맞는 봉암사 결사다. 봉암사 결사는 1947년 10월부터 1950년 3월까지 봉암사에서 50여 명의 승려가 전개한 수행결사를 말한다.

당대 명망 높았던 수행자였던 성철 스님과 청담 스님은 1942~1943년 선학원과 속리산 복천암에서 함께 수행하며 결사의 의지를 다졌다. 이후 1944년 사불산 대승사 쌍련선원에서 두 스님은 총림 설립을 꿈꿨다.
성철 스님과 청담 스님은 해인사에 총림을 설치하려 했지만, 대처승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결국 봉암사를 결사지로 삼았다.

봉암사 결사의 처음 시작은 성철·자운·우봉·보문 스님이었다. 이들의 목표는 부처님 법대로 한번 살아보자는 것이었다. 법당과 전각에서 칠성탱화와 산신탱화를 뜯어내고 목(木)발우도 부처님 법에 맞지 않다며 부쉈다. 신도들에 대한 천도재도 지내지 않았다. 살림은 철저히 자급자족으로 유지했다. 하루에 일정한 시간을 정해 먹고 마시고 입는 것에 울력을 시행했으며 포살을 정례화했다.

이 같은 공동체 생활에 대한 일련의 수칙은 ‘공주규약’으로 제정됐다. 총 18개 조항으로 이뤄진 공주규약은 결사의 목적부터 자급자족, 기복불공 금지, 좌차, 의식주, 수행 준칙 등이 간결하면서도 상세히 기술돼 있다.
1948년에는 결사 참여 수행자가 30명으로 늘었고, 1949년에는 50명을 상회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참여자 중에는 묘엄·묘찬·지영 스님 등 6명의 비구니 스님도 있었다. 비구니 스님들은 계율상 봉암사에 기거할 수 없어 봉암사 인근 암자인 백련암에 머물며 수행정진했다. 1950년이 되면서 봉암사 인근서 빨치산과 경찰이 대치하는 등 수행환경이 어지러워지자 결국 결사를 회향하고 참여자들은 각자의 길을 걸었다.

‘오직 부처님 법대로 살자’는 기치 아래 치열하게 수행 정진한 이 결사는 현 조계종단 재건의 밑거름이 됐다. 봉암사 결사 정신은 성철 스님의 법문에서 잘 나타난다.

“우리가 어떻게 근본방침을 세웠느냐 하면, 오직 ‘부처님 법대로만 살아보자’ 이것이 원(願) 이었습니다. 즉, 근본 목표다. 이 말입니다.” 〈수다라 10집에 수록된 성철 스님 법어 中〉

김광식 동국대 교수는 ‘봉암사 결사의 재조명’ 논문에서 “간화선 위주의 수행 풍토가 주류를 이뤘지만, 그 저변에는 청규와 율장이 자리잡고 있었다”면서 “수좌들은 예불, 청소, 나무하기 등 모든 사찰 일에 동참했다. 요컨대 건강한 참선수행이었다”고 결사를 평가하고 있다.

이어 “봉암사 결사는 식민지 불교의 극복을 위한, 즉 근대 불교의 모순을 청산하려는 강렬한 정신과 실천에서 대두됐다”며 “그 정신은 이후 불교정화운동의 추진 및 조계종단 재건과 운용에 있어서 기본적인 준칙으로 인식됐다”고 밝혔다.

계속 이어지는 결사 운동
최근에 와서는 조계종 종단 차원의 자성과 쇄신 결사가 진행되고 있다. 2011년 1월 26일 시작된 자성과 쇄신 결사는 한국불교가 안고 있는 적폐와 부정적 관행, 외부 의존 등을 과감히 벗어 던지고 뼈를 깎는 개혁과 쇄신을 통해 한국불교사에 남을만한 획기적 전환의 계기를 만들어 가는 것을 목표로 한다.

자성과 쇄신 결사는 △수행 △문화 △생명 △나눔 △평화 부문으로 나뉘며, 세부적인 실천 방안을 가진다. 이후에는 100인 대중공사 등을 진행하며, 종단의 현안에 대한 여론 수렴, 장기 플랜을 세우기 위한 노력 등이 이뤄졌다. 올해 7년 차를 맞는 자성과 쇄신 결사에 대해서는 “위로부터 이뤄진 친종권적 수사”라는 비판과 “대중 공의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고 불자 개개인의 변화를 촉구하고 있다”는 긍정적 평가가 엇갈리고 있는 상황이다.

지눌의 정혜결사에서 봉암사 결사에 이르기까지, 역사적 평가를 받고 있는 결사들은 선각자가 ‘부처님 법대로’ 살아갈 것을 주창하고 이를 공감하는 대중들의 동참과 실천이 있었다. 그들의 결사는 한국불교의 위기를 기회로 바꿔 앞으로 나아가게 했다. 결사를 다시 생각해야 하는 역사적 이유도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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