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나로다가 고정되게 있지 않더라

여러분의 마음이 태양빛을 받으려면 문을 활짝 열어놓고 
옆도 없고 지붕도 없어야 되는데
여러분의 마음을 닫아놓으니까 못 들어가는 것입니다. 
볕이 들어가주는 게 아니라 여러분이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질문자1(남) 스님, 내가 없으면 모든 것이 없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저번 날 냉수를 제가 한 컵 마셨더니만 상당히 시원했습니다. 근데 그 기분에 온 세상이 다 시원할 것만 같았습니다. 그래서 생각에 ‘그 한생각이면 모든 것이 다 같이 돌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큰스님 본래 우리가 공생, 공심으로서 공용을 하고 돌아가고 있지요. 그건 대의적인 문제고요. 내가 한생각을 내서 옆의 사람도 못 보던 거를 알게 됐다, 또 내가 물 한 모금 마시면 내가 시원하니까 딴 사람도 다 시원할 거다 하는 것도 내가 시원하기 때문에 다 시원한데, 나는 시원한데 저 사람은 내 마음을 모르기 때문에 시원한 걸 모릅니다. 대의적으로는 다 시원하게 돌아가는데, 이 뜻을 아는 거는 다 돌아가고 있는데 한 개체가 “난 시원한 걸 모른다.” 이런 겁니다. ‘어둠 속에 있으니까 난 밝은 걸 모른다’ 이런 소리나 마찬가집니다. 그럼 그 밝은 걸 모른다 하는 사람은 누가 그렇게 만들어 놨나.

그걸 비유하건대 만약에 어떤 나쁜 짓을 저질러서 항상 추격을 받고 있다고 그랬을 때, 그 양심이라 할 때 도둑은 어딜 가도 밝은 대로로 다니길 꺼려합니다, 잡힐까 봐. 항상 골목으로 또는 그렇지 않으면 어두운 골목으로 이렇게 다니길 좋아하죠. 그런 사람들은 밝아도 밝음을 모르고 사는 사람들이죠. 그런데 우리가 도둑질을 해서 컴컴한 데서 산다 그런 게 아니라 살아나가면서 자기도 모르게 저지르고 가는 것이 인간 아닙니까. 자기도 모르고 저지르고 가는 것은 자기로부터 이 세상이 있는 줄 모르고 자기는 빼놓고 항상 바깥으로 돌아치니까 거기에서 자기도 모르게 업보가 되는 거죠, 쌓이고 쌓여서. 

그러니깐 그게 쌓이고 쌓이고 덮치기로 붙었으니까 내가 밝은 나의 마음으로부터 이 세상을 볼 수가 없고 그게 덮겹을 했단 말이야. 그러니 보이긴 뭐가 보여? 바깥이 영 보이질 않지. 안에 그렇게 그냥, 내 면경 안에 그냥 쌓이고 쌓였으니까. 그러니깐 컴컴하단 말입니다. 뭐, 꼭 도둑질을 해서만이 컴컴한 게 아니라.

그러니까 그것이 달리 미신이 아니라 우리가 바깥으로 구원을 받으려고 하고 바깥으로 내가 잘되려고 하고, 믿음을 바깥으로 가진 사람들은 보통 미신에 불과하다 이겁니다. 모든 것은 잘잘못이 타의에서 오는 게 아니라 자의에서 나오고 있단 얘깁니다. 자의에서 나오고 있기 때문에 자의에서 나오는 거를 알았으면 이 모든 걸, 오관을 통해서 바깥 세계를 내다보면서 들이는 것도 바로 그 자의에다 놔야 될 거 아니냐 이겁니다. 타의라는 거는 물론 체가 있고 보이고 또 들리고 이러지마는, 그리고 물질을 보고, 듣는 거를 듣고 판단을 하지마는, 자의라는 거는 내놓을 것도 없고 들을 것도 없고 볼 것도 없는 가운데서 책정이 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기에다가, 모든 것을 자기 자의에 놓는다면 자의에서 나오고 또 나오는 것이 자의에서 나왔다면 자의에 들이고, 믿음을 이렇게 가져야만이 조금도 안팎이 군더더기가 붙지 않고, 인과가 없고, 인과에 끄달리지 않고, 윤회에 끄달리지 않고, 즉 유전에 끄달리지 않고 얼마나 그냥 가벼운지…. 무겁게 짊어지고 다니지 않고 이러니 얼마나 가볍고 좋겠어요. 오늘의 자유인! 허허허. 그래서 오늘의 자유인이 되니까 결국은 ‘내가 나로다가 고정되게 있지 않더라.’ 그런 걸 알게 돼요. 

