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아디카야의 눈물 1

-무슨 말이야? 윤회관을 인정한다는 말이야 부정한다는 말이야?

심 작가였다. 그가 정말 헷갈린다는 듯이 그렇게 소리치고 있었다. 나는 어금니를 씹으며 그의 반응을 기다렸다. 윤회를 인정하든 부정하든 분명한 것은 그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무늬? 난타의 업장이 만들어낸 무늬? 그 무늬가 오늘의 이석원을 만들었다?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가 희미하게 웃으며 다음 말을 씹어 뱉었다.

-뒤쪽 선반 위를 봐. 거기 바랑이 있을 테니.

돌아서서 올려다보자 선반이 머리 위에 있었다. 약병 나부랭이와 헝겊들…. 거기 바랑 하나가 보였다. 내가 그 바랑을 내렸다. 바랑을 열자 먼저 법복 한 벌이 눈에 띄었다. 많이 낡았지만 깨끗하게 빨아 넣어 놓은 것이어서 더럽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뒤이어 내복 한 벌이 나왔고 치약, 칫솔, 비누통 그리고 잡다한 종이 뭉치가 나왔다. 종이 뭉치를 빼내던 나는 멈칫했다. 보통 종이가 아니었다. 패엽(Pattra)? 그렇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취재차 대구 동화사(桐華寺)나 영월 법흥사(法興寺)에 보관된 패엽경을 본 적이 있었다. 법흥사의 패엽경이 유독 시선을 끌었었다. 그 경은 단 한 장이었고 앞뒤로 범어가 쓰여 있었다. 금강산 마하연사(摩訶衍寺)에 봉안되어 있던 것이었다. 광복 후 행방이 묘연했는데 부산의 한 스님이 신도한테 얻어 법흥사에 봉안한 것이었다. 패엽의 감촉이 썩은 나무 둥걸을 만지는 것 같았다. 금방이라도 바스러져 버릴 것 같아서 조심스럽게 손을 뻗쳤다.

삽화=김상규
삽화=김상규

 

오오스마 기자가 재빠르게 배낭에서 보자기를 꺼내 바닥에다 깔았다.

-어리석을 사람들, 이제 가야 할 때가 된 것 같군.

그렇게 말하고 그는 눈을 감았다.

-제기랄!

심 작가가 물기 젖은 눈으로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그 순간 그녀의 팔뚝에 얹혀 있던 피 흘리던 그의 손이 툭 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얼마나 눈을 감고 있었는지 몰랐다. 가까이에서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흰 가운을 입은 의사들이 고무장갑을 끼고 움막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는 이미 숨을 멈춘 뒤였다. 들것에 늘려나가면서도 그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네 사람은 산자락으로 나왔다. 하나 같이 허탈한 낯빛이었다.

-아무리 버려진 곳이라고 해도 그렇지. 이렇게 허술할 수가. 지금이 어떤 세상인데….

송 서화가의 말에 오오스마 기자가 쩝 혀를 찼다. 적당한 자리에 배낭을 벗어 놓고 그 위에다 놓았다. 보자기를 풀자 너비가 2인치 정도, 길이 1자쯤 되는 장방형의 패엽이 나왔다. 가운데 일정한 간격으로 뚫린 작은 구멍이 두 개 보였다. 끈으로 꿴 자리 같았다. 끈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흐트러진 것은 아니었다. 첫 장에는 어떤 글자도 없었다. 협판 표면에 장식을 넣을 듯한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맨 위 장을 들어내 곁에 놓고 두 번째 장을 보았다. 역시 빛이 바랠 대로 바랬다. 어떤 글자가 보였다. 희미했다. 송곳이나 칼로 파내고 거기에다 죽필로 검은색을 입혔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희미하게 바랬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글자인지 알 수가 없었다.

-네팔어입니다.

오오스마 기자가 보고 있다가 말했다. 내가 다시 글자를 내려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부처님은 네팔인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아디카야란 말 같은데요.

-아디카야?

오오스마 기자의 말을 내가 되뇌었다

-법의 칼이라는 뜻입니다. 부처의 칼이라는 뜻이지요. 본말은 아디(Aid)와 카야(akaya). 말뜻은 ‘강한데 순수한’ 뭐 그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부처의 법, 그 법만이 순수하다는 말입니다. 원뜻은 다르마카야입니다. 취모리검(吹毛利꼪)!

