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남한테 이익하게 행하고 말하고 생각해야 합니다

일어나는 그 마음이 우리를 부처로 만들 수 있고
법신으로 만들 수 있는 과정이며
나를 수련시키는 채찍이 됩니다.

둘이 아닌 도리에 대해서
질문 둘이 아닌 도리에 대해서 이해가 잘 가지 않습니다. 어렴풋이 이해는 가지만 확실히 몸과 마음이 각각 있는데 어찌 둘이 아니라 하시는 것인지요. 

답변 우리가 항상 몸을 보시면 아신다고 그랬죠. 몸을 보실 때 공체죠. 간단히 말해서 공체로 우리가 살죠. 그런데 딴 사람도 공체란 말입니다. 딴 사람도 공체고 나도 공체고 전부 여기 있는 분들 다 공쳅니다. 공체고 공생이고 공심이고 공용을 하시고 사시고 또 공식으로서 우리가 들이고 내고 하는 것도 공식으로서 그냥 들이고 내고 삽니다. 그러니까 “모두 전체가 공해서 둘이 아니다.”라는 얘기가 나옵니다. 

여러분이 사시는 것도 역시 그래요. 지수화풍으로 생겨서 사는데 지수화풍이 있어야 또 살죠. 지수화풍을 먹고 살죠. 근데 여러분들이 보는 눈 하나를 본다 하더라도 눈으로 여기저기 보지 한 군데만 보고 사는 분 없죠. 듣는 귀도 그렇고요. 모두가 몸 전체가 다 부딪치는 데로도 그렇고 다 이렇게 잠시 살짝살짝 그냥 넘어가죠. 화해서 넘어간단 말입니다. 이거 보고 이거 보고, 이거 듣고 저거 듣고, 이 사람 만나고 저 사람 만나고 이렇게 화해서 돌아가죠. 그러니깐 함이 없이 산다 이겁니다. 사는 게 없이 산다 이 소립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이 세상에 나와서 자식이 되기도 하고 부모가 되기도 하는데, 다시 옷을 벗고 돌아서 탄생을 하니까 다른 부모한테 태어났어요, 인연에 따라서. 그러니까 다른 부모의 자식이 되더란 말입니다. 그런가 하면 짐승의 모습을 가지고서 짐승의 자식이 되고, 짐승의 부모가 되어서 나오기도 하거든요. 그렇게 돌고 돌다 보니까 내 자식 아닌 게 하나도 없고, 내 부모 아닌 게 하나도 없고, 내 형제 아닌 게 하나도 없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공동묘지에 가 보니까 남녀노소도 없이 그대로 늙었더라.” 이렇게 말을 하는 겁니다. 

염주알을 꿴 줄과 염주알이 둘이 아니요, 뿌리와 싹이 둘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뿌리의 세계를 알아야 뿌리의 세계에서 현실의 세계로 나오면서 자꾸 화해서 모습이 바뀌는 거, 인연에 따라서 나오는 거를 50%만 아는 게 아니라 100% 돌아가면서 알아야 ‘아, 모두가 둘이 아니로구나!’ 하고 진실하게 알지, 직접적인 행을 실천해 보지도 않고, 보지도 않고, 듣지도 않고, 먹어 보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둘이 아닌 줄 알겠습니까? 

죽었다 깨어나고 깨어났다가 죽는 도리를 확실히 알기 위해서 우리가 지금 이 공부를 하고 가는 건데. 그렇게 한다면 그 도리를 알게 됩니다. 과거에 살던 나와 현실에 살고 있는 내가 둘이 아니게 상봉을 해야 비로소 진짜로 공부할 수 있는 겁니다. 그리고 알게 되는 겁니다. 스스로 알게 돼 있어요. 

그러니까 스스로 너 나가 없이, 네 부모 내 부모 아님이 없이 자비를 베풀 수가 있고 마음을 낼 수가 있지, 어떻게 알지도 못하는데 너 나가 없다고 생각할 수가 있겠습니까? 모습만 둘이 아니라는 게 아니라 마음도 둘이 아니다, 영혼이 둘이 아니다 이겁니다. 영혼이 둘이 아니라면 진짜로 자비를 베풀 수가 있는 겁니다. 그리고 모습은 따로따로 있을지언정 한 줄에 꿰어져 있는 겁니다. 염주알은 따로따로 있으나 한 줄에 꿰여 있으니까 너 나가 둘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는 말입니다. 