내가 가끔 그런 말 하지 않아요? 내가 중인데 고정되게 중으로 있질 않더라. 여러분이 볼 때는 항상 봐도 중은 중이죠. 이 물질로 봐서는요. 그런데 어떤 때 가서는 의사가 되기도 하고 어떤 땐 간호원이 되기도 하고, 어떤 땐 판사가 되기도 하고 또 어떤 땐, 극치적으로 무슨 아주 중대한 일이 있을 때는 변호사도 될 수 있어요. 변호사 한마디에 왔다 갔다 하는 수가 있어요. 어떤 때는 그것을 추적해 보느라고 판사도 될 때가 있고요. 어떤 때는 시골의 한 농부가 될 때도 있어요. 어떤 때는 술집의 작부가 될 때도 있거든요. 

그러니 어찌 중이라는 게 깨끗한 것이 중이냐는 얘깁니다. 아니, 더러워서 더러운 게 아니라 이렇게 깨끗하고 이렇게 올려놓는 것만이 어떻게 부처라고 말할 수 있겠느냐 이겁니다. 그러니 때로는 농부 짓을 했다가…, 그런데 남은 내가 농부 짓을 하는지 모르지.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중의 마음이 바뀌는 게 아니야. 부동해, 여기는 그대로.

그런데 그것은 그것대로 그렇게 바꿔져. 내가 수시로 바꿔져. 예를 들어서 나의 근본, 즉 말하자면 발전소는 여기에 그대로 있는데 전기가 나가도 나가도 줄지도 않아. 야, 저 집에도 전기가 나가고, 거지 사는 데도 전기가 나가고, 술 파는 데도 나가고 전기는 다 나갑니다. 그런데 발전소는 변함이 없습니다. 자가발전소는 술집에 전기가 나간다고 해서 발전소 그 자체가 더럽혀지는 게 아니죠? 불 자체가 더럽혀지는 게 아니에요, 또.

더러운 거를 말하는 게 아니라 더럽고 깨끗한 거를 막론하고 여러분의 마음만 응달을 지어 놓지 않는다면 다 비칠 수 있다 이거야. 여러분의 마음이 태양빛을 받으려면 문을 활짝 열어 놓고 옆도 없고 지붕도 없어야 되는데, 만날 옆도 막아 놓고 지붕도 해 놓고 문도 꼭꼭 걸어 잠가 놓고 하니까 빛이 들어갈 수가 있어야지. 그런데 하치못한 저 똥구덩이 퇴비 해 놓은 데, 하치못한 그 어렵게 사는 집들, 문짝도 변변치 않고 구멍이 숭숭 뚫리고 그런 데는 볕이 들어갈 수 있어. 하물며 똥구덩이에도 비춰 줄 수 있는데 여러분의 마음을 닫아 놓으니깐 못 들어가지 왜 못 들어가느냐 이거야. 볕이 들어가 주는 게 아니라 여러분이 받아들이는 겁니다. 우리가 진리를 우리 마음으로 응용해서 활용을 하는 거지 누가 활용을 시켜 주는 게 아니에요.

‘부처님이 다 알아서 해 주시겠지.’ 하는데 뭘 알아서 해 줘요? 부처님이다 함은 자기 영원한 생명, 그 불성 자체라니까요. 그러나 씀씀이를 쓰는 것은 생각을 내서 활용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법신의 능력으로” 이런 말을 하죠. 쓰고 안 쓰는 것은 여러분에게 달려 있고 그 생명은, 일체 만물의 그 생명은 다 같다는 얘깁니다. 그래 “생명이 있는 것은 다 불성이 있다.”라는 얘기가 나오는 거죠.

우리가 이날까지 억겁을 통해서 진화돼서 이렇게 나오면서, 모습을 찰나찰나 바꿔 가면서 이렇게 나왔습니다. 그리고 아까 선생님이 바꿔 가기 위해서 이런 진리를 공부하느냐는 말씀을 하셨습니다마는 우리가 이날까지 바꿔 왔습니다. 찰나찰나 모습을 바꾸면서 왔어도, 즉 모습이 바꿔지는 거는 자기 마음이 ‘야, 이게 불편하다.’ 그러면, 자기가 지금 생활을 할 때 이게 불편하다 그러면 요렇게 바꿉니다. 

