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과 행복이 엇갈린 세상 속에서 모든 것에서 벗어나는 데 목적이 있다

제일 막다른 골목에 들어서 커버를 못 할 때
모든 걸 그냥 탁!
모든 걸 죽든지 살든지 그냥 놔버리고
자기 근본에 집중하십시오.

올 새해에는 여러분께서 한마음의 도리에 더욱 정진하셔서 가정에 병고 액난이 없이 행복하고 건강하게, 웃음을 잃지 않고 열심히 사시기를 바랍니다. 

세상을 살아가자면 좋은 일도 있고 언짢은 일도 있습니다. 그런 것은 인간뿐이 아니라 만물의 살림살이가 다 그러합니다. 우리 가정만 그런 게 아니라 날아다니는 새도 그렇고, 기어 다니는 벌레도 그렇고, 우리 인간도 역시 그렇고, 고통이라는 것은 언제나 뒤따르게 돼 있습니다. 그러나 고통도 슬픔도 괴로움도 아닌 그 가운데서 내 마음을 발현해서 자유스럽게 살 수 있게 돼야겠죠. 

하여튼 제가, 아마도 말을 많이 했다면 많이 했고 안 했다면 안 한 것입니다. 말하는 대로 없어져 버리면서 다시 생하고, 다시 생하면서 또 없어지곤 합니다. 쉴 사이 없이 돌아가는 이 반복 속에서 인간이 됐다면 필수적으로 알아야 할 문제의 해답을 꼭 푸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제가 자꾸 말을 해 드리는 것보다도, 질문들 하십시오. 이 자리에서 여러분과 저와 같이 도반으로서 열심히 서로서로 토론하고, 서로가 서로를 돕는 마음의 사랑을 베풀되,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그 속에서 모든 것이 배출되길 바랍니다.

질문자1(남) 제가 큰스님께 질문을 드리는데요, 여러 형제님들이 궁금해하시는 점을 요약해서 대신 질문하겠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가섭 존자님께 전한 불법이 중국 육조 혜능에 이르러서는 아주 우뚝 섰습니다. 그로부터 혜능의 법이 융성하더니 세월이 흐르면서 불법이 번다해지고 상당히 복잡해졌습니다. 그렇다면 큰스님께서 보시기에 혜능의 밝은 법등은 미래에는 어떻게 전법이 되어 갈지 그 인연법에 대해 가르침을 주시면 공부에 도움이 되겠습니다.

