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상 한 철 나왔다가 부닥침이 없다면 뭐 배울 게 있겠습니까

우리가 진실하게 믿고 진실히 놓는 작업을 할 때 
또는 진실히 구하고 물러서지 않을 때
바로 자기 아닌 자기와의 만남의 소식을 얻을 수 있다.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새해를 맞이해서 올해는 한층 더 분발해서 자유스럽게 벗어날 수 있는 그런 계기를 얻으시길 바랍니다. 이 세상 만물이 다 내 스승 아님이 없다 함은,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물에 가면 싱그럽고 물이 좋죠? 그러니 물은 말없이 날더러 물같이 살라고 하는 것입니다. 꽃을 볼 때에 꽃도 나같이 살라고 하는 겁니다. 모진 풀뿌리를 봤을 때도 나를 보고서 지혜롭게 살라고 하는 것입니다. 모든 일체 만물은 다 나같이 살라 하니 내 스승 아님이 없다 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러모로 봐서 지극하게 믿고, 믿는 것을 바깥으로 믿지 말고 안으로 믿을 때에, 진실하게 믿고 놓는 작업을 할 때에, 맡겨 놓는 작업을 할 때에 일체 만법이 다 그 속에서 나고 드는 것이니까, 그 속에다 맡겨 놓을 수 있는 그런 작업을 필요로 합니다. 그래야만 진실하게 구하는 법도 나오고 진실하게 깨닫는 도리도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명심하여 들으셔야 합니다. 여러분은 항상 주인공을 찾다가도 어떠한 일이 용도에 따라서 부닥치면 안으로 놓기 이전에 바깥으로 끄달리고들 하십니다. 안으로부터인데 말입니다. 

안에다 물을 줘야 바깥의 나무들이 잘 자라듯이 벌써 말은 그렇게 하면서, 알아들었다고, 주인공에 놓는다고 하면서도 행은 그렇지 못합니다. 행과 믿음과 구함이 진실해야만 하는데 말이죠. 아까도 얘기했던 거와 마찬가지로 ‘모든 일체 만물이 다 내 스승 아님이 없도다.’ 하고 그렇게 모든 걸 둘로 보지 말고 내 탓으로 돌리고, 나한테서만이 이끌어 줌이 나온다고 생각할 때 모든 해결은 그 속에서 하는 것입니다. 나를 깨닫게, 증득하게 해 주는 것도 그 속에서만이 깨달음을 가져오게 하는 것입니다. 

이게 진실이 없으면 어디까지나 가짜입니다. 곧 죽어도 옳은 거는 옳게 안으로 놓고 밀고 나가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한 철 나왔다가 부닥침이 없다면 뭐 배울 게 있겠습니까? 한 철 날 때에 부지런히 해서 깨달아야만 요다음 생에…, 아니, 나고 들고 하기 이전에, 생하고 멸하고 하기 이전에, 내가 자유스럽게 보고, 자유스럽게 듣고, 자유스럽게 남을 알고, 자유스럽게 어디서 온 걸 알고, 자유스럽게 오고 갈 수 있다면, 그리고 자유스럽게 내가 직접 주기도 하고 먹기도 할 수 있다면 그때에 비로소 자유인인 것입니다. 그리고 부처인 것입니다. 부처가 된다면 스스로 법신이 되고 스스로 화신이 되는 것입니다. 천백억화신도 될 수 있고요. 

그러니 여러분, ‘나는 바빠서 못 온다, 뭐, 주인공 찾는 거니까 집에서 해도 된다’ 이렇게 해 가지고 잘못되는 사람이 더러 있습니다. 왜 교수 노릇을 하면서도 자기네 아들딸들을 학교로 보냅니까? 왜 내 집 아이가 수술을 받아야 하는데 꼭 남의 의사한테 맡깁니까? 내 집 아이는 내가 수술을 하기에는 너무 그 마음이 그게, 남과 내가 둘이 아니라는 거를 알면 해도 괜찮건만 내 자식이라는 그 착에 의해서 수술하는 칼을 못 대죠. 그래서 여러분이 진실하게 행하고 부드럽게 말하고 무조건 남을 이익하게 한다면 무조건 나한테 이익이 온다는 그 점을 자비라고 합니다. 질문하실 게 있으면 질문하십시오.