무조건 놓아야 하는지… 
질문 공부를 하다 망상이 날 때 그냥 무조건 놔야 하는 것인지 의정을 갖고 몰아가야 되는 것인지 혼동이 옵니다. 가르침 부탁드립니다.   

답변 일체를 놓는 거라고 하는 거는 여러분이 지금 걸어오셨지만 뒤 발자취를 남기지 않고, 짊어지지 않고 오셨습니다. 고정됨이 없이 그냥 돌아가는 겁니다. 그래서 본래는 그냥 놓고 가는 거죠. 놓고 간다는 말 자체도 할 게 없는 거죠. 그런데 그것을 모르기 때문에 만날 마음으로 끼어 잡고, 착을 두고, 욕심을 두고, 집착을 하고 모두 이렇게 하니까 그걸 벗어나게 하기 위해서 되풀이해서 말씀해 드리는 거죠. 

그러니까 이 망상도 망상이 아니라 그대로 자생을 길러 내는 원소 자체의 과정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겠죠. 망상이라고 할 게 없다 이런 거죠. 그 생각 생각이 나지 않는다면 목석이지 그게 사람입니까? 그러니까 망상이다 하는 관념 그것을 떠나야 되겠습니다. 

그럼으로써 ‘놓는다’ 하는 것은 ‘이게 뭣고’ 하기 이전에 직접 들어가는 겁니다. ‘내가 한 일은 내가 해결할 수 있다’라는 얘깁니다. 과거로부터 이끌어온 주인이 모든 것을, 몸을 시자로 끌고 다니면서 아프게 됐으면 제 시자를 제가 낫게 할 수 있고 또 이끌어 갈 수 있고 화목하게 할 수 있고, 모든 일체 만법을 다 그놈이 하는 일이니 그놈 탓으로 돌려야 하고, 그놈이 모든 길을 인도한다는 걸 믿고 가야 합니다. 그러니까 눈을 번연히 뜨고도 쉬는 그런 자체가 돼야 그것이 진짜 놓는 것입니다. 우리가 ‘놓는다’ 그러니까 “다 놓고 어떻게 삽니까?” 이렇게 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냥 그대로 하는 것이 놓는 겁니다. 

내면에 그대로 들이고 내는 거, 이거 보십시오. 그거를 모르시겠걸랑 들이는 숨, 숨 쉬는 것 있죠? 들이는 숨 자체가 없다면 죽고, 내쉬는 숨 자체가 없다면 죽습니다. 그러면 들이고 내는 숨 쉬는 것은 어떤 놈이 쉬고 있습니까? 그와 같이 생활도 일체 만법을 들이고 내는 데에 여러분이 계시니까 들이고 내죠? 여러분이 계시지 않다면 들이고 낼 것조차도 없죠. 

그리고 여직껏 수억겁 광년으로부터 끌고 온, 진화되어서 끌고 온 장본인, 지금까지도 끌고 가는 이런 장본인 주인이 아니라면 간파를 못 하니까요. 그 주인이 있다는 것을 증명도 못 하니깐요. 그거는 사람의 마음으로써 다스려서 놓는 데 아주 간파할 수 있는 지름길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래야만이 의단도 대의단이 나오지 의단을 일부러 지어서 의단을 한다면 그거는 빈 맷돌 돌리는 거와 같다 이 소립니다. 내가 한때 이런 예가 있었죠. ‘이 길이 대로의 길이 아니니라.’ 정말 발도 떼어 놓을 수 없는 그런 산골, 아주 그냥 천야만야한 데를 그게 길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럴 때 어떻게 생각을 했겠습니까? 마음은 체가 없어서 지구 바깥에도 나갈 수가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마음의 도리를 배우는 사람들이 육신의 길만 찾아서 다닌다면 그거는 기지도 못하고 서지도 못한다 이 소립니다. 그러니 우리가 자기 마음의 거미줄에 얽혀서 발목을 못 빼면 일어설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실험이 되고 또 체험이 되고 이런다면 스스로서 놓을 것이 아무것도 없어요. 그대로예요, 그대로. 그대로 들이고 내는 그놈이 한다는 그 한 가지 믿음만, 뜻만이 남지 아무것도 없어요. 그러니까 얼마나 묘하고 얼마나 무변하고, 얼마나 광대한지 자기도 모르게 어떤 때는 싱긋이 웃을 때가 있고요, 나는 가끔 그러길 잘해요. 

