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부처를 자기가 찾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무조건입니다, 무조건!
일체 만법이 벌어지는 이 세상이 전부 자기로 인해 생긴 것이니 
세상이 둘이 아니게 돌아가는 이 이치를 꿰뚫어 알기 위해서는 
뭉쳐놓고 뭉쳐놓고 그렇게 해 나가야 합니다.

살아서 마음 도리 알아야 한다는데
질문 스님께서는 살아서 이 도리를 알아야 한다고 하시는데 이 마음 도리를 모르고 몸을 벗으면 어떻게 되는지요.

답변 항상 여러분한테 생활이 공부라고 했습니다. 생활이 교재라고 했습니다. ‘불(佛)’이라는 것은 생명의 근본을 말하고 ‘교(敎)’라는 것은 생활, 삶이라고 그랬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항상 공부하는 이유가 어딨느냐. 사람이 살면서 내 주인공의 줄을…, 이건 근본이기 때문에 움죽거리진 않습니다. 움죽거리지 않는 근본의 줄을 잡고 그 언덕을 넘어서야 된다는 얘기죠. 즉 말하자면, 천야만야한 산을 타는데 줄이 없으면 올라갈 수가 없죠. 

본래 우리들은 제각기 줄이 있습니다. 그 줄은 누구나가 다 가지고 있습니다. 어려웁게 살든 못났든 잘났든 가난하든 이걸 떠나서 다, 하다못해 물에서 노는 고기들도 생명이 있기 때문에 불성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어느 거 하나 빼놓지 않고 불성은 있으니 불교라고 했죠. 사람들이 살고 죽고 하는 게 그냥 불교예요.  

그런데 말입니다, 우리가 이런 공부를 할 때에 내가 공했다는 걸 알아야죠. 내 전체 몸속에 있는 생명들도 다 공해서 한 개체로 산다고 그랬죠. 그런데 그 살고 있는 한 개체가 ‘나’가 없다면 상대가 전부 없어요, 나만 없다면. 그래서 ‘나의 나무는 나의 뿌리를 믿어야 된다’는 것이 바로 그 줄타기할 때 줄을 잡고 올라가는 것과 같아요. 

그런데 그 줄을 잡게 하지 않고, 잡는 것도 모르고 그냥 부처님만 찾든지, 모든 것을 잘하라는 둥 믿으라는 둥 이렇게만 자꾸 나간다면 자기는 그 언덕 위의 맛을 못 보고 항상 심부름꾼 노릇만 해야 되겠죠. 자기 부처를 자기가 찾지 못하고 그냥 심부름꾼 노릇만 하는 거죠. 그러니까 내가 그렇게 살면서 공한 줄 알고, 내가 공해서 없다는 것도 알아야 하죠. 

왜냐? 생명들과 더불어 같이 살기 때문에 어떤 거를 했을 때에 내가 했다고 할 수 없으니 공했다는 얘기죠. 모두가 그래서 부처란 얘기죠. 어떤 거를 했을 때 내가 했다고 할 수 없으리만큼 많은 생명들이 더불어 같이 살기 때문이죠. 이해가 되시겠죠?  

그런데 그렇게 공부를 하고 가면 내 몸뚱이가 살아 있어도 체가 없는데, 내 것이 없는데, 세울 게 없는데, 또 본래 있으므로 찾을 게 없는데, 체가 없는 나가 물에 빠질 리가 있겠습니까? 이런 뜻을 알고 간다면요, 죽을 리가 없죠. 불에 들어가도 뜨거워서 타 죽을 일 없죠. 지옥고에 빠진다 하더라도 둘이 아닌 까닭에 오히려 건지죠. 

이러한 거를 살아생전에 다 알아야 돌아가셔도 제 길을 자유대로 찾을 수가 있죠. 태어나려면 태어나고, 아니면 그냥 보살로서 행해 나갈 수도 있고, 상세계의 부처님 도량에, 한도량에 한마음으로써 진행할 수도 있고, 지금 시쳇말로 말입니다. 그리고 오히려 남이 보지 못하는 거를 보고 듣고 행하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을 다 건질 수 있는 능력이 자동적으로 주어지죠. 그것은 전체 한울, 한도량에서 인가를 받는다, 또는 그런 원력이 그대로 주어진다, 지위가 그냥 주어진다 이런 뜻입니다.  