질문자1(남) 신도님들의 여러 가지 질문 가운데 네 가지를 간추려서 부족함을 무릅쓰고 스님께 여쭤 볼까 합니다. 첫째 질문은, 이 육신을 벗고 다음 생에 새로이 몸을 얻는 윤회의 과정에서 새로 태어날 영혼들은 업식으로 인하여 육신을 자유로이 선택할 수 없다고 합니다. 이 도리가 한편으로는 이해가 되면서도 한편 생각하면 그 업식이 무슨 까닭으로 소, 돼지 또는 인간의 몸을 구별하지 못하는지요?

큰스님 여러분도 잘 생각해 보십시오. 누가 갖다 주고 뺏어 가는 게 아닙니다. 누구나가 이 세상 다 살고 갈 때에는 다 그렇습니다. 즉 말하자면 재물이라는 것은 바로 대문 안에서나 고하고 바깥으로는 인사 한마디 없이 나가게 됩니다. 또 자식, 부부 또는 권세를 누렸다 하면 따르던 친구들도 동구 바깥에서만이 고하게 됩니다. 그리고 업식만 따라가게 돼 있습니다. 자기가 산 것대로 말입니다. 

독하게 살았으면 독사가 될 것이요, 남이 먹거나 말거나 사기라도 쳐서 먹으려고 하는 돼지같이 살았으면 돼지가 될 것입니다. 그건 철칙입니다. 요만큼도 에누리가 없는 것입니다. 자기가 아는 것을 이 우주 법계에서 알고 있으니깐요. 항상 직결돼 있다고 그랬죠? 세상과도 가설이 돼 있다고 했고요. 그러니만큼 자기 행동 여하에 따라서 그것이 주어지는 것이죠.

그런데 그렇게 행동 여하에 따라서 업식이 자기의 본성을 모두 가려서 눈이 뜨이지 못해서 보지도 못하고 귀도 뜨이지 못해서 듣지도 못하고, 그 업식으로 말미암아 돼지가 접하는지, 새들이 접하는지, 고양이가 접하는지, 사람이 접하는지 그거를 통히 분간을 못 해, 눈이 뜨이질 못하고 귀가 뜨이질 못해서. 그 업식으로서만 남아서 그저 어디든지, 예를 들어서 잠자리하는 그 뜻만 알고 기어 들어가는 거야. 그러니 돼지 소굴에 들어가면 돼지가 될 것이고, 사람 소굴에 들어갔으면 사람이 될 것이고, 자기 한 대로죠. 자동적으로 그 업이 주어져 있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가게 마련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상점에 놓여 있는 모든 물건들을 보십시오. 배는 배대로 놓여 있고 사과는 사과대로 놓여 있습니다. 일체 만물이 다 그러합니다. 금은 금방으로 갈 것이고요, 자동적으로 말입니다. 운전사들도 짐차를 하는 사람들은 구역 구역 맡아 가지고선 그 짐차들끼리 모입니다. 그건 누가 모여라, 모이지 말라 하기 이전에 그런 차원에 의해서 모두 모이게끔 돼 있죠. 그러니만큼 자동적으로 그렇게 업식이 그림자처럼 쫓아다니면서 그렇게 만들어 놓는 거죠. 그거를 누가 만들었나요? 자기가 만들고 가는 거죠, 자기가 짓고.

그러니 부잣집에 태어나는 것도 자기 업이죠. 그래서 될 수 있으면 악업을 짓지 말고 선업을 지어라. 또 마음공부 하는 스님네들로 하여금 선업도 놓고 악업도 놔라 이러는 것입니다. 악업을 지을 때는 선업도 지을 것이요, 선업을 지을 때는 악업도 지을 수 있으니깐 말입니다. 양면을 다 놔라 이겁니다. 그러니 어찌 남을 탓하리오. 그게 다 자기의 마음먹기에 달린 것이죠. 마음 떠나서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질문자1(남) 두 번째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평소에 자신을 되돌아보면 마음이란 끊임없이 생멸하는 것임을 느끼게 됩니다. 이처럼 끊임없이 생멸하는 마음의 정체는 무엇이며 불생불멸 하는 한마음과는 어떻게 다른지요.