큰스님 항상 말씀해 드렸듯이, 이 세상에 헤아릴 수 없는 분들이 깨쳤다 하더라도 찰나찰나에 돌아가는 이 자체가 나 아님이 없다는 그런 사실로 말미암아 하나지 둘이 아닙니다. 그래서 부처님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아닌 것이 부처님이다 이런 말이죠. 그럼으로써 육조 혜능 선사 그 당시에는 많은 사람이 배출되고 그랬지만 지금은 왜 이러냐고 하신다면 내가 무슨 말을 할 게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때나 이때나 똑같습니다. 똑같은데 사람들이 그것을 모르기 때문에, 모두 한 번도 마음을 기울여 생각해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가 지금 길잡이로서 이렇게 일러 드리는 것은 바로 역대 선사가 일러 드리는 말이나 육조 선사가 일러 드린 말이나 같습니다. 지금 여러분 마음 한가운데서 자기를 자기가 알라고, 깨치라고 그때 육조 선사도 역시 말씀하신 겁니다. 역대 조사들도 그렇고 부처님들 보살들이 다 그 말을 한 겁니다. 사대 성인도 “너부터 알라.”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탓이지 왜 그분들의 탓입니까? 그러니까 부처님 법이라는 것은 우리가 다 죽는다 하더라도 풀 한 포기만 살아 있으면 불법은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질문자1(남) 다음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큰스님께서는 주인공에 믿고 맡기라고 항상 말씀하십니다. 보리심을 통해야만 도를 이룬다는 말씀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경에서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예를 들어 ‘이 경의 수승한 공덕이 칠보로 수미산을 장식한 것보다 크다’고 하고, ‘이 경의 사구게 하나만 일념으로 염송해도 윤회에서 벗어난다’고 했습니다. 말하자면 염불문을 세우는 것이겠죠. 또 다른 절에서는 백팔배, 삼천배를 시키면서 말하기를 ‘예불이라는 것은 부처님의 배를 빌어 타고 저 언덕에 이르는 길이라’고 했습니다. 제 손으로 배를 만들기가 힘들어 아미타불 등 부처님과 제불 보살님의 배를 빌어 타고 싶은 게 중생심인데, 이런 경우에 타력에 의지하는 것과 어떻게 다른지요? 염불문이나 예불도 결국은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닌지, 의문이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좀 이해되도록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큰스님 그 말을 나무로 비유하겠습니다. 나무 한 그루에 잎새가 헤아릴 수 없죠? 나무뿌리는 하나인데 가지들은 많고 그 잎새는 더 말할 거 없이 헤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경을 읽는다 하면 잎새를 세는 거와 같고, 또 백팔배를 한다면 바로 나무를 만져 주는 거와 같다. 그렇다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나무와 가지와 잎새가 있는 것을 가르쳐 주면 거기에 뿌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될 수 있으니까 그것을 그렇게 일러 주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잎새를 아무리 세어도 센 사이가 없을 테고, 가지를 아무리 더듬어 줘도 더듬어 준 사이가 없을 겁니다. 공덕이 하나도 없어요. 그러기 이전에 역대 부처님과 조사들은 다 가르치시길 “얘야! 나뭇가지도 아니고 잎새도 아니니라. 뿌리에다 돌리거라. 마음을 일심으로 뿌리에 두어라. 가을이 되면 떨어지고, 봄이 되면 잎이 피고 꽃이 피고 열매가 열리는 그 과정은 뿌리로부터이니라. 그러니 들이고 내는 모든 것을 뿌리에서 들이고 내는 것이니라. 뿌리가 없다면 나무는 모두 죽어 버리고 만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나무에 비유한다면 무엇이든 뿌리에 마음을 두는 것은 바로 뿌리에 물을 촉촉하게 주는 거와 같다 이겁니다. 그러면 가지를 쓰다듬지 않아도, 이파리를 세지 않아도 그 나무는 아주 싱싱하고 푸르르게 자랄 것이 아니겠는가, 이런 뜻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부처님께서 나무 잎새나 나뭇가지나 나무 둥치나 이런 걸 무시한 게 아닙니다. “뿌리부터 알고 뿌리에서 나온 거라는 거를 알아라. 그럼으로써 경을 읽되, 경이 나를 보지 않고 내가 경을 보지 않는 이치가 나오느니라. 절을 하되 절을 하는 사이가 없이 할 수 있느니라. 또 경을 보되 귀로 보고 모든 만물만생의 소리를 듣되 바로 눈으로 듣는다. 그 도리를 알게 되면 눈으로 듣는다도 없고 또 귀로 본다는 것도 없이, 바로 하나가 불끈, 하늘을 끼고 돌아가느니라.” 이런 뜻에 속합니다.

그러니 우리 인간의 마음이, 그 속에 수십억의 의식을 두고, 생명을 두고, 모습을 두고 있는 이 몸이 그 나무와 같이 아주 크다면…, 나무라는 것은 나무로 볼 수도 있지만 나무는 아주 크다는 뜻도 됩니다. 그래서 사람이 수없이 거듭거듭 태어나고 멸하고 이러는데 사람만이 이런 고초를 겪고 이런 행복을 가져오는 것이 아닙니다. 고통과 행복이 엇갈린 세상 속에서 모든 것에서 벗어나는 데에 목적이 있는 겁니다. 행복도 아니요, 고통도 아닌 그 작용 속에서 바로 한생각 일어나는 것이 법이 돼야 된다는 얘깁니다. 한데로 떨어지지 않는 말씀이 법이다 이겁니다. 