그런데 이 도리를 모르고 돌아가신다면 외려 지옥고에 들어갈 수가 없죠, 무서워서. 환상을 보면 전부 그냥 무서우니까요. 자기가 체가 없는 줄도 모르고 관습, 욕심, 착, 이런 거를 두기 때문에 여기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지옥고도 들를 수가 없는 거죠. 그 지옥고에서 고통받는 중생들이 자기를 해칠까 봐 무서워서 그러는 거거든요. 

첫 단계에 지옥고를 건너지 못하면 두 번째 단계에는 빠져 죽을까 봐 강을 못 건넌다 이겁니다. 세 번째 가서는, 지금 이 허공에 에너지가 있다는 사실을 볼 때에 그 불은 뜨겁지 않은 불이란 말입니다. 그런데도 자기가 체가 없는 거를 생각지 못하고 지금 현재에 사는 의식을 가지고 있단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의식이 발동하면 뜨거운 불기둥을 넘어가질 못하거든요. 우리가 ‘저 언덕’이라고 그랬죠? ‘피안의 언덕’ 이래도 되구요. 그런데 저 언덕이 따로 있는 게 아니에요. 여러분이 ‘아, 이건 참 모르겠다. 이건 우리가 못 하지. 여기서는 정말 물질세계에서 정신세계로 넘어갈 수가 없다.’ 하면서 이렇게 모른다고 하는 그 자체가 도예요. 모르는 게 도라니까요.  

그래서 저 언덕이 나를 떠나서 있는 게 아니라, 나에게 저 언덕도 있고 이 언덕도 있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오직 일거수일투족 그 줄을 잡고 간다. 옆에서 아무리 별소릴 다 해도 그냥 둘이 아니게 그대로, 진리대로 붙들고 간다. 거기서 에너지를 배출하는 거니까, 어떠한 것으로 화해서 바꿔져 돌아가든지 일거수일투족 다 거기서 나오는 거니까, 다 이 줄이 말해 주는구나.’ 하곤 그냥 좇아가야죠. 그런데 그거를 좇아가지 못한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우리가 지금 이렇게 살아서 알아야지 죽은 뒤에 알 수는 없는 겁니다. 살아서는 부딪치니까 부딪치는 아픔을 알고, 슬기로운 지혜를 알고, 모든 걸 그렇게 알아서 하지만 죽으면 더하고 덜함도 없어요, 체가 없기 때문에. 경험을 살리고 물리가 터지도록 할 수 있는 체가 없단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살아서 내 마음이 ‘아, 이젠 가도 넉넉하겠구나. 이젠 내 몸이 옷을 벗어도 괜찮겠구나.’ 할 때는 ‘옷을 벗으면 뭐를 할까?’ 하는 생각이 없어도 자기가 하는 대로 그냥 자동적으로 차원이 주어지고 지위가 주어져요. 그래서 벗고 가려면 벗고 가고, 조금 더 있으려면 더 있고, 그렇게 돼야 그래도 사람의 삶이 그저 허탕하지만은 않지 않겠습니까? 허망하고 허탕하고 이런 기가 없을 거 아닙니까?  

그러니 우리가 지금 살아서 그 뜻을 모른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뭐, 뒤에서 철퇴가 들어오니 알겠습니까, 방망이가 들어오니 알겠습니까? 또 인연으로 인해서 원수가 나를 치러 들어와도 모르구요. 길을 가고 오다가 무명 영가들이 들이덤벼도 알 수 있나. 인간 하나가 사는 데에 그렇게…, 우연히도 없고 철두철미하게 자기가 생각하고 행동하고 말하는 대로 그 업이 자기한테 찰나찰나 오죠. 그런데 그것을 모두 그 안에서 타파할 수 있기 때문에 거기에다 하라고 그러는 겁니다. 