큰스님 생멸이라 하는 것이 불생불멸이라 하는 거하고 어떻게 다르냐. 사람이 죽는다 해서 사람이 없어질 리 없고, 안 그렇습니까? 나무들을 베어서 없앤다 해서 나무라는 것이 없어질 리 없고, 또 그 뒤로 본다면 사람이 죽어서도 그냥 없어지는 게 아닌 까닭에, 나무를 베어서 다른 걸 한다 하더라도 다른 걸로 또 생(生)해 나오게 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간단하게 죽었다 살았다 개별적으로 생각할 때에는 생멸이지마는, 포괄적으로 말할 때는 불생불멸이다 이 소립니다. 부서지고 변하고 하면서도 끝없이 변함없이 진리는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생불멸이라 하는데 우리가 깨달으면 불생불멸이라는 그 언어에도 끄달리지 않는다 이 소립니다.

질문자1(남) 세 번째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초발심이 곧 바른 깨달음이란 말이 있습니다. 제 자신도 삼보에 귀의하기로 마음먹은 지 오래지만 아직도 캄캄하기만 합니다. 초발심의 경지를 어찌 바른 깨달음이라고 할 수 있는지요.

큰스님 우리가 삼천 년 후나 삼천 년 전이나 그냥 오늘인 것입니다. 마음은 체가 없고 붙잡을 수도 없고 빛깔도 없어서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진실히 믿고 진실히 놓는 작업을 할 때, 또는 진실히 구하고 물러서지 않을 때, 그것이 바로 자기가 아닌 자기와의 만남의 소식을 얻을 수 있는 거고, 한생각이 바로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생각이 진실하다면 아까 얘기했던 거와 마찬가지로 야, 믿는다고 하면서도 행은 그렇지 못해. 바깥으로 끄달리고 모든 행도 말도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초발심에 깨치지 못하는 것이지, 초발심이 십 년이 갔든 이십 년이 갔든 하루가 갔든 일 초가 갔든 둘이 아닌 것이기 때문에 초발심이라고 하는 겁니다. 깨달음이란 한 찰나니깐.

그러니 우리가 말하고 행하는 동시에 뜻과 더불어 같이 진실하게 물러서지 않고 믿고 놓을 수 있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십 년이 갔다 하더라도 깨달음에 있어서는 십 년과 일 초가 맞먹습니다. 그러니 초발심이죠. 그러니 깨닫지 못하고 깨닫고 하는 것은 자기의 마음먹기에 달렸다. 마음먹고 행하고 말하고 뜻하고 모든 것이 결부돼야 되는 것이지, 이 컵 하나라도 그것이 빠지면 안 되죠. 결부됐으니깐 컵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생산이 된 거죠. 지수화풍 그 자체가 결부가 됐으니까 이것이 나온 것입니다. 

이 지수화풍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신다면, 바로 흙과 물로 개어서 바람에 말려서 불에 굽는 겁니다. 그렇게 인연에 따라서 한데 결부가 돼서 작용이 되기 때문에 컵 하나가 나오는 겁니다. 그러니 이것도 그냥 겉벌로 볼 게 아니라 우주의 개공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라고 봅니다. 

그러면 이 빈 그릇만 나와서만이 아니라 바로 이 컵에다가 물을 담아서 먹어야 이 컵이 컵이라는 빛이 있는 거지 뭐, 담아 먹을 수 없다면 아무 빛이 나지 않는 거죠. 그러니깐 물 담아 먹고 음료수 담아 먹고 (컵의 물을 드시며) 이렇게 먹을 수 있기 때문에 바로 ‘우주개공이 이 컵에도 있느니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깐 초발심에 삼천 년이 갔다 하더라도 행하지 못한다면 초발심도 없는 것이고 행한다면 일 초도 안 된다 이 소리지.

질문자1(남) 그럼, 마지막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주인공을 믿고 주인공에 모든 걸 놓아 가면 모든 일이 잘 풀려나간다는 말을 여러 차례 듣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제 자신이 어느새 편안한 경계를 구하고 그것을 좋아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믿고 놓는 마음 가운데 편안한 경계를 좋아하는 마음이 깃든다면 잘못 가고 있는지요.