옛날에도 어떤 한순간의 일이었지만 ‘부모가 자식한테 오면 자식이 하나가 되고, 자식이 부모한테 오면 부모가 하나가 되느니라. 그것은 무슨 연고인가?’ 하기 때문에 거기에서 고만 생각을 딱 하고 나니까 하늘을 보고 웃지 않을 수가 없었고 땅을 보고 울지 않을 수가 없었더란 얘깁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 모두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는 그 자체들이 전부 업을 짓고 걸어가기 때문입니다. 걸어가면 그냥 걸어가면 될 거를 그냥 내 다리가 어떻게 이렇게 걸리지 않고 걸어가나 하는 생각에 고만 걸리는 겁니다. 다리 많은 지네가 어떻게 서슴지 않고 잘 걸어갑니까? 다리가 많다는 생각을 안 하고 걸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여러분은 두 다리로 걸어가건만 두 다리로 걸어가는 것조차도 걸릴까 봐 바들바들 떠니까 걸리죠. 모두가 걸리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 깨치지 못한 사람들은 하나의 잘못이 거기에 대두된다는 것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마음으로 자기를 다스려서 놔야 된다는 얘깁니다. 다스려야 한다. 잘못 나가는 것을 다스려 놔야 된다. 그냥 무조건 다 여여하다고 해서 도둑질을 해도 괜찮다 이런 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행을 아주 남한테 이익하게 행을 하고, 이익하게 말하고, 또는 이익하게 생각하고 이렇게 해야만이 된다 이 소립니다. 

끓어오르는 마음 다스리고 싶어요
질문 하루에도 수없이 끓어오르는 마음을 주인공에 놓아 보지만 그 순간 잠시뿐 다시 머리를 쳐들고 올라옵니다. 이 마음공부 한다는 불자로서 너무나 부끄럽습니다만 어떻게 이 마음을 잘 다스릴 수 있는지 다시 한번 가르침 주시기 바랍니다.    

답변 우리 마음 자체가 어떻게 해야만이 안에서 일어나는 마음을 잘 이끌어 갈 수 있는가. 어떻게 해야만이 자기가 자기를 이끌어 갈 수 있고, 다스리는 그 마음이 중심에서 양면을 이끌고 갈 수 있느냐. 안에서 벌어지는 마음이 팥죽 솥의 팥죽 방울이라면 방울이 일어나는 대로 ‘이것도 문수 이것도 문수!’ 했단 말입니다. 그게 법이란 말입니다. 
 
여러분 몸 안에서, 대장이나 소장에서 만약 어느 한군데서만 파업을 일으킨대도 여러분은 죽습니다. 그러니까 한 귀퉁이 어디고 소중하지 않은 게 없죠. 다 한마음으로 돌아가야만이 몸도 건강하고 마음도 건강하고 지혜로워져서 부자 부럽지 않게 마음이 넓어질 수 있죠. 

이렇게 마음이 부자라면 이 세상을 살아나가는 것도 정말 대장부의 살림살이요 또는 어디고 가난치가 않다 이겁니다. 그것이 당당한 것이요, 그것이 부자가 돼서 부자가 아니라 내가 쓰려면, 내가 필요한 거면 어디서든지 들어오게 돼 있어요. 그 묘한 도리를 여러분이 모른다면 만날 가난하기에 바쁘죠. 가난뿐이 아니라 재난이 들어와도 그것을 막지 못하고 또는 병고가 들어와도 어떻게 할 수가 없죠.  