참선과 관법은 다른 것인지요
질문 이제 마음공부 초보자입니다. 친구 따라 절에 발을 디딘 지 한 삼 개월 정도 되긴 했는데 주인공에 관한다는 것이 알 듯하면서도 잘 모르겠습니다. 어떤 때는 잘 관하고 있는 것 같다가 어떤 때는 전혀 관하고 있지 않을 때가 있거든요. 그런데 관하는 것과 참선하는 것은 다른 것인지요. 저희 같은 초보자들을 위하여 다시 한번 가르침 주시기 바랍니다.

답변 관법은 누우나 앉으나, 내가 좀 앉아서 참구해 보겠다 하고 앉았으면 ‘주인공, 당신만이 당신이 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어.’ 하는 것입니다. 그게 관법입니다. 당신이 당신이 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거지 바깥에서 증명할 수는 없는 겁니다. 주인공만이 자기가 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겁니다. 

뛰어넘고 뛰어넘고 하는 교차로가 바로 거기입니다. 우리가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교차로와 같습니다. 여러분이 숨을 들이쉬고 내쉴 수 없다면 죽을 거고, 내쉬고 들이쉴 수 있다면 살 겁니다. 그 양면이 교차하는 그런 틈에서 그냥 그대로 숨을 쉬고 살고 있는 거와 마찬가지니까, 바로 그놈이 있으니까, 그놈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건 그놈밖에 없잖아? 그리고 모든 생활을 들이고 내는 것이 자기가 있기 때문에 들이고 내는 게 아닌가? 자기가 없다면 들이고 낼 건덕지는 뭐 있어? 아무것도 없지. 그리고 숨을 들이쉬고 내쉴 수 없다면 이 공부는 어떻게 해? 그렇기 때문에 이 배낭이라는, 종이라는, 집이라는 육신에 50%가 달려 있다 이 소립니다. 이해가 가십니까?

 그런데 관하지 않으나 관하나 지구는 돌아가고 있습니다. 세상은 그냥 돌아가고 있고, 자기가 관을 안 하든 하든 돌아가고 있어요, 그냥. 안 하는 것도 그 자리요, 하는 것도 그 자리라 이겁니다. 그러니까 그대로 여여함이죠. 안 한다, 끊어졌다 하는 생각은 자기의 관념적인 생각이지 포괄적인 생각은 아니닙니다. 그러니까 쉬어라 이 소리에요, 그냥. 하루 종일 24시간 얘기를 안 하고 그거를 끊어뜨리고 있다 하는 것도 자기 관념의 생각이지 끊어지긴 뭐가 끊어집니까, 시공이 없이 그냥 돌아가는데. 

끊어진 것도 거기서, 하루 종일 일을 하다가 문득 생각이 나도 거기서예요. 이런 게 있어요. 24시간이라는 거는 우리의 관념적인 생각이지 24시간이라는 것도 없다 이겁니다. 그러니까 아침에 생각했다 저녁에 생각해도 아침하고 저녁하고 그냥 붙어 버려요. 그 공간이 그냥 없어져 버리죠. 이렇게 묘한 법입니다. 이래도 모르시겠어요? 그건 사람이 만들어 놓은 관념적인 생각이라 이겁니다, 하루 종일 내가 끊어뜨렸다 하는 생각은.

그런데 참선이라고 하는 것은, 이 뭣고도 그 자리에 놓는 것입니다. ‘이 뭣고’라는 말에 착이 붙으면 끊어질까 봐 두렵고 또는 무기공에 떨어질지도 모릅니다. ‘이 뭣고? 이게 뭘까?’ 하는 것에 10년이 걸리고 20년이 걸리는 겁니다. 당당히 ‘네가 있으면 네가 있다는 것을 증명해라.’ 하는 것하고 ‘이게 뭣고?’ 하는 것하고, 수박을 놓고 ‘이게 뭣고?’ 하고 있는 거하고 그냥 칼로 탁 잘라서 먹어 보는 거하고는 의미가 다릅니다. 

그깟 놈의 거, 이래도 한세상 저래도 한세상인 것을 칼로 잘라서 죽으면 어떻고 살면 어떻습니까? 이왕지사 배낭 지고 한번 나왔다가 이 모습은 원점으로 돌아갈 건데, 맛을 봐야 먹고 싶기도 하는 생각이 들지 맛을 보지도 못했는데 어떻게 먹고 싶은 생각이 나겠습니까? 