그리고 쥘 수도 없고 볼 수도 없고 가질 수도 없으면서, 대천세계 모두 돌아가게 하는 이 하나의 마음을 탁 포착하는 그런 계기가 되라 이런 얘깁니다. 안에도 없고 바깥에도 없고, 이것도 아니고 그것도 아닌, 그러면서도 역력하게 여러분을 끌고 가는 그, 마음 내기 이전 불성 말입니다. 

그거를 일러 드리기 위해서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모든 것을 누가 들이고 내느냐. 마음이 들이고 내는 거다. 그 마음이 이렇게 생각하면 이렇게 끌고 가고 저렇게 생각하면 저렇게 끌고 가니, 그 양면을 다 작용하면서 끌고 가는 것이다. 그러니 조심해서 선(善)의 공덕 길로 끌어들여라.” 하구요. 

이 세상에는 악도 있고 선도 있습니다. 그건 왜냐. 천차만별로 돌아가는 모든 물질, 개성, 마음들이 전부 우리가 있기 이전에도, 지수화풍이 있기 이전에도 개별적으로 자기 개성을 톡톡히 두고 돌아갔던 시절이 있었겠죠. 개별적으로 그렇게 돌아가는 개성이 한데 합쳐서 지수화풍을 이루었고, 지수화풍을 이루었기 때문에 바로 광력이나 전력이나 자력 통신력이 이루어진 반면에 인간, 이 생물이 생겼다고 봅니다. 그러니 모든…, 내가 자꾸 얘기를 해서 안됐군요. 질문하세요. 하하하.

질문자1(남) 제가 다음 질문 할 것을 미리 법문을 하셔서 중복이 되는 것 같습니다만, 다시 제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금강삼매경』에 보면 무주보살이 세존께 드리는 질문 가운데 이러한 대목이 있습니다. “어떤 것을 한생각의 움직임이라 하리까?” 하고 질문을 하니까 세존께서 대답하시기를 “한생각 움직이면 오음(五陰)이 걷혀 나가니 오음 가운데는 오십 악이 갖춰져 있다.”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이해하기로는 오로지 심신을 가라앉혀 무심이 되라 하신 것으로 느끼게 되는데, 한생각을 낸다는 것의 경지는 무엇인지, 또 한생각을 내는 방법을 좀 자세하게 말씀을 해 주시기 바랍니다.

큰스님 한생각이라는 것은 개별적인 생각이 아닙니다. 포괄적인 생각입니다. 한 그릇 할 때 한 그릇, ‘한’이 들어가죠. 그러니까 부처님께서 가만히 있으면 부처님이요, 생각을 해서 말을 했다 하면 보살이거든요. 자기 마음이 부처인 자기한테 물었겠다! 하하하. 그러니까 “한생각을 어찌 생각하느냐?” 할 때, 일체 만생이 다 마음을 들이고 내는 데에 모든 생각, 이걸 한마음이라고 그럽니다, 한마음! 그 한마음 속에는 오십 악이 들어 있다. 그러니까 내가 말하는 것은 선의 생각이 오십이라면 악의 생각도 오십이다. 이 오십 악이라는 것을 볼 때, 생각하는 대로 물질적으로 관습이 돼서 찾는 거, 욕심부리는 거, 애착, 애욕 또는 편견, 아상, 아만 모든 거를 종합해 보면, 보세요. 거기에서 풀리는 그 악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오음 속에는 오십 악이 들어 있으니 악도 오음도 양면에서 같이 작용을 해서 둘이 아닌 작용을 한다면, 내 마음이 이 세상천지에 자유스럽게 밝게 일어나느니라. 그래서, 즉 말하자면 칠보활궁공법으로 들어가느니라 이런 거죠. 그냥 찍는 대로 법이 돼야 이게 활궁입니다. 활궁공법심으로서의 평화를 얻을 수도 있고 또는 전체, 자유 활동을 할 수 있는 것이 중용입니다. 죽은 세상 산 세상을 동시에 작용하면서 활용하는 게 중용입니다. 그걸 일러 주기 위해서 그런 것입니다. 