공장을 하는 데도 기계가 인제 다됐다, ‘이건 다됐고 앞으로 신품이 나오는데 이 구품을 가지고 하려면 물품이 제대로 나가지 않으니까 신품을 들여와야 되겠다.’ 하는 생각이 들면 그 기계를 바꾸는 것뿐입니다. 그러면 그것은 아주 또 내버리는 거냐. 내버리는 게 아닙니다. 재생하는 겁니다, 또. 이렇게 우리가 바꿔지면서 오는데, 아까도 말했듯이 물질적인 것은 이렇게 찰나찰나 모습을 바꿔 가면서 나퉈 나오지만, 진화되지마는 우리의 마음 근본만은 절대로 바꾼다, 바꾸지 않는다가 없다 이겁니다. 물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수억 개로, 즉 말하자면 내가 화해서 만법을 응용한다 할지라도 함이 없이 하는 것이다 이런 말입니다, 체가 없어서. 내가 지금, 예를 들어서 선생님이 마음을 ‘아, 저기는 지금 열 식구가 한 식구 때문에 다 죽게 생겼어. 그러니깐 저건 내가 안락사를 해야겠다.’ 한다면, 예를 들어서 안락사를 해야겠다 하는 말을 하는 것은 ‘아이, 저 사람 하나만 없으면 다 살 수 있을 텐데 이거 큰일 났구나.’ 할 때에 그건 안락사라고 하지 않아도 되지요? 그건 사람이, 즉 말하자면 교육상으로 가르칠 때에 안락사라고 이름을 지어 놓은 거지 그건 정말 안락사가 아니에요. 이름이야. 

내가 ‘저 사람들이 다 죽겠구나, 저 한 사람 때문에….’ 이런 생각을 무심코 그냥 할 때, 그건 이름도 성도 없는 겁니다. 그냥 생각이 든 거예요. 그랬을 때에 내가 만약에 그 한 사람을 안락사를 시키고 그 집을 다 살린다 하더라도 선생님한테 추궁이 들어올까요? 체가 없기 때문에 그렇게 응용을 했어도 선생님한테 “너 사람 죽였으니 교도소에 가거라.” 누가 이런 사람 없을 거다 이겁니다. 그렇죠?

그거 한마디만 들어도, 수만 가지를 해도 함이 없으니, 누가 나를 끌어간다, 갖다 가둔다 이런 것이 없으니 자유인이다 이 소립니다. 이렇게 말씀해 드려야만 되겠습니까? 그래서 체가 없는 마음이 그렇게 무궁무진하게 화해서 그렇게 마음으로 만법을 굴리고 응용해도 누구 하나 알지도 못할 뿐 아니라 그거는 탓하지도 못해. 단지 안다면 서로 동등한 도반들끼리나 알 수 있을 것이라는 얘깁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이 도리를 배우는 사람은 나쁜 일을 하려고 해도 극히 나쁜 일은 해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본래. 또 자비가 있기 때문에. 그런데 또 한 가지 이런 건 있습니다. 방편으로써, ‘저 사람을 내가 꼭 사람으로 만들어야 할 텐데 저걸 어떡하면 사람으로 만들지?’ 하는데 한두 번 보고 좀처럼 해서는 안 되겠거든. 말로 일러서도 안 되고. 그럴 때는 할 수 없이 손을 대지 않고 매를 때린다 이겁니다. 그랬을 때 그렇게 고통스럽게 구르다가 나중에 개골창에까지 빠지게 돼서 그때에 인제 다시 개심을 하고 ‘아, 이래서는 안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가야 그때 탁 받아서 다시금 올려놓습니다. 이러한 법 없는 법, 판사 아닌 판사, 판사도 보통 판사가 아닙니다. 허허허.