그러니까 무조건입니다, 무조건. 일체 만법이 벌어지는 이 세상이 전부 자기로 인해서 생긴 거니까, 자기만이 자기가 있다는 것을 증명받아 가지고, 세상이 둘이 아니게 돌아가는 이 이치를 꿰뚫어서 알기 위해서는 또 놓고 뭉쳐 놓고 뭉쳐 놓고 그렇게 해 나가야 됩니다.

천도재와 제사 지내는 마음
질문 새해가 되면 선원에서는 어김없이 합동 천도재와 촛불재를 지내게 되는데, 굳이 천도재를 형식적으로 지내지 않더라도 저희들이 일상생활에서 밥을 먹을 때도, 항상 일체 중생들과 또 조상 영가와 다 함께한다는 마음으로 먹게 되면 그것도 그 작용을 한다고 이렇게 들었거든요. 제가 옳게 알고 있는 것인지요. 그리고 천도재를 지낼 때, 집에서 제사 지낼 때 어떻게 마음을 내야 하는지요.  

답변 그거는 당신 마음이고 죽은 영가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여기 살아 계신 분들도 다 마음이 천차만별인데, 죽은 사람이라고 어떻게 똑같을 수가 있겠습니까. 이런 도리를 하나도 모르고 돌아가신 양반들은 절대 그게 아니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그걸로라도 하면서, 이게 왜, 콱 해 놓으면 부러진단 말 있죠? 너무 눅진눅진해도 안 되고 너무 강해도 안 되고 그러니까 알맞게 하면서 서서히 맑게 청정하게 이끌어 드려야 합니다.

내가 제사 지내거나 천도재를 하거나 이럴 때 왜 떡을 둥그렇게 몇 조각 해 놓으라고 그랬는가 하면, 우리가 살아생전에 이렇게 반찬을 해서 놓고 먹고 이러지 않습니까? 그런데 여기다가 도로 묶어 놓으려면 반찬들을 해 놓고 그렇게 뚱땅거리고 지내도 되고, 그렇지 않고 부처님하고 한자리를 하게끔 하려면 그냥 둥그렇게…, 그것도 안 해 놔도 되는 건데, 남이 볼 때도 그렇고 우리도 섭섭하고 그러니까 둥그런 떡을 하나 해 놓고 삼색 과일만 한 그릇에 그냥 놓고 초, 향만 켜고 지내라고 하는 겁니다. 그 이유는, 모든 사람이 살면서 지어 놓은 그 먹고 살던 습이 죽어서도 떨어지지 않는다면 벗어날 수가 없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죽어서도 자기가 먹고 살던 그 생각이 나서 자꾸 뭘 해 달라고 그러거든요. 먹지도 못하면서도 먹게 해 달라고 하고 성가시게 굴거든요. 성가시게 군다 하더라도 잘되기만 하면 좋은데 잘못됐으니까 성가시게 한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살아 있는 양 생각을 하고 그러는 거죠. 

그래서 그렇게 지내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제사 지낼 때 음식을 많이 차린다고 형제들 돈을 모아서 이렇게 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렇게 해서 네가 더 냈느니 내가 더 냈느니 하면서 얼굴을 붉히고 싸움을 한다면, 음식을 많이 차려 놓고도 그렇게 더 조상들을 옭아 놓게 되는 것입니다. ‘요 음식 많이 먹고, 싸우고 죽고 사는 데에 또 태어나서 살아라.’ 하고 그렇게 붙들어 매 놓는 거죠. 그러니까 아예 그럭하지 마세요. 울고불고, 돈 많이 들이고 또 싸우고, 해 놓고 귀찮고 하기도 귀찮고, 여러 가지 불편한 점이 많죠. 조상들이 많은 집에는 일 년에 몇 번씩 되니까요. 