오오스마 기자가 말하며 한 장을 넘겼다.

-예하 치미 처?

무슨 말이냐는 듯이 모두의 시선이 오오스마 기자의 입에 쏠렸다.

-여기 칼이 있도다?

오오스마 기자가 중얼거리다가 눈을 번뜩이며 다음 장을 넘겼다.

Mtara pitara hanrva

rjno dve ca khattiye

raa snucara hanrva

anigho yti brhmao.

오오스마 기자가 침을 꼴깍 삼키고 글을 읽기 시작했다.

-마따랑 빠따랑 한뜨와 라자르 드웨 짜 캇띠에 랏탕 싸누짜랑 한뜨와 아니고 야띠 브라흐마노.

오오스마 기자가 읽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 이제야 이해가 되네요. ‘여기 아디카야 칼이 있도다. 부모를 죽이고 두 임금을 다 죽이며 왕국과 집착을 파괴한 브라흐마노는 모든 둑카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워진다.’

-무섭군요!

심 작가가 듣고 있다가 느껴지는 게 있는지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이런 말 같습니다. 갈망과 교만을 모두 죽이고 상견과 단견을 다 죽이며 여섯 가지 감각의 왕국과 십이처를 파괴한 붓다는 모든 구속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진다.

오오스마 기자가 말하고는 눈을 감으며 말을 이었다.

-불멸 후 어딘가에서 만들어진 것 같군요. 빠알리어는 본시 문자가 없었어요. 그들의 말로 암송되던 것이었으니…. 로마 알파벳으로 음사된 것으로 보아 후대의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네요.

패엽 밑에서 얇은 비단이 나왔다. 무엇일까 하고 보았더니 그림이었다, 시퍼렇게 날이 선 장검이었다. 아디카야? 그 뒤에 붓다의 모습이 있었다. 일반 절에 모셔진 풍만하고 자비로운 모습이 아니었다. 고행을 해서 살이라고는 없었다. 뼈만 남은 모습이었다. 함정처럼 깊어 보이는 눈. 드러난 핏줄들. 갈비뼈가 어둠 속에 드러난 쇠창살 같았다. 광배에서 일어나는 광휘가 눈부셨다.

-이건 이석원이 그려서 지니고 다닌 것 같군요.

오오스마 기자가 말했다.

돌아오는 길

심 작가가 들고 있던 종이봉투를 열어 술병을 꺼내놓았다. 병원 한 켠에 매점이 있는 걸 보고는 몇 병 사서 넣은 것이었다. 그가 병마개를 따면서 풀썩 웃었다.

-나도 참 속물인가 봐. 술을 사면서도 행여 병균이 묻었으면 어쩌나 하고 있었으니.

말없이 술을 들이키다가 오오스마 기자가 그제야, ‘감상이 어째 그렇지?’하고 심 작가에게 물었다. ‘말이 안 돼. 아무리 생각해도….’ 심 작가가 말했다.

-무서운 일이야. 죽어가면서 하던 그의 말.

심 작가가 그렇게 말하고 스스로 생각해도 멋쩍은지 풀썩 웃었다.

-이 세상이 너무 어둡기 때문이 아닐까 싶네요. 거짓이 판을 치고 위선이 판을 치고…. 어쩌면 그래서 그가 온 것인지도 모르지요.

나는 말해 놓고 너무 단정적이라는 생각이 들어 흘끗 주위의 시선을 살폈다.

오오스마 기자가 갑자기 술잔을 놓으며 이상스러운 냉소를 물었다.

-허망해요. 그가 난타라고 하자고요. 전생에 이 땅에 와 살다가 그렇게 갔는데 다시 온 이석원은 무엇인가? 기껏해야 부처 모습이나 그리는 그림쟁이? 허허 참 전생에 그렇게 살았다면 좀 더 큰일을 하고 가야 하는 거 아닌가?

송 서화가의 말에 오오스마 기자가 하하하고 웃었다.

-그럼 인도의 간디나 아니면 대통령이라도 돼야 하는가요?

-그렇잖습니까. 응보의 차원에서라도….