천체 총지휘의 그 뭐, 법원장이라고 그럴까요? 법원장의 권리도 가졌지마는 부처님들 한자리에서 우주 전체의 회의를 하는 데도 같은 좌석에서 회의를 할 수 있는 권한을 가졌다 이겁니다. 그러면 몸이 안 보이는 분들의 권한이 더 세냐, 몸이 있는 분의, 그 공부한 분의 권한이 더 세냐 하면, 권한은 거기에 천체가 같이하면서도 이 몸이 있는 사람에게 주어진다는 얘깁니다. 실질적으로, 즉 말하자면 대통령이 있는데, 대통령은 보이지 않는 부처님 자리라고 합시다. 여기에서도 항시 자기와 같은 자리면서 몸이 있으니까 몸이 없는 데서 몸이 있는 데로 벌써 심부름을 하게 돼. 심부름을 하게 되는 거뿐이 아니라 마음이 같이 돌아서 나한테로 우선적으로 오게 돼 있어.

그래서 산 부처가 더 무서우냐, 죽은 부처가 더 무서우냐 그러면 산 부처가 더 무서워. 그건 왜? 눈으로 보고 듣고 오관을 통해서 서류 꾸미는 거는 누가 꾸미는 거냐 이거야, 응? 법원장보다 판사가 더 위력이 있을 뿐 아니라, 판사도 위력이 있지마는 검사나 서기나 여기에서 잘못해 넣으려면 얼마든지 잘못해 넣을 수가 있다 이거야. 그러니까 전부 공부한 사람의 역할이, 산신의 역할도, 즉 말하자면 검사나 서기나 이러한 일들을 하는 분들의 위치가 바로 판사의 위치와 동일하게 산신각에서 할 수 있는 그런 도리다 이거야.

그래서 ‘독성’ , ‘산신’ 이것이 따로 있는 건 아니지만 독성이라 하는 거는 이 살아 있는 사람의 천체적인 하나의 물리를 말하는 거라. 그리고 또 산신이다 하는 거는 이 삼심이 공존해서 활용을 하기 때문에 판단을 짓는, 즉 말하자면 판사나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일을 대통령이 하는 건 아니야. 대통령은 부동자세 하고, 한생각을 내는 데에 법신은 그 능력이 나오게 돼 있으니까.

그러니까 각각 있는 게 아니라 그러한 역할이 이 세상에 돼 있는 것처럼 그런 역할을 공부한 사람들이 다 하게끔 돼 있다 이거야. 그 능력은 대의적으로 어느 곳이든 아니 닿는 데 없이 에너지와 같이 우주 전체에 돌아가고 있지마는 우리가 같은 자리에 그게 같이 돌아갈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있고 그만큼 손발이 안 닿는 데가 없다면, 지금 현재에도 오관을 통해서 우리가 들이고 내고 보고 듣고 하고 있단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능력을 거기다 발휘할 수 있는데 누가 그걸 몽둥이로 치는지 또 내 금몽둥이를, 요술방망이를 가지고 가서 살리는지, 살리고 죽이는 걸 몰라.

그러나 부처님의 방망이는 요술방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그 부처님의 방망이는 항상 자비로운 방망이지 요술쟁이 방망이가 아니야. 그리고 도깨비방망이가 아니고. 너무나 자비하고 너무나 세세생생에 그 근원이 있는 방망이기 때문에, 마음을 잘 쓰고 착하고 무던하고 그 공부를 하려고 애를 쓰는 사람 앞에는 세세생생에 그 금방망이를 아주 줘 버리는, 자기가 가질 수 있는 그런 역할의 길잡이가 돼 주신다 이거예요. 그 길을 인도하시느라고 항상, 즉 말하자면 여러분이 캄캄한 데서 살기 때문에 금방망이를 이렇게 들면 그 금이 반사가 되어서 모든 여러분에게 밝게 보인다 이겁니다. 만약에 금을 대낮에 밝은 데서 들면 그것은 빛이 안 나. 캄캄한 데서 들어야 그게 빛이 환하게 나지. 보세요. 캄캄한 밤중에 달이 뜨니깐 밝지만 낮에 달을 보시라고요. 허옇게 그냥 있지요. 그런 거나 똑같습니다.

그러니까 대낮에도 있고 밤에도 있는데 밝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하고 있다면 밝아도 밝은 줄을 남이 모르죠. 그러나 자기가 밝아지면 벌써 어딘가 달라서 자기는 몰라도 남들은 “아, 저분은 어딘가 모르게 참 밝아 계셔. 아휴, 보통 분이 아니야.” 이렇게 되거든. 누구한테 들어서가 아니야. 공부를 이렇게 하다 보면 벌써 자연적으로 여기서부터 먼저 알기 때문이라. 그렇게 알아주는 것이 멋있는 거지, 아무것도 모르면서 남이 “아, 저분은 뭐를 깨쳐서 이렇게 법상을 받고 이런 이름을 받았다.” 하는 것은…. (녹음 안됨)

그분한테 이름을 내리는 것도 그렇고 참 그거를 어떻게 우리가 세세생생에 변치 않는 금이라고 말만 할 수 있으랴 이거야. 그렇게 참, 보배인 것이라. 수많은 중생들에게 보배며 자기의 보배며 둘이 아닌 보배라. 이 세상에 어느 누구하고도 바꿀 수 없는, 어느 뭐하고도 바꿀 수 없는 그런 보배예요.

