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나무는 네 뿌리를 믿어야 공덕이 있느니라

여러분은 삼재니 뭐니 하는 그런 데 귀를 기울이거나 젖어들지 말고 
흔들림이 없이 그냥 꿋꿋하게 자신을 완벽하게 밀고 나가는, 
물러서지 않고 밀고 나가는 패기와 신념을 가지십시오.

 

참다운 인생의 길은 간다는 것은

질문 인간으로 태어나기 힘들다 하는데 그럼 이렇게 인간으로 태어났으면 어떻게 해야 참다운 인생의 길을 가게 되는지요. 

답변 여러분은 그렇게 겪어 보지 않았고 또 실감 나지 않는 일이 돼서 모르시겠지마는 이런 걸 얘기로 한다고 해서 여러분들이 실감 날 리는 없겠지요. 그러나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이 증명이 되고 또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예를 들어서 물속에도 그 돌에 있는 그 느끼, 또는 흙의 느끼 그런 것만 걷어 먹고 남하고 싸움하기 싫고, 또 연쇄적으로 잡아먹어 가면서 먹기 위해서 살기 싫고 한 그 생물들이 있습니다. 그런 거는 그저 남을 피해서 돌 틈에 가서 살면서 그런 거를 걷어 먹고 사는 동시에 천 년을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사람 된 것이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해서 사람 된 게 아닙니다. 그렇게 해서 천 년을 지내고 난 뒤에야 바로 인생이라는 한 꺼풀을 쓰고 나옵니다. 이건 간단하게 그냥 얘기하는 겁니다. 그 과정은 말고도 말입니다.  

또 동물들도 남들하고 또 싸움하기 싫어서 아주 인적이 없는 그런 곳에, 살 수도 없고 냉기도 면할 수 없는 그런 곳에 그저 눈을 헤쳐 가면서 풀뿌리만 먹고 사는 그러한 동물들도 있습니다. 그렇게 남한테 해롭지 않게 하면서, 또 남하고 어울리지 않고 외롭게 이렇게 살면서도 그 천 년을 견뎌야 사람의 꺼풀을 쓰고 또 이 들에 내려옵니다. 그렇다면 그런 과정, 그 어려움은 다 제쳐 놓고라도 그 사람의 꺼풀이 한갖 나무의 나무이파리와 같으니 말입니다. 여러분, 만약에 이런 모두를 아신다면 목을 놓고 앉아서 울어도 시원치 않은 일입니다. 하늘을 쳐다보고 하루 종일 껄껄대고 웃어도 시원치 않고 하루를 땅을 치고 울어도 시원치 않은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인연들이 수없이, 겹겹이 쌓이고 쌓여서 또 어우러졌습니다. 그 어려움을 비켜 놓고라도 그것도 또 못다 해서 인간의 한 이파리로 태어나서 그렇게 서로 어울려서 한 이파리가 한 나무에 모두 있다가, 그저 하나 떨어지고 둘 떨어지면 울고들 합니다. 그러나 그 이파리는 또 떨어지면서 바로 간다는 얘기도 없고 온다는 얘기도 없고 그냥 떠나갑니다, 바람에 날려서. 그러나 거기 붙어 있는 것은 아직 붙어 있으니까 “너는 가면 어디로 가느냐.” 하면서 바로 바로 친지처럼, 형제처럼, 부모처럼 같이 있다가 떨어지는 그 나무이파리를 보고 바로 애원합니다. 그런데 자기는 자기대로 얼마 안 있다가 또 그렇게 해서 바람에 날리거든요. 그런데 그 바람에 날리는 그 낙엽은 그래도 생명이 소중한 거라, 그 몸 하나하나를 아주 허탕 내버리지 않고 그 땅에 도로 거름이 돼 줍니다. 우리는 몸과 마음, 생명이 소중하게 바쳐집니다. 