-그럴까요? 어쩌면 그것이 윤회의 본모습일지도 모르지요. 유치원생에게 미적분을 가르칠 수 없어 방편 교설을 한 죄. 극락을 만들고 지옥을 만들고….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는 연기(緣起)의 법칙, 이거 너무 재미있지 않았습니까. 별거 아닌 것 같아도 비로소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을 보아낸 삶. 그게 대통령의 삶보다 못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모순된 세계를 모순되게 사는 것. 진리를 보려면 진리의 목을 쳐야한다는 말이 어렵지만 이해가 되니 기가 막힐 일입니다.

-그것이 그의 고민이었다는 말인가!

심 작가가 오오스마 기자의 말을 듣고 있다가 술을 홀랑 입속으로 쏟아 넣고 소리쳤다.

그 말을 듣자 씁쓸한 자괴심이 단내가 되어 입가에서 맴돌았다. 무엇일까? 정작 살아 이 세상을 그려야 할 사람은 그렇게 갔다. 오로지 중요한 건 진리뿐이라고 외치며. 부처의 모습이 일어나면 베어내고 또 베어내면서 그가 보려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술을 입속으로 쏟아 부었다. 문득 눈높이라는 말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생각이 몸을 곧추세웠다. 진리와 현실. 번뇌의 속세. 두견새 우는 진흙바닥. 그 속에 살면서 우리가 그려내는 어떤 것도 절대일 수는 없다. 절대의 경지에서 표출되는 진리 그 자체의 상태는 아니다. 이석원이 찢고 깨려 했던 것은 바로 그것이었을지 모른다. 우리는 오늘도 쉴 새 없이 사고의 구술에 의존하며 살아간다. 타인의 가학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위악성에서 삶의 본질을 깨달으면서. 그렇기에 그는 이 세상에서 이석원적 번뇌를 지고 자신의 행위 속에서 참공양의 실천적 삶이 어떻게 이루어져야 한다는 걸 깨달으며 살았을지도 모른다. 진리를 버리지 않고는 진리를 볼 수 없다는 이 모순의 꼬라지들. 그럼 그것을 쳐 없애 버렸을 때 어떻게 될까? 그 모순마저도 쳐 없앴을 때 그것은 풍광(風光)이 될까? 그럴까?

멀리서 바람이 불어와 옷깃을 흔들었다. 산자락을 타고 내려왔다. 어슬어슬 한기가 들고 이상스런 공포가 밀려들었다. 돌부리에 채이고 넘어지면서 마을로 내려와 차를 탔다.

이곳까지 와 무엇을 한 것일까? 세세생생이란 말이 눈물처럼 가슴에 와 매달렸다. 한 사내의 처절한 몸부림. 오늘에 이르러 붓다의 모습을 완전하게 그릴 수밖에 없는 업보로 남았다면 삼세를 윤회하며 우리는 이제 어디로 가야 하는 것일까?

어느 한순간 심 작가가 고개를 홰홰 내저었다.

-정말 감상이 지랄 같구만 그래.

섣부른 감상을 날려버리듯 차는 덜컹거리며 잘도 달렸다. 산등성이의 꽃들이 낙화처럼 바람에 휘날렸다. 꽃 무더기를 보고 있자니 그가 내뱉던 말이 떠올랐다. 진리 속에 있으면서 진리를 죽여야 한다는 사실. 세상 속에 있으면서 세상을 죽여야 한다는 사실. 그렇다. 그것은 모순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세상의 실상을 깨닫기 위해 그 모순을 쳐 없애지 않으면 안 된다. 모순을 쳐 없애는 것, 그것이 풍광일 것이다. 모순된 세상을 모순되게 사는 것. 우리는 그 진리의 풍광 속에서 오로지 선을 호위하며 격렬하게 악을 응시해야 한다.

그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을까? 삶보다 더 먼 시원의 끝, 그곳을 향해 금빛 몸체를 흔들며 가고 있을까? 그 시원의 끝에 누가 있을까? 어둠 속에서 청정한 자성(自性)의 꽃을 피워 불이(不二)의 세계를 열었던 그이가 있을까? <끝>

▶한줄 요약
이석원은 숨을 거두고, 그가 남긴 바랑에는 ‘아디카야의 검’에 대한 이야기가 적힌 패엽경이 있었다. “여기 칼이 있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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