석존께서도 이 세상에 태어나서 막바로 석존이 된 건 아니에요. 전자에 그렇게 공부를 하셨기 때문에, 현재에 또 공부를 하신 것이 아니라 여러분한테 그냥 보여 주기만 하셨던 거예요, 과정을. 이렇게 이렇게 공부하는 과정이다 하고. 그리고 그 석존이라는, 그 석가라는 이름을 이 세상에서 가지시고 또 성이 석가라는 것을 우리가 알게 된 거죠. 성이 석가가 아니라 불성이 다, 생명이 다 있으니만큼 석가세존도 생명이 있고 우리도 생명이 있으니까 아, 다 똑같지 않습니까. 부동하게 변치 않는다는 그 뜻을 표현하기 위해서 석존이라 하셨죠.

질문자2(남) 큰스님, 그러면 모든 중생의 생사를 자재할 수 있는 생사여탈권을 부처님께서 가지고 계시다는 말씀인데, 그러면 모든 중생이 다 불성을 소지하고 그 주인공을 가지고 있는데요, 주인공만은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그 부처님도. 중생의 무명과 여러 가지 업을 소멸시켜 줄 수도 있고 자유롭게 다스려 줄 수도 있지만, 중생이 다 본래 가지고 있는 그 참마음은 부처님도 깨뜨린다든가 죽인다든가 뭐, 살린다든가 이럴 수가 없을 텐데….

큰스님 글쎄, 내가 알기에는, 아는 것도 없지마는 부처님 마음이 내 마음이고 내 마음이 부처님 마음이기 때문에, 예를 들어서 불쌍한 사람을 보면 불쌍한 마음이 들고, 아까도 얘기했듯이 수십 번 지켜보고 수십 번 그렇게 말을 해 줘서 듣지 않는 자에게는 마음이 끊어지게 돼 있어. 즉 말하자면 마음이 가질 않아. 동하질 않아. 

그럴 때는 그냥 동하지 않는 걸로 인연이 없는 것이 아니라 동하지 않는 걸로 그냥 내버려 두면 그게 그냥 돌다가…. 그렇게 마음이 가질 않으니까 전체가 마음이 그냥 안 가는 거야. 그러니까 부처님의 마음은 그렇게 위력이 있다 이거야. 그러면 우리가 그렇게 마음이 안 가니까 안 가는 대로 살다가 보면 어느 땐가 그것이 회개가 돼. 그럴 때 다시 그 마음이 갈 수 있고 올 수 있는 거지. 그래서 “인연 없는 중생은 거둘 수가 없다. 언젠가 인연이 되면 또 만나겠지.” 이런 거죠.

나쁘게 하고 안 하고가 아니라 둘이 아니기 때문에 자기가 나쁘게 하면 한 대로 자기가 그렇게 되게끔 돼 있어. 그런데 우리 살아 있는 사람들이 잘못하면 법정에서 구형장을 발휘해서 붙잡아 가지만 부처님 법은 그게 아니라 자기가 잘못하면 바로 법정이, 법원이 바로 거기 있다고. 거기 있어서 그냥 자기가 잘못하면 잘못하는 대로 즉시 이렇게 차근차근히 뒀다가 나중에 그게 터지면 거기서 그냥 바로 잡혀. 그래서 벌을 받는 거지.

질문자1(남) 결국 이 법정이 외부에 있는 게 아니라 내부에 있다는 거….

큰스님 외부에 있는 게 아니라 내부에 있는 거지. 법정이든 경찰서든 병원이든 뭐, 부처님 자리든 산신 자리든 어느 자리를 막론하고 내부에 있다 이거야, 내면에.

※위 법문은 대행 선사 법문집 ≪허공을 걷는 길≫ 중 1985년 12월 28일 일반법회 법문의 일부를 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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