왜 무주보살이 말을 했느냐. 그 ‘무(無)’ 자가 들어간 것은 바로 형체가 아닌 보살이 물은 것입니다. 물질적으로만 생각하고 색(色)으로 보는 사람의 질문이 아닙니다. 색으로 보지 않고 또는 무심으로도 보지 않고, 양면을 다 작용하는 그분이 모든 사람들을 가르치기 위해서 방편으로 말씀하신 겁니다. 그래서 경에다가 그렇게 해 놨습니다. 그러니까 ‘경을 모조리 읽었다 하더라도 경을 보지 않고 경을 봐야만이 경의 진의가, 뜻이 나온다’고 하신 겁니다. 그래서 보지 말고 보고, 듣지 말고 듣고 이런 뜻을 알아야 경의 뜻이 나오지 않습니까? 저 전깃줄과 전깃줄을 한데 합쳐서 작용을 해야만이 불이 들어오듯이 말이죠. 

질문자1(남) 하나 더 여쭙겠습니다. 저희들이 큰스님 법에 따라서 수행을 하다 보면 아무래도 공부 겸해서 자기가 하는 일, 또는 원했던 일들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공부가 많이 된 분은 그 확률이 더 많겠지만, 그렇게 해서 자기가 소원이 이루어졌다든가 그런 과(果)를 얻었을 적에 그것을 다시 회향을 하는 공덕이 크다고 그러지 않습니까? 그런데 회향을 어떻게 해야 되는 것인지 그것을 좀 말씀해 주십시오.

큰스님 시시각각으로 회향을 하는데 회향이 무슨 따로 있나요? 아니, 밥을 먹고 끝나면 회향이요, 똥을 누고 일어나면 회향이요, 말을 하고 끝을 마치면 회향이요, 모든 게 회향 아님이 없어요. 시초가 있고 회향이 있어서, 우리 살림살이 어떤 거 하나도 떠나지 않는 것이 회향입니다. 그러니 돌아가는 이 이치를 볼 때에 모든 사람들이 근본을 진짜로만 믿는다면 모든 게 회향입니다. 그것을 진짜로 믿지 못하는 것이 상당히 애석합니다. 그렇다고 그런 말을 강조할 수도 없습니다. 어린애한테 뜀박질을 해서 천 리를 뛰라고 하는 격이나 마찬가지기 때문입니다. 어린애더러 사회에 나가서 벌이해 오라고 하는 거나 똑같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가정에서 어떠한 애로점이 내 앞에 닥쳤는데 용도에 따라서 어떻게 하면 이것을 해결을 할 수 있는가를 수없이 말씀을 해 드렸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갖다가 주기까지 하면서 일러 드렸는데도 모두들 받아먹지를 못합니다. 먹는 거는 자신이 먹어야지 되겠죠. 대부분 세 층으로 나누어지는데 처음에 오신 분도 있고, 오셔서 좀 희미하게라도 아는 분이 있고, 이해를 완전히 하시는 분도 있고, 아주 한마음 소식을 얻었다 하는 분도 있고, 그 여러 층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전에 부처님께서 어린애들이 집에서 노는데 불이 났으니까 사탕을 줘서 끌어내려고 “너 장난감 이런 거를 줄 테니까 얼른 나오너라.” 이렇게 해서 그 어린애들을 건지듯이, 여러분에게서 괴로움과 정말 견디지 못할 문제들을 볼 때 사탕을 주기도 합니다. 나는 아무 괴로움도 없는 사람입니다, 솔직하게 얘기해서. 그러나 여러분이 울면 내가 울음이 나오고, 또 여러분이 아프면 나도 아픈 것은 인연의 줄 없는 줄이 얽혀 가설이 돼 있어서 그렇다고 봅니다. 여러분도 지나가다가 불쌍한 사람이 울고 있는 것을 보면 마음이 저절로 언짢아지고 눈물이 나죠? 안 그렇습니까? 남이 울면 덩달아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흐르고 불쌍한 사람을 볼 때는 가슴이 아프고, 그것이 바로 줄 없는 인연줄입니다.  

지금 무슨 말을 하다가 말았죠? 어디로 이렇게 싹 돌아가 버렸어. 하하하, 아니, 내가 무슨 말을 하다가….