우리가 그렇게 겹겹이 겹쳐진 인생의 그 생로를 거쳐 오면서, 슬프게 아프게 거쳐 오면서도 그걸 이겨 나가고, 그 비호같이 살을 에어 내는 바람도 우리는 마다 않고 이렇게 겪어 나와서, 오늘날에 인간이 돼 가지고 그렇게 했기 때문에 우리는 한자리에 이렇게 앉아 있는 것입니다. 그 뜻을 아셔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인간으로서의 한 꺼풀을 쓰고 나온 그 인간의 모습이 어땠던가. 한 나무의 수많은 이파리들이 그저 가을이 오면은 바들바들 떨면서 단풍이 져서 어디로 흔적 없이 하나하나 날아 떨어지는 거와 같은 인생살이, 한번 생각해 보신 점이 있습니까. 지금 현재에도 한 이파리에 지나지 않게 한 인생이 뜬구름처럼 그냥그냥 훌쩍훌쩍 훌쩍훌쩍 가 버립니다. 

그런데 우리가 참다운 인생의 길을 안다면 너무도 참…, 참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아무리 지식도 없고 학식도 없고 그런다 할지라도 참이라는 게 있습니다. 진실이라는 게 있습니다. 진실은 속일 수가 없습니다. 진실이라는 것은 누가 알기 이전에 내가 알고 있기 때문에 진실이라는 게 있습니다. 진실은 내가 알고 있기 때문에 괴로움도 바로 내가 갖는 겁니다. 내가 잘못했다면, 누구를 속였다면 바로 내가 알고 있기 때문에 바로 그게 지옥입니다. 바로 진실이라는 거는 진실했기 때문에 떳떳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것에 걸리지 마세요. 모두 한마음에 모든 것을 놓고 사신다면 그것이 전자의 업도 녹아 버리면서, 우리는 스스로 차원이 높아지면서 스스로 진실을 찾게 되고 스스로 중심을 잃지 않게 되고 아무 데 가나 참선이 됨으로써, 자유인으로서 예전에 그렇게 아프게 해서 인간의 한 껍질을 쓰고 나왔거늘 오늘날에 인간의 껍질이 바로 무엇이었던가를 또 알 수 있게끔 되는 겁니다. 인간의 껍질이 저런 나무이파리와 다름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항상 봄이 오기를, 그거를 기대를 해서 기대를 하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이 한 분만, 한 사람만 그렇게 된다 하더라도 우주의 만물이 다 바로 양식을 얻는 거나 마찬가집니다. 여러분 한 분이 깨달았는데 그 만물이, 이 산 저 산 푸른 산이 전부 만물이라면 전부 양식을 얻는 거나 같습니다. 우리가 깨달음이 없는 동네는, 세계는 바로 우환 가난 이런 것만 오고 파괴만 와요, 싸움만 오고. 그러니까 우리가 하루속히 공부를 해서 극락세계, 즉 말하자면 사람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들어서 잘 살 수 있으면 좋지 않겠습니까.

상대를 둘로 보지 않으려면
질문 부처 눈에는 부처만 보인다지만 저는 상대에 대한 분별심이 잘 내려놔지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면 상대를 둘로 보지 않고 한마음이 될 수 있을까요?

답변 우리가 지금 태어난 것이 시발점이 돼서 종교를 믿고 이렇게 가는데, 물질세계를 뛰어넘어서 이제 피안의 세계로,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로 넘어간다 이런다면 이것이 살아서 열반이라고 하는 경계입니다. 죽어서 열반은 없어요. 그러니까 한번 내가 모든 거를 놔서 죽은 세상까지 돌아야, 살아 있는 세상과 죽어 있는 세상이 동시에 같이 있는데 거기를 찰나찰나 이렇게 한 바퀴 돌 줄 알아야, 모가 나지 않게 돌아갈 줄 알아야, 50%와 50%를 합쳐서 100%를 같이 굴릴 줄 알아야 이게 됩니다.

그래서 한 바퀴 돌아와야 그 둘이 아닌 도리를 확실히 알 수 있어요. 왜냐하면 내가 이 세상에 나와서 자식이 됐다가 부모가 돼요. 부모가 됐다가 또 한 번 옷을 벗고 한 번 돌아요. 돌아서 다시 탄생을 해 보니까 딴 부모한테 또 태어났어요, 인연에 따라서. 그러니까 또 딴 부모의 자식이 되더란 말입니다. 그런가 하면 딴 모습으로다가, 짐승의 모습을 가지고서 짐승의 자식이 돼서 또 나오거든요. 그러니까 돌고 돌다 보니까 내 자식 아닌 게 하나도 없고, 내 부모 아닌 게 하나도 없고, 내 형제 아닌 게 하나도 없더라. 공동묘지에 가 보니까 남녀노소도 없고 그대로 늙었더라, 이렇게 나옵니다. 그러니까 그것 또한 깨쳐야 알겠죠. 

