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을 하면서도 자신이 없어요질문 마음공부를 하면서 서원을 세우는 게 중요하다 하기에 저도 큰스님처럼 금생에 이 도리 깨달아 자유인이 돼 보리라고 서원을 세워 보았습니다. 그런데 서원을 하면서도 자신이 없어지기도 합니다. 제가 주제를 모르고 너무 큰 원을 세운 것일까요?답변 이거 보세요. 꽃나무가 만약에 자기 뿌리를 못 믿어서 ‘내가 지금 꽃이 피고 있는가, 안 피고 있는가’ 이런다면 그게 말이나 될 법한 일입니까? 나무들이 ‘아, 내가 지금 열매가 맺을까? 꽃은 피었는데 열매가 맺을까, 못 맺을까?’ 이런다면 그게 말이나 됩니까?
모든 것은 안으로 굴린다.어저께도 여러분한테 간단하게 얘기를 했습니다마는 우리 인간은 물질을 세우고, 내 몸뚱이라고 세우고, 말을 세우고, 이름을 세우고 이러기 때문에 자기 참마음의 전달이 되지 않는 겁니다. 참마음의 전달이 속속히 될 수만 있다면 참으로 이렇게 좋은 법이 없을 겁니다. 이렇게 좋은 법이 없건만 ‘어쩌면 이렇게 좋은 법을 모를까’ 하는 안타까움에서 어저께 잠깐 일체 만물에 대한 문제를 생각해 봤습니다.모든 무정물이나 생물이나 또는 날짐승들이나 낮은 동물들은 다 일 년에 지나가는 모든 것을 알고 생활을 하고, 또는 어
인사드릴 기회가 없어서 인사가 늦었습니다. 서울 법회 때 너무들 애를 쓰셔서 정말이지 감사한 마음 말로는 어떻게 형용할 수 없습니다. 회장님 이하 여러분, 모두 다 너무나 감사합니다.그런데 정신력이 여기 이렇게 몸을 끌고 오신 거죠? 하하하. 이 몸뚱이라는 것은 사실은 로보트 같아서…, 제가 겪어 봐도 그래요. 독일에서 캐나다로 왔는데 캐나다인지 독일인지 처음에 갔을 때는 멍멍해지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웃으면서 그랬어요. ‘하, 이거 로보트는 로보트로구나!’ 하는 생각 말이에요. 또 여기에 와서 드러누웠다 일어나니까 방문이 어딘지
굳은 신심을 갖고 싶어요질문 평소에는 주인공을 믿는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큰일에 부닥치고 보니 제가 믿음이 많이 부족함을 느꼈습니다. 굳은 신심으로 물러서지 않는 정진을 하고 싶은데 한 말씀 일러 주십시오.답변 그런데 나를 믿는 것 말입니다, 믿는 것은 아픈 것을 나을 양으로 믿는 것도 아니요, 죽을 걸 살 양으로 믿는 것도 아니요, 어떠한 업보를 제거하려고 믿는 것도 아니요, 자기가 이 세상에 났으니까 그대로 자기를 믿으라는 것입니다. 자기 시자는 자기 주인을 믿어야 된다는 얘기죠. 아버지가 나쁘든 좋든 아버지이듯이, 어머니가 못났
정오에는 태양이 머리 위 꼭대기로 떠올라 그림자가 없다. 이때 모든 탑은 불국사의 무영탑(無影塔)이 된다. 누구나 마음속의 번뇌와 망상이 사라지면 불성이 환하게 드러난다는 것이리라. 〈벽암록〉 18장 ‘충국사(忠國師)의 무봉탑(無縫塔)’도 같은 맥락이다. 무봉탑이란 어느 곳도 꿰매지 않은 천의무봉(天衣無縫)을 뜻한다. 하늘 옷은 꿰매지 않은, 즉 삼라만상은 꿰매지 않은 그 모습 그대로 완전하다는 것이다. 당나라 숙종 황제가 충국사라고도 불리는 혜충(慧忠) 국사에게 “스승님께서 입적하시면 무엇을 해 올릴까요”라고 물었다. 원만 무애한
여러분을 만나게 돼서 참 기뻐요. 이런 말을 하면 여러분이 믿지 않으실지 모르겠지만, 이 세상의 진리는 어느 사람이든 다, 나 아님이 없고 내 부모 아님이 없고 내 자식 아님이 없고 내 형제 아님이 없는 한 진리예요.내가 여러분한테 말씀드릴 거는 불교라는 것이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입니다. 영원한 생명의 근본이 ‘불’이요, 보이지 않는 데서나 보이는 데서나 서로 말을 하고 서로 대화를 하고 그렇게 하는 것이 ‘교’예요. 일체가 혼자, 독불장군은 없죠? 마음의 인연줄이라는 줄은 보이지 않아요. 전력이 있다는 것을 알고 가설을 해 놨기
여기 지원장 스님이 진리를 너무도 역력하게 가르치시기 때문에 내가 좀 등한시한다 하더라도 바로 지원장 스님 마음이 내 마음이고 내 마음이 지원장 스님 마음입니다. 비록 모습은 다르나 마음이 어찌 둘이겠습니까. 깨달음의 진리는 하나인 것이지 둘도 아닙니다. 그 깨달음의 진리를 안 스님이라면 바로 부처하고도 둘이 아니요, 내 마음하고도 둘이 아니요, 모두가 둘이 아닌 것입니다.더군다나 우리가 몸 떨어지기 전에 이 도리를 꼭 알아야 하는 문제가 개재돼 있습니다. 자기 주인공은 분명코 있습니다. 자기를 끌고 다니는 과거의 조상 말입니다.