그러니 그럭하질 말고 떡 한 조각이면 된다고 했습니다. 둥그런 거 하나를 표시로, 과거 현재 미래를 한데 합쳐서 한 떡으로 해 놓는 겁니다. 그 뜻이 다 있습니다, 그게. 그래서 영가님들이 볼 때는 아주 큰 도량으로 보이게끔 돼 있습니다. 이 세상이 하나도 부럽지 않게끔요. 거기에 칠보가 가득 차 있으니까요. 그러니 부러울 게 뭐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자손들이 더 잘될 수밖에요. 온갖 거를 다 차려 놓고 하는 집들은 오히려 그냥 별의별 일이 다 생기고 그렇지만, 그렇게 진짜로 믿고 하는 집들은 아마 고뿔도 제대로 오지 않을 겁니다. 허허허. 

그러니까 ‘떡을 하나 해 놓고, 지내는 사람이 떡 안에 다 한마음으로 넣어야 된다. 그리고 지내는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을 하고 지낸다.’ 하는 겁니다. 그래서 ‘한마음’ 하면 벌써 떡 하나예요. 한마음 하면 떡 하나로 표현해도 돼요. 그래서 우리 모든 영령들을…, 이런 좁쌀 알갱이 하나에다가 일체제불의 마음을 다 넣어도 이게 두드러지지도 않으면서 똑 알맞고, 일체제불의 마음을 이 큰 그릇에다가 넣어도 또 크면 큰 대로 차고 작으면 작은 대로 차고, 아주 그렇게 여여하다 이 소립니다.

그러니 자손들이 부모에게 재를 지낼 때에 조상들이 살 때의 그 습기를 다 떼게끔 내 마음과 둘 아니게 만드세요. 내가 지금 공부하고 있잖아요? 그러면 조상의 마음도 주인공에다가 모든 걸 굴려서 놓으면 거기에서 굴려서 다 세척이 되듯이 깨끗하게 모두 나오죠. 왜, 세탁소에 들어가면 깨끗하게 빨래가 돼서 나오죠? 그런 거와 같이 된단 얘기예요. 그럼으로써 그 떡 하나도 족하다 이런 말이죠. 이 떡 하나를 가지고 이 세상을 다 먹이고도 떡 하나는 되남더라 이런 말입니다. 

그리고 부모의 은공을 기리면서 열심히 그 주인공한테, 부처님과 같은 한자리를 하시게끔, 그저 한도량에 계시게끔 그렇게 관한다면…, 산 사람들이나 먹고 사느라고 온통 헤매지, 아니, 입이 있습니까, 몸뚱이가 있습니까? 뭘 먹겠다고 조상들이 그렇게 하겠습니까? 그것은 생각이죠. 생각을 거기에서 벗어나게 해 드려야죠. 그죠? 벗어나지 못하면 또다시 이 세상에 태어나서 또 그렇게 먹고 사느라고 그냥 극매야 하니 상세계에는 한 번도 오르지 못할 거 아닙니까? 

큰 나무를 베어 내야 하는데
질문 저희 집에 아주 오래된 큰 나무가 있어 베어 내야 할 상황인데 그냥 베어 내려니 뭔가 께름칙하네요. 이런 상황에서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요?

답변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신 겁니다. 일체 중생이 다 그 무심(無心)에 와서 닿는다고 하더라도 모든 게 무심이기 때문에, 들여놓은 것도 두드러짐이 없고, 그것을 많이 굴려서 내보내도 또 주는 사이가 없다 이겁니다, 영은 영이니까. 알아듣기 쉽게 하느라고 영은 영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영이 왜 묘하냐. 그것은 체가 없어서, 만물을 목신 한 가지로 비유할 때, 목신과 내 마음이 한데 한마음이 된다면 내가 목신이 될 수 있고 목신도 내가 될 수 있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무를 자르면 탈이 난다고 하는 것도 둘이 아닌 까닭인데, 그 마음을 내 마음에다 넣어서 한마음이 된다면 그때는 잘라도 괜찮게 되는 것입니다. 이 지금 모두 신중단을 만들어 놓고 영가 위패를 붙여 놓고 하는 그것을 모두 없애도, 그 마음이 한마음으로 들기 때문에 위패는 치워도 된다 이겁니다. 이 뜻을 아시겠습니까? 이 마음의 작용이라는 것이 얼마나 묘하고, 뜻이 깊고 광대무변한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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