그러니까 지금 이 염주 줄과 염주알이 둘이 아니다, 뿌리와 싹이 둘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 뿌리의 세계를 알아야 뿌리의 세계에서 현실의 세계로 나오면서 자꾸 화해서 모습이 바뀌어서 나오는 거, 인연이 바뀌어서 나오는 거, 그런 거를 다 이렇게, 50%만 아는 게 아니라 100% 돌아가면서 알아야 ‘아, 모두가 둘이 아니로구나!’ 이렇게 진실하게 알지 내가 직접적인 행을 해 보지도 않고, 보지도 않고, 듣지도 않고, 먹어 보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둘이 아닌 줄 알겠습니까? 

그러나 이렇게 죽었다 깨어나고 깨어났다가 죽고 이러는 도리를 확실히 알기 위해서 우리가 지금 이 공부를 하는 겁니다. 그렇게 한다면 그 도리를 알게 됩니다. 내 과거에 살던 나와 현실에 살던 자기와 둘이 아니게 상봉을 해야 진짜로 그런 도리를 알게 되는 겁니다. 스스로 알게 돼 있어요. 

그러니까 스스로 너 나가 없이 자비를 베풀 수가 있고, 네 부모 내 부모 아님이 없이 자비를 베풀 수가 있고 마음을 낼 수가 있지, 어떻게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너 나가 따로 있다고 생각하는데 ‘아이고, 둘이 아니다.’ 이럴 수가 있겠습니까? 모습이 둘이 아니라는 게 아니라 그 마음이 둘이 아니다, 영혼이 둘이 아니다 이겁니다. 영혼이 둘이 아니라면 진짜로 자비를 베풀 수가 있는 겁니다. 

그리고 모습은 따로따로 각각 있을지언정 한 줄에 꿰였다 이겁니다, 한 줄에. 이 염주알은 따로따로 있으나 한 줄에 꿰여 있으니까 ‘너 나가 둘이 아니구나.’ 이렇게 알아지는 겁니다. 그러니 그것도 또한 발견을 해야 아시겠죠, 확실하게. 그러나 발견을 못 했어도 ‘진짜로 뿌리의 세계는 그렇게 둘이 아니구나. 영과 영이 만 개가 한데 합쳐도 영은 영이고 바로 둘이 아니구나.’ 이런 걸 알게 될 겁니다. 그러니 우리가 모두 자비를 베풀고 사랑을 하고, 욕심을 부리지 않고, 남을 증오하지 않고, 미워하지 않고, 이렇게 항상 하신다면 자식의 업보도, 남편의 업보도, 아내의 업보도, 부모의 업보도 다 사라지게 돼 있는 것입니다. 

여기 실천을 아주 잘하고 가시는 분들도 많은데, 그게 왜 그렇게 되는지는 모르면서도 실제로 체험하고 가는 분들도 많이 있습니다. 왜 그렇게 되는지는 모르지만 자기가 그만큼 했기 때문에 그렇게 된다는 거는 알고 있을 거예요. 컴퓨터에 입력하는 것과 같이 입력이 돼서 나오는 데다가 다시 입력을 한다면 앞서의 입력은 한 찰나에 없어진다는 사실을 그대로 얘기해 드렸으니까요. 

삼재라는 게 정말 있나요?
질문 우리가 뭔 일이 잘 안되면 “삼재가 들었나?” 이런 말을 할 때가 있는데 정말 삼재라는 게 있는 것인지요.