큰스님 그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지. 내 마음이 편안하면 이 육체 안에 있는 중생들도 편안하기 때문이지. 모두가 한데 뭉쳐서 놓을 수 있는, 주인공에다 놓을 수 있는 작업이 물러서지 않는 진실이라면 바로 그 마음은 한마음으로 돌아가니깐 편안함이 오고 끄달리지 않는 법이지. 그럼으로써 이 우주 천체는 근본 하나로 돌아가지만, 평등하게 돌아가지만 용도에 따라서 끌어 쓰는 정도는 다 달라요. 

그러니까 평등하게 둘로 보지 말고 주인공에다 모두 일임해서 놨을 때, 그리고 자기한테 용도에 따라서 다가오는 그 모두를 건건이 거기에다가 놓고 거기서만이 할 수 있다는 믿음을 진실하게 가질 때, 하늘이 무너져도 거기다가만이 놓을 수 있을 때, 죽고 사는 것을 탓하지 않을 때, 그런 때에 비로소 편안하면서도 그 모두를 커버할 수 있고 자유스럽게, 대권을 얻을 수가 있다. 그것이 바로 아까 얘기했던 거와 같이 진실하게, 진실하게 믿고 진실하게 놓고 진실하게 행하고, 진실하고 부드럽게 뜻을 가지고 말할 수 있는 그런 마음 태세가 된다면 진실하게 구함도 나올 것이다, 그리고 진실하게 깨닫는 소식도 얻을 것이다라는 얘기예요. 

그러니 그 편안함, 편안함도 여러 가지겠지마는 그냥 무조건 ‘옛다 봐라, 죽기 않으면 살기지.’ 이러고 놓는 거하고, 믿고 놓고 편안한 것하고 다른 거죠. 처음에 얘기했듯이 모두가 내 스승 아님이 하나도 없다고 했을 때 진실로 그렇게 감응이 된다면 나 아님이, 내 아픔 아님이 하나도 없어요. 그랬을 때에 그 한마음이라는 것은, 그거는 이루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그런 뜻이니까 그대로 거기에 (가슴을 짚어 보이시고) 맡기고, 믿고 진실되게 가야 하는데 믿지 않거나 설 믿는다면, 잘했을 때 ‘아, 감사하다.’ 이렇게 했더라도 다음에 가서 안 되니까 아, 이건 또 도루묵이 돼 버려, 안 되니까. 

이거 봐요. 안 되는 것도 법, 되는 것도 법이라는 걸 아까 얘기했죠. 선업 악업을 다 놔라. 만약에 회사를 경영한다면 높이 놓을 사람은 높이 놓고, 얕이 놓을 사람은 얕이 놔야 일이 되지, 그 작업을 못 한대서야 어떻게 회사를 경영할 수 있겠소. 그런 거와 마찬가지로 부처님 법에도 악업 선업을 다 놓고 배워야 돼요. 

그거를 비유해서 한번 얘기하죠. 어떤 사람이 승진을 시켜 달라고 아주 정성을 지극하게 들였어요. 그것도 뭐, 이루 말할 수 없이 지극하게 들였어요. 그런데 그만 뒷걸음질이 돼 버렸어요. 그러고 남이 그 자리에 와 가지고선 월남을 가게 됐단 말이에요. 그런데 월남을 가서 그만 전사를 해서 왔어요. 그렇게 되고 난 뒤에 다시금 승진이 되니까 어떻게 됐겠어요. 처음에 진실히 했는데 후퇴가 됐으니 어떻게 됐겠소. 그 믿음이라는 게 산산조각이 났겠지. 그렇게 해서는 안 되지. 그래도 뜻이 있으니깐 후퇴가 됐겠지. 