여러분은 바깥에 있는 지렁이를 볼 때 보기 싫고 징그럽고 그렇겠지만, 여러분 속에는 똥통도 들어 있고 구더기도 있고 또는 진드기도 있고 거위도 있고 촌충도 있고 벼룩 같은 것도 있고, 여러 가지로 이건 헤아릴 수가 없이 많이 들어 있습니다. 이렇게 많이 가지고 있는 반면에, 왜 그렇게 내 몸에 들어 있고 왜 그것이 곧바로 나였던가? 이런 거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 지구가 생긴 이래로 역사를 볼 때에도 미생물의 시대가 있었고, 곤충의 시대가 있었고, 또 그 뒤에는 공룡의 시대도 있었습니다. 우리 사람이 나기 전에 그렇게 미리미리들 그렇게 진화돼서 올라오기 위한 그 수련이, 그렇게 수많은 모습을 바꿔 가면서 시대를 거쳐서 이렇게 인간까지 온 것이 그게 바로 정신 수행입니다. 

자연적으로 지수화풍이 바탕이 되어서 그걸로 인해서 그렇게 모두 잡아먹고 잡아먹히고 쫓고 쫓기면서, 마음이 그렇게 해서 진화돼 가지고 모습을 바꾸고 바꾸고 한 게 인간까지 올라왔다 합니다. 누가 그것을 말해 주어서가 아니라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 이것을 파악할 수 있는 지금 현재의 나, 참나의 속에 다 들어 있다는 얘깁니다. 그러니 그렇게 해서 인간까지 무수한 그 길을 걸어서 여기까지 왔는데, 그것은 끝없는 길입니다. 

그럼 인간이 되어 가지고도 또 짐승으로 돼야 되겠습니까? 또는 독사가 돼야 되겠습니까? 여러분이 행동하고 말하고, 남의 탓을 하고 원망하고 죽이고 살리고 온통 부서지게 하고 남을 해롭게만 하는 그런 마음을 갖는다면 틀림없이, 미래에 올 것을 여러분이 더 잘 아실 것 아닙니까. 과거에 한 일은 현실에 너무나 더 잘 아시고요. 여러분이 살아나가는 그 동기를 항상 지켜본다면 아마 과거에 어떻게 살았는지 다 아실 겁니다. 

그런데 그것이 다 지금 여러분 몸속에 악업 선업으로 뭉쳐 있다가 컴퓨터에서 나오는 것처럼 그대로 입력이 되어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 거기에 속지 마시고, 누가 되는 일은 하지 마시고, 누가 아니 되는 거는 하시고, 들이는 것도 바로 여기 주인공 자리에다 맡겨서 들이고, 내는 것도 여기다 맡겨서 낼 수 있다면, 지금 레이더망에서 들이고 내면서 책정해서 다 이렇게 하듯이 그렇게 아주 자동적으로 돼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그리고 재료가 모두 여러분한테 주어져 있습니다. 항상 말했죠, 광력이나 전력 자력 통신력이 그 지수화풍을 바탕으로 삼아서 돼 있다구요. 

그런데 가만히 생각을 해 보십시오. 우리가 지금 물질세계의 의식으로서 산다면 물질세계의 노예고, 그것은 끝 간 데 없는 길을 고통스럽게 걸어야만 합니다. 그래서 살아 있으면서 죽지 않는다면 열반이 아닙니다. 살아서 이 도리를 알고 죽어야 열반이지, 만약에 살아서 이 도리를 모르고 죽는다면 그건 그냥 그대로, 그 고통 속에서 죽는다 산다도 없이 끝없는 길을 걸어야만 하는 그런 고통입니다. 

여러분이 깨치고 본다면 모든 것이 마음은 체가 없어서 악으로 나가도 수없이 나가고, 선으로 나가도 수없이 나갑니다. 어느 쪽으로 나가느냐가 문제죠. 야! 이게 또 묘한 도리가 있지 않습니까? 그 속에서 내 마음이, 다스리는 마음이 없다면, 바로 거기서 맘대로 ‘내가 저걸 꼭 훔쳐와야겠다. 남이야 살건 말건 나는 살아야겠다.’ 하는 마음이 들게 되고 이 의식들은 그것이 나쁘고 좋고를 모르기 때문에 다 따라 줍니다. 그 마음이 서면 악도 그만큼 있고 또는 선도 그만큼 있습니다. 선이 더 많으냐 악이 더 많으냐 이게 문제죠. 