답변 항상 여러분께 말씀드리지만 무엇을 하든 자기 주처를 믿고, 자기 불성을 믿고 그 자리에 놔야 합니다. 즉, 주처라는 자체가 주장자도 되고 불성도 되고 주인공도 되고 자부처도 됩니다. 그 주인공으로 인해서 우리가 주장자를 세워서 항상 수레가 구르듯이 그렇게 천차만별의 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바퀴는 모두 중심에 꿰여서, 그 중심을 꿴 심봉이 바로 바퀴를 굴리는 거죠. 거기서 힘이 배출되기 때문에 그 심봉을 끼고 바퀴가 이탈이 되지 않고 돌아가는 겁니다. 모두 이 심봉에 의해서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구랑신이 내릴 때에 집을 지으면 악행이 벌어진다, 또는 삼재 액난이 들면 그해는 상당히 조심을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공부 하는 분들은 일체 모든 게 직결이 돼 있고 가설이 돼 있는 까닭에 그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스럽습니다. 악행이라는 그 자체가 말로 헤아릴 수가 없는 겁니다, 생활에 다 들어 있기 때문에. 누구 말마따나 지수화풍으로 벌어지는 일들, 또 사람이 살아가다 혹사를 당하는 일들, 이 모두를 말로 어떻게 다 하리까, 각각 그렇게 벌어지는 일들을. 

이 마음에 직결되는 직결처가 자기 주인공의 주장자니까 삼재가 벌어졌든 구랑신이 내렸든 어떠한 문제가 일어난다 하더라도 거기에서 통신이 되면 모두가 한마음으로 구성이 됩니다, 통신이 돼서. 그러니까 그런 거 벌어질 일도 없고…. 그래서 이 마음공부를 하는 사람들에 한해서는 ‘구랑신도 없고 삼재도 없다, 고도 없고 집착도 없다, 멸도만이 있다’ 이런 거죠. 

그래서 부처님과 더불어 역대 조사들이 다 “네 나무는 네 뿌리를 믿어야 공덕이 있느니라. 네 나무는 네 뿌리를 알고, 둘이 아닌 줄을 알고 찰나찰나 이렇게 생활을 하는 데에 찰나찰나 없어지는 줄 알아야, 공해서 없어지는 줄 알아야 둘 아니게 여여하게 들이고 낼 수 있느니라.” 하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마음공부가 얼마나 간편한지 모르겠습니다. 이 마음이라는 자체가 광대하고 무변해서 전부 통신이 안 되는 데가 없습니다. 새들이 지저귀어도 다 통신이 됩니다. 꽃들도 다 통신이 됩니다. 하다못해 길을 걷다가 만나는 나무나 돌 하나도 통하지 않는 게 없습니다. 여러분은 듣지 못했으니까 이것을 그냥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들을 하시겠지만 들리지 않아도 뜻으로는 같이 통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길을 걷다가 잘못될 것 같으면 옆에 돌 하나가 서 있어도 그 돌이 스스로 제대로 가게 합니다. 왜? 그 마음하고 통하니까 그 마음이 스스로 바로 가게끔 돼 있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를 할 때 바깥으로 한다면 통신이 안 됩니다. 그래서 나를, 내 가정을 위해서 거기에 모든 거를 다 일임하고 관한다면 모두 저절로 일체 한마음이 다 통하는 겁니다. 여러 가지로, “세계를 위해서, 우리 불자 전부를 위해서” 이렇게 안 해도 그냥 저절로 통합니다, 저절로. 이게 공덕이며 공심입니다. 공생, 공심, 공체, 공용, 공식화하고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간단하게 이 주처에다가, 당신 주인공인 주장자에다 모든 것을 다 일임해라, 일임하고 굴리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의 가정에나 몸에나 용도에 따라서 환경에 따라서 오는 것을 대치해 막아 나가는 것을 ‘굴린다’고 합니다. 

차를 타고 운전을 하고 다닌다고 하더라도 ‘야, 오늘 하루도 무사히 운전하게 해.’ 하고, 내렸으면 ‘참 무사하게 해서 감사해.’ 하고 일심으로써, 언제나 자기를 리드해 나가고 사회를 자기로 인해서 리드해 나가는 그 주동자를 항상 주시해야 되겠죠. 그런데 일을 하다 보면 주시를 안 해도 주시한 게 되죠. 그놈이 보게 하고 듣게 하고, 가고 오게 해서 내가 움죽거리니까 주동자는 자기 주장자가 주동이 돼서 있죠. 