그래서 그렇게 모진 비바람이 칠 때는 ‘내가 어떻게 해야 커버를 할 수 있을까.’ 이게 제일 요점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은 애석하게도 그냥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이럽니다. 마음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행동으로도 나옵니다. 마음이 이리 뛰고 저리 뛰니까요. 

그것은 왜냐하면 좀 믿음을 가지고 간다 하는 사람 앞에 오장육부 속에서 모든 인과로 인해서 모인 중생들이 제가끔들 일어납니다. 그것은 과거에 인과를 지은 인연으로 인해서 그렇게 나오는 거죠. 그러니까 어떠한 악의 조건이 나오는 거죠. 그럴 때는 어떻게 해야만 되겠습니까? 또 내가 항상 말씀드리기를 ‘몸속에 있는 수십억의 의식들이 좋고 나쁜 거, 자비, 사랑 이런 걸 아무것도 모른다, 그래서 인간의 마음이 그것을 통솔하면서 다스려야 된다’ 이렇게 얘기했죠.

그러니만큼 어떠한 문제가 있어도, 하늘이 무너지고 깨지고 땅이 솟고 찢어지고, 온통 금방 자식이 죽고 부모가 죽는다 하더라도 거기서만이 해결을 할 수 있고, 거기서만이 이끌어 갈 수 있다는 믿음을 굳건히 갖고 놔야 되는 건데 그걸 놓지를 않고 딱! 마음으로 잡고선 발발 발발 발발 뜁니다. 어떠십니까, 생각에? 아무리 안 그러셨다 하더라도 여러분 양심으로 아는 분들은 부처님께서 다 아는 겁니다. 아니, 부처님이 아니더라도 이 소인도 알고 있을 것 같습니다. 하하하. 

그러니 저는 한시 반시도 안타까운 것이 떠날 사이가 없습니다. 이거 솔직한 얘깁니다. 여기서 왈가당하면 저기서 왈가당하고, 저기서 왈가당하면 여기서 왈가당하는데, 만약에 내가 조촘병이 들은 사람, 즉 기복으로 나가는 사람 같으면 뭐, 그렇게 생각하지도 못할 것이고, 또 그렇게 생각해 줄 생각도 못 할 것이고, 자기 몸도 추려내지 못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저 행복할 때는 행복하다고 하고, 웃을 때는 웃으면서, 고가 닥칠 때는 고가 닥치는 그 잠시 잠깐을 그냥 죽겠다고 하니, 일분일초도 쉬지 않고 계속 그렇게 하는 사람은 말라 죽지 않겠습니까, 그거? 하하하. 그런데 하는 사이가 없이 하니까 이만이라도 하죠.

또 우리 신도님들만이 아닙니다. 기어 다니는 거나 날아다니는 거나, 저 무정물이나 식물이나 살림살이에서 고통받는 거는 저에게는 모두가 다 똑같습니다. 지렁이가 기어가다가 사람에게 밟혀서 허리가 끊어지듯 해서 엉금엉금 기어가는 그 아픔이나, 사람이 차 사고가 나서 다리가 부러져 가지고 입원을 하고 있는 거나 똑같은 경우입니다. 어느 거든지 그 아픔을, 쓰라림을 겪지 않는 생물은 없으니까요. 

그뿐입니까? 죽은 사람들의 영혼들도 살아 있을 때의 그 차원대로 죽어서도 똑같이 있으니까요. 더하고 덜함이 없거든요. 산 사람은 더했다 덜했다 이럴 수도 있는데, 죽은 사람은 부딪침이 없으니까 더하고 덜함이 없죠. 한 그릇의 차원이라면 그대로죠. 그래서 천도가 필요하다고 한 겁니다. 

나는 지금 아주 가슴이 아파서 얘기해 드린 겁니다. 제일 막다른 골목에 들어서 커버를 못 할 때 무조건 그냥 그냥 탁! 모든 걸 죽든지 살든지 그냥 놔 버리고 거기 집중하는 거….

※위 법문은 대행 선사 법문집 ≪허공을 걷는 길≫ 중 1992년 1월 5일 법형제법회 법문의 일부를 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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