5월의 산은 엽록소들이 일제히 함성을 지르고, 강물은 기쁨에 겨워 파란 윤슬(햇빛이나 달빛에 비치어 반짝이는 잔물결)로 빛난다. 세상은 싱싱한 설렘으로 혼곤한 봄을 깨운다. 사람들은 부산하게 일어나 교외로 나가느라 휴일의 고속도로는 몸살을 앓는다. 철쭉이 만개한 산등선이나 청보리가 넘실거리는 들판은 출근길의 만원 지하철 안처럼 북새통을 이룬다.이처럼 아름다운 풍경을 환호하는 사람들을 관광객이라 한다. 그렇다면 관광하는 사람들은 그곳에서 무엇을 보고 느낄까? 관광객(觀光客)이란 먹고, 마시고, 노래 부르는 사람이 아니라 보는 사람을
부처님 오신 날 영원한 오늘일세질문 해마다 초파일을 맞이하여 밝은 연등도 밝히고 있지만 선법가 가사에도 있듯이 “부처님 오신 날 영원한 오늘일세”라는 뜻이 잘 와닿지 않아서 질문 올립니다.답변 우리가 해마다 부처님 오신 날을 맞이하지만 우리가 더욱더, 어떠한 생각으로 이날까지 살아왔던가를 한번 깊이 생각해 볼 점이 있습니다. 항상 마음의 인등을 켜면서 꺼지지 않도록 하고 왔는지 말입니다. 우리가 일 년을 하루로 축소할 수 없다면 하루를 일 초로 축소할 수 없는, 영원한 오늘이라는 이 도리를 여러분은 잘 생각하셔야 할 것입니다. 그러
꽉 차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지금 여러분이 적다고 해서 이런 말씀 드리는 게 아닙니다. 한 분이 앉으셨다 할지라도 우주 법계가 꽉 차서, 이 방이 작지도 않고 크지도 않게 그 자리에 우리는 한자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내가 항상 여러분한테 말씀을 드렸습니다. 변소에 가나 법당에 가나 어디를 가든지, 딴 사찰에 가든지 딴 기독교에 가든지 간에 내 중심을 잃지 않고 항상 여여하게 가짐가짐을 그대로 갖는 것을 원했고 또 부처님이 그렇게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 남이 그런다고 해서 덩달아 따라서 부처님 불상을 불신하거나 또는 모른다는 사람을
… 이전의 마음이란 걸 알게 됐을 때 비로소 자기 자신이 자기를, 천박하지 않고 고상하게 도심을 알게 됩니다. 그런다면 그때 아주 자유스럽게 요리를 해서 잘 맞춰서 먹을 수가 있다 이거야. 밤에 먹어도 점심이요, 낮에 먹어도 점심이요, 아침에 먹어도 점심이요, 어느 때든 먹을 때마다 점심이지 뭐, 점심 아닌 게 하나도 없다 이거야. 영원한 점심으로서 “그것도 이름해서 점심이지 점심이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하는 말을 우리가 할 수 있는 그런 계기가 되지 않겠나 이겁니다.왜 남이 하는 소릴 듣고서 이리 가고 저리 가고 이러는지,
관할 때 마음은 어디다 두나요질문 ‘주인공!’ 하고 관할 때 입으로는 ‘주인공’ 하는데 마음은 어디다 두어야 하는 것인지요.답변 인간이 태어났으면 본래 자기 뿌리와 싹이 동시에 같이 태어났다는 걸 아셔야 합니다. 이게 염주가 되려면 줄에다 알을 꿰어야 염주가 되죠? 그렇다면 사람도 염주와 같이 그렇게 겸해서 가지고 나왔다 이 소립니다. 그러니까 어디를 찾아야 하고 어디를 믿어야 하고 이런 게 없이, 육신과 정신계가 본래 이렇게 꿰어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염주알은 어디를 믿어야 되겠습니까? 염주를 꿴 줄이죠?이 줄은 정신계라고 비유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