그러니까 자기 주동자가 바로 자기를 이끌어 가는 선장이거든. 왜 선장이라고 하느냐. 심봉이 끼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움죽거리지 않는 심봉이 그 힘을 배출해서 이 수레바퀴가 돌아가니까요. 자기 몸이 수레바퀴라고 한다면 그렇단 말입니다. 수레바퀴와 같다 이겁니다. 그런데 여북하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수레바퀴 돌아가듯 한다 이런 말을 했겠습니까?

수레바퀴가 돌아가는데, 비행기 프로펠러 돌아가듯 돌아가는데 거기 먼지가 앉을 새가 어딨으며, 병고가 붙을 새가 어딨으며, 삼재가 붙을 새가 어딨으며, 구랑신이 붙을 새가 어딨으며, 이 세상만사 모든 것이 붙을 새가 어디 있습니까? 고가 붙을 새가 어딨고! 

내가 줄창 이런 말 하죠. 우리가 지금 현재 발자국을 떼어 놓을 때에, 떼어 놓으면 한 발 없어지고 떼어 놓으면 한 발 없어지는데 무슨 고가 붙습니까? 떼어 놓으면 없어지는데 거기에 고가 있습니까? 팔자 운명이 있습니까? 구랑신이 붙어 있습니까? 삼재 액난이 붙어 있습니까? 붙어 있는 게 아니거든요. 여러분의 생각에 의해서 그게 붙어지는 거지 붙어지는 게 없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께서는 못났든 잘났든 ‘나’를 믿으세요. 아주 자기가 못나고 형편없다 하더라도 그건 형편없는 게 아닙니다. 자기가 이 세상에 나올 권리가 있어서 나왔고, 나왔으니 또 살 권리가 있고, 살고 있으니 ‘자기가 자기를 리드하고 간다’는 그 도리를 알 권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육조 스님은 ‘내 불성이 있는지 어떻게 알았으리까? 내 불성이 여여한 줄 어떻게 알았으리까? 내 불성이 갖추어 가지고 있는 줄 어떻게 알았으리까? 내 불성이 만법을 들이고 내는 줄 어찌 알았으리까?’ 하신 겁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삼재니 뭐니 하는 그런 데 귀를 기울이거나 젖어들지 말고, 흔들림이 없이 그냥 꿋꿋하게 자신을 완벽하게 밀고 나가는, 물러서지 않고 밀고 나가는 패기와 신념을 가지십시오. 또 우리가 그런 신념에 의해서 바른 생각을 하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가 못났다고 해서 ‘나는 부처가 될 수 없어.’ 이러는 사람은 이 마음공부를 못 하고 항상 생사윤회 바퀴에 끄달려서 세세생생을 그 바퀴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아시겠어요?

육바라밀 실천
질문 불자의 중요한 수행 덕목으로 육바라밀이 있는데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어떻게 실천해 나가야 하는지요.

답변 모든 것이 주인공이라는 그 마음에서 빚어지는 일들입니다. 내가 지혜가 풍부해서 모가 나지 않고 둥글게 모든 것을 무주상으로 조건 없는 사랑을 할 수 있을 때에 보시가 되는 거죠? 만약에 조건이 있다면 보시가 아니죠. 어떻게들 생각하십니까? 이름이나 나려고 하고 권세나 가지려고 하고, 또 자기가 해 나가는 일들이 좀 더 순탄하게 나가기를 바라는 그 욕심에서 하는 거는 보시가 아닙니다, 그게. 유무를 타파하고 조건 없는 자비로써 보시를 할 때에 그게 무주상 보시입니다.

그런데 무주상을 행하는 거는 어떤 놈입니까, 또. 보시, 지계, 인욕이 따로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바로 그 한 주인공 마음에서 지혜도 나오고 무주상도 나오고 행동도 나오고 또 인욕도 나오고 다 그러는 것입니다. 인욕을 행하고 보시를 한다 하더라도 함이 없이, 머무르는 바가 없이 하는 겁니다, 지금. 그렇게 하게끔 마음의 다스림이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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