그러니까 얼른 쉽게 말해서 악업 선업을 다 놔라 하는 것은, 안 되는 것도 법 되는 것도 법이다 하는 것인데 어떠한 까닭이냐? 바로 그러한 까닭이다 이거죠. 자유인의 대권을 얻었다면 불리하면 내려놓을 수도 있고 이익하면 올려놓을 수도 있어야 되는 거지, 이익하거나 해롭거나 올려놓을 줄만 안다면 그건 망하고 마는 거야. 전쟁에 나가서 싸울 때도, 후퇴할 때는 후퇴하고 전진할 때는 전진해야 되는 거 아니겠어. 그런 능수능란한 지혜가 없다면 어떻게 지휘를 맡아 가지고 일할 수 있겠나. 그와 똑같은 거야. 

부처님께서 자유자재한다는 뜻은 아픔을 똑같이 느끼면서 모든 거를 이익하게 이끌어 주는 것이지만, 얼른 쉽게 말해서 아주 권력을 남용하고 모든 일에 부정으로 가고 그러면 그냥 부정으로 가게끔 해 주는 거야. 자기가 막다른 골목에 들어서서 행해 봐야 ‘아이쿠!’ 그때 가서야 아는 것이지. 그러니까 내려놓을 줄도 알고 올려놓을 줄도 알아야 자유자재의 대권을 얻었다 할 것이야. 

질문자1(남) 감사합니다. 

큰스님 뭐라고 물었는데 뭐라고 대답했는지 모르겠어. 하하하. 듣는 사람이 다 잘 추려서 듣기를 바래요. 

질문자2(여) 큰스님, 감사합니다. 저번 달에 사돈하고 같이 왔던 사람입니다. 신기하게도 그렇게 아파 못 견디다가 스님 뵈옵는 그 순간부터 지금 한 일 개월 동안 하나도 안 아프고 약도 다 끊어 버렸어요. 그랬는데 지금 한 5일 전부터 또 아프다 그래요. 그래서 염치없이 이렇게 또 괴롭힙니다. 

큰스님 언제나 남이 주는 것은 그 물 한 바가지 주면 그 물을 먹는 동안에 또 물을 퍼야 할 텐데, 남이 줬다 해서 물을 그냥 먹고 바가지가 탕탕 비게 만들어. 여러분이 이 공부 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떠다 놓은 물을 그냥 먹는 거하고, 내 깊은 골짜기에서 샘물이 나와서 떠 먹는 거는 다르죠. 내 물 내가 떠다 먹어야 항상 당당하고 또 믿음직하고, 항상 퍼 먹을 샘물이 있으니까 항상 든든하고 그렇죠, 그렇게 믿는다면. 그런데 남이 떠다 항아리에 넣어 준 물은 아이구, 한 바가지 떠 먹고는 또 없어지고 또 없어지고 이게 달랑거려서 못 견디는 겁니다. 그러니까 달랑거리지 않도록 하시는 것이 그런 문제가 또 오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질문자2(여) 감사합니다.

큰스님 가서 오늘부터 ‘아하, 이런 것이 바가지에 물을 떠서 주는 그것만 딱 먹는 것이구나. 이제는 내 주인공만이 그것을 해결할 수 있다. 또 이 주인공은 개별적인 나의 주인만이 아니라 스님의 마음도 일체제불의 마음도 전부 포괄적으로, 스님의 마음도 내 마음속에 계시구나.’ 하는 거를 딱 이렇게 해 가지고 한마음 속에 맡기십시오.

질문자2(여) 예. 신기하게도 그렇게 아파 못 견뎠는데 아주 뭐, 안 아픈 사람같이 되었거든요. 그러니 본인도 신기하다고 생각합니다. 스님의 가피라고 생각하고요. 근데 너무 중병이다 보니 너무너무 아파하니까 이렇게 또 왔습니다.

큰스님 그러니까 바가지에 물이 떨어지지 않도록 하세요. 그냥 바가지에 물 주는 것만 그냥 뚝 마시고 말아 버리니 그놈의 거 그냥…. 부처님께서는 가르침을 주기 위해서 애들을 불난 집에서 꺼내 내려니까 사탕을 주고 장난감을 주고, 이렇게 해서 꺼내 놓는다는 걸 아셔야죠. 공부하는 데 게으름이 없이 해야 그 살림을 이끌어 나갈 수 있죠.
(다음 호에 계속)

※위 법문은 대행 선사 법문집 ≪허공을 걷는 길≫ 중 1992년 2월 16일 정기법회 법문을 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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