그래서 여러분은 똑같이 인간으로서 살지만 같은 시대에 살면서도 즐거웁게 선으로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악으로 괴롭게 사는 사람이 있죠. 만약에 같은 물을 마셔도 독사가 먹는다면 그건 독이 될 것이고 약초가 먹는다면 약초가 돼서 인간을 살립니다. 칼도 칼 나름입니다. 의사는 칼을 들어서 사람을 살리지마는 강도는 칼을 들어서 사람을 죽입니다. 이 모두가 상대성 원리입니다. 부처도 중생도 풀 한 포기도 다 내 소유로서 모든 것이 하나로 돌아갈 수 있는 그러한 소유가 돼야만이, 그때 가서는 나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 오고, 바로 그때에 부처님이 뚜렷하고 중생이 뚜렷하고, 하는 일이 이건 이거고 저건 저거고, 너는 너고 나는 나고, 이렇게 뚜렷하게 나오고 하나도 버릴 게 없다는 사실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서부터 열까지 나는 나고 너는 너고, 미운 걸 보면 그렇게 미웁고, 잘못하는 걸 보면 그렇게 보기 싫고, 또 부부지간도 그렇고 자식지간도 그렇고 일일이 그거를 미워하죠, 잘못하는 걸 보면. 그러나 이쁜 일을 조금 할 때는 좋아서 그냥 발발발발 하지, 누가 좋은 말을 해 주면 좋고, 속이야 어떻게 됐든지 좋은 말을 야불야불 해 주면 아주 좋아하고, 진실로써 ‘너는 이렇다’ 지적을 해 주면 그게 듣기 싫어서 왈칵 화가 나고 ‘너 두고 보자.’ 이러고, 이러는 마음이 자기를 깎아먹게 돼요. 이 세상은 내가 없으면 아무것도 없어요. 내가 있으니깐 모두 내 탓으로 돌리라는 거죠. 그래야만이 내가 공해서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될 테니까요.

그러니까 일어나는 그 마음이 우리를 부처로 만들 수 있고 법신으로 만들 수 있는 과정이며 나를 수련시키는 채찍이 됩니다. 그것이 나오면 허허 웃고 ‘하, 거기서 나온 거니까, 그놈이 그놈이로구나. 거기서 나온 거니까 거기서 너희들 해결해라.’ 하고 거기다 놓으면 되지, 거기에 끄달릴 필요가 없습니다. 

둘이 아닌 도리만 알면, 모두가 어떤 것이 속에서 나오더라도 ‘아하! 이것은 나를 둥글게 다스리기 위해서 정으로 치는구나. 이건 또 나를 다스리기 위해서 내 마음이 이심전심으로 돌아가서 저 사람의 마음으로 들어가 나를 치는구나. 참 감사하구나.’ 하고 감사하게 거기 맡길 수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남의 탓도 안 되고 증오도 없고 배신도 없고 미움도 없고 얼굴에서 웃음이 띠면서 감사함을 느끼고 얼마나 좋습니까? 자기의 주인공은 ‘착하고 착하구나. 너는 네가 나온 도를 알고 네가 행하는 도를 알고 네가 말하는 그 법을 아는구나.’ 하고 이 우주 삼라대천세계에 그 마음들이 한마음으로 구성돼서 여러분 마음속에 들고 나면서 여러분을 키울 수 있는 그런 자리가 되죠. 

요것 버리고 조것 버리고 다 버린다면 뭐 남는 게 있어서 하나도 빠짐없이 그거를 정복하겠습니까? 더럽다고 버리고 미웁다고 버리고 또 즐겁다고 들이고 이런다면 하나도 없이 가질 수가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하나도 빠짐없이 다 귀결돼서 넣고 보니까 나중에 그것을 하나도 버릴 게 없어서 다 나 아님이 없더라 할 때까지 우리가 공부해야 합니다. 이 실생활 속에서 바로 도가 있는 거지 실생활 빼놓고 도가